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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57)화 (57/85)

57

집으로 돌아온 선율은 밤새 끙끙 앓았다.

괴한이 상미를 각목으로 내려치던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건 큰 거 없어요. 그냥 나는…… 우리 아들이 이제 그만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과거에 아팠던 일들은 모두 잊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꿈만 꾸었으면 좋겠어요. 그 애, 선율 씨를 알게 된 후 8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대요. 수면제를 안 먹으면 잠을 못 잔대. 내 아들이…… 누구보다 건강했던 내 아들이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유신을 힘들게 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고. 그의 곁에서 더 많이 웃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제 자신이 없어졌다. 오늘만 해도 상미가 괴한에게 당했다. 십중팔구는 김한주 부자의 소행일 텐데, 선율은 괴로움에서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내가 없었더라면 네 인생은 어땠을까.

누구보다 빛났던 1학년, 너는 푸릇한 청춘을 누리며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냈을 거다. 아마도 군대도 다녀왔을 거고. 지금처럼 전쟁 같은 사랑 말고 좋은 여자 만나 알콩달콩 연애도 했을 테지.

[너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

대답을 듣지 못했던 그 질문에 선율은 대신 답을 내렸다.

후회해. 후회한다.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해. 내가 널 망칠 수 없도록, 맹목적인 사랑에 너 스스로를 던져 버리지 않도록.

“미안해…….”

청승맞게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미안해, 유신아…….”

선율은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깊게 고개를 묻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 발목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수술이 끝난 후 중환자실로 올라온 상미는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신은 그에게 허락된 짧은 면회 시간 내내 상미의 곁을 지켰다.

막 수술을 마친 상미의 머리엔 의료용 붕대가 감겨 있었다.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며 유신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

유신은 미동도 없는 상미의 손을 어루만졌다. 몇 년 새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손등은 꼭 어릴 적 할머니의 손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엄마 그새 많이 늙었네.’

떨어져 있던 8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길었었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기철에게 복수하고자 눈이 시뻘겋게 돼서 달려오는 동안 어머니는 늙었고, 지쳤고, 약해졌다. 제 앞에서 한 번도 약한 모습 보인 적 없던 어머니가 이렇게 누워 있는 걸 보니 가슴에서 피눈물이 났다.

불효자도 이만한 불효자가 없었다. 지난 세월 매일같이 기다렸을 어머니에게 연락 한 번을 제대로 못 드렸다. 면목이 없어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새 8년.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가면 반겨 주시겠지.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돌아왔는데 결론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다 내 잘못이야. 엄마…….”

소리 없는 흐느낌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장갑을 벗은 하얀 손 위에 거미줄처럼 내려앉은 상흔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반드시 복수할게요. 김기철, 김한주 그 개새끼들 절대 가만히 안 둬.”

유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자위로 상미의 손을 가져다 댔다. 미약한 온기가 남은 그녀의 손에선 여전히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 * *

저녁 늦게 일을 마친 복수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평소에도 그리 단정한 매무새는 아니지만 유독 헐레벌떡 달려온 느낌에 유신은 조금 의아해했다.

“유신아, 나 왔다. 복 누님 괜찮아?”

그가 다급하게 까치발을 들고 유리문 안을 힐끔거렸다. 아주 가끔, 정말 급한 일이 있을 때 복수는 말더듬이 증세가 사라지곤 했다. 그걸 아는 유신은 과격한 그의 반응이 무척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뭐, 복 누님?

낯선 호칭이었지만 상미를 일컫는 말임엔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우연히 호텔 앞에서 만나 선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그걸로 누님 동생 할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유신은 이 와중에도 그게 무척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아까 잠깐 의식을 차렸었는데 통증 때문에 곧바로 다시 잠드셨고요. 수술은 잘된 것 같습니다.”

“후아, 다행이다……. 정말 다, 다행이야.”

아니, 우리 엄마 수술이 잘됐다는데 왜 형님 다리가 풀리는 거죠?

이거 갈수록 수상한데.

유신을 팔짱을 낀 채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복수를 쳐다보았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으로 짚고 있던 복수의 정수리에서 따끔따끔한 기운이 번졌다. 엉겁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살벌한 유신의 눈초리를 마주하게 된 그가 뜨끔하여 두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사이 아니야! 왜 그렇게 노, 노려보는 건데?”

“누가 노려봤다고 그래요.”

“너 지금 누, 눈에서 레이저 빔 나와.”

“그럴 리가요. 내가 세상에서 제. 일. 존경하는 우리 형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데 말이죠.

유신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사이’가 뭘까 조금 궁금해지는 타이밍이긴 하네요.”

저렇게 말할 땐 정말 악마가 따로 없단 말이지.

사악함이 물씬 풍기는 눈빛에 압도당한 복수가 술술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말이야. 실은…….”

복수의 장광설이 시작되었다. 36년 전 상미를 처음 만난 일부터 같이 성가대를 했다는 얘기, 별명으로 놀림받는 걸 그녀가 구해 줬다는 얘기까지. 그의 얘기를 듣던 유신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36년 전 일을 저렇게 세세하게 기억한단 말이야?’

