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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56)화 (56/85)

56

―선배,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요. 바로 갈 테니까.

선율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마도 선율이 상미를 만난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유신아.”

―허튼 생각하지 말고, 좀!

“나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지 마요. 나 정말 화날 거 같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급했다. 선율은 무너지는 마음을 재차 다스리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머니한테는 연락해 봤어?”

―복수 형님이 하고 있는데 안 받고 있어요. 아무튼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딱 기다려요. 멋대로 도망치면 나 진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졌다.

헤어질 수 있을까. 내게 온다는 그 한마디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데.

잠시 후 그에게서 출발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선율은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모터쇼 팸플릿을 보았다. 일정을 보니 저녁에 세미나가 있었다.

‘브랜드의 대표자가 모두 참석하는 모터쇼라 빠지면 안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모든 걸 팽개치고 나에게 오고 있다.

또다시, 당연하다는 듯이.

언제나 겁을 먹은 건 자신이었고 언제나 도망친 것도 자신이었다. 겁쟁이인 그녀를 위해 유신은 한 걸음씩 무려 8년을 다가왔다. 그 지난한 세월을 홀로 버텨 온 그에게 나는 또 무슨 짓을 하려던 걸까.

선율은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너무하잖아. 한선율 너 정말 비겁하잖아!’

선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해야겠어. 유신이 못 놓겠다고, 내가 정말 잘하겠다고,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기다리겠다고.’

번뜩 정신을 차린 선율이 급히 커피숍 문을 열고 나섰다.

비탈길에 위치한 커피숍의 아래쪽은 선율이 올라온 길이었다. 쭉 내려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니 그쪽은 아닐 테고. 아마도 상미의 집은 오르막 위쪽에 있을 것이다.

선율은 재빨리 판단을 내리고 오르막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가로등이 없는 길인지 사위가 어두침침했다. 한적한 주택가라 오가는 사람도 없어서 지나가는 고양이에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오르막길 중간에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이 나타났다. 선율이 빠른 걸음으로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누군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선율은 사지가 뻣뻣해질 정도로 놀랐으나 그