어지간히 관심 있는 상대가 아니면 저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유신의 집요한 추궁에 복수는 끝내 첫사랑이었다는 말까지 토해 냈다.

“무, 물론 지금도 그렇단 소리는 아니야. 그, 그땐 혈기 왕성한 나이였잖아. 말이 거창해 처, 첫사랑이지 아무것도 아니야.”

두 사람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건 유신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긴, 상미조차도 잊고 살던 인연인데 유신이 그걸 아는 게 더 이상했다.

생각지도 못한 깊은 인연에 유신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신이 설계한 거대한 흐름 어딘가에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보, 복 누님 이렇게 만든 거, 그놈들 짓 맞지?”

“경찰은 묻지 마 범죄라고 추정하고 있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내, 내 생각도 그래. 김한주가 앙심을 품고 복 누님을 노, 노린 게 분명해.”

“선율 선배가 그놈을 봤다고 했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못 봤지만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왼쪽 눈두덩에 검은 반점 같은 게 있다고 하더군요.”

복수가 침음을 흘렸다.

“반드시 찾자. 복 누님 이렇게 만든 놈 나도 용서 못해.”

순하디순한 복수의 눈빛이 오랜만에 사나운 빛을 띠었다.

* * *

모터쇼 마지막 날.

관람석 앞줄에 기자단과 각 회사의 임원진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베링거 모터스라는 명패가 놓인 의자에 유신과 복수가 자리했다. 그들의 옆자리엔 공교롭게도 한주가 앉아 있었다.

“여기서 만나니 또 새로운 기분이군요. 그래, 그날은 잘 들어가셨소?”

유신이 대꾸하지 않자 한주가 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생각보다 뒤끝 있는 양반이구먼. 좋은 마음으로 선처를 베풀어 주셨으면 깔끔하게 잊어야지, 그렇게 꽁해 있으면 되나.”

한주의 비아냥거림에 복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발끈하여 쏘아붙이려는 그의 손목을 유신이 가만히 잡았다.

‘상대하지 마요.’

잠시 후면 저 번질번질한 얼굴에서 피눈물이 흐를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이긴 게임에 굳이 발끈할 것도 없었다. 유신은 무섭도록 가라앉은 눈으로 한주를 빤히 응시했다.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선물? 무슨 선물?”

한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내 약점을 치려고 한 거라면 아주 기가 막히게 짚었어요.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글쎄요. 약점이니 뭐니 난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네.”

한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죽거렸다.

유신은 그의 도발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화가 날수록 냉정해지는 성격이 이럴 땐 도움이 됐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차갑게 한주를 노려보았다.

“선물을 받았으니 응당 보답을 해 드려야지요. 기대하시죠. 내가 어떤 선물을 되돌려 줄지.”

“선물 마다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미리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허허.”

“무릎으로 하시면 받죠.”

“뭐야?”

예인정에서 무릎을 꿇었던 일을 상기시키는 유신의 말에 한주의 아랫배에서 불덩이가 올라왔다. 그건 김한주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어디 쳐 보라는 듯 빤히 눈동자를 쳐다보는 유신을 보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건방 떨 수 있는지 내 두고 보도록 하지.”

한주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분노를 참아 냈다. 여기서 주먹질을 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피식.

어쩌지 못하고 주먹을 내리는 한주를 보며 유신이 싱겁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서킷엔 경기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레이싱 선수들이 참여하는 보통의 경기와 달리 이번 행사는 철저히 자율 주행으로 이루어지는 레이싱이었다. 때문에 레이싱 카 주변엔 선수 대신 각 회사의 연구진과 기술팀이 마지막까지 차량을 점검하고 있었다.

유신의 눈이 그중 한 명에게 머물렀다. 한주 자동차의 최신형 전기 자동차 모델 개발에 앞장선 연구팀 팀장이자 복수의 오랜 동료인 이상철이었다.

관람객석을 둘러보던 그가 한주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주는 허허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천천히 일어난 상철의 시선이 유신의 낯에 짧게 머물렀다 떨어졌지만 그걸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공했군.’

유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가 이상철에게 요구한 건 딱 하나였다. 레이싱에 참여하는 한주 자동차의 속도 제한 장치를 풀어 달라는 것.

과거 복수가 연구했던 과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차량의 최고 속력이 일정 시간 이상 유지되면 치명적인 모터 손상이 발생한다는 것.

한주는 그 결함을 속도 제한 장치를 설치해 극복했다. 그러나 방금 이상철이 보여 줬듯 속도 제한 장치는 쉽게 제거가 가능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로도 망가질 수 있었다.

당시 복수는 이 부분을 지적하며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주는 그의 의견을 가차 없이 내쳤고 산업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워 그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당시 상철은 복수 밑에서 일하던 연구원이었다. 자동차 연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는 회사에서 쫓겨나는 복수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진실을 알고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일개 직장인이 제 목숨을 내놓고 진실만을 좇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던 그는 8년 만에 찾아온 복수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차량 마지막 점검 때 버튼 하나 누르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 * *

잠시 후 레이싱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 소리가 들렸다.

수천 명의 관람객이 들어찬 가운데 가수들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유신은 팔짱을 낀 채 무감한 표정으로 서킷을 내려다보았다.

‘파티의 서막이 올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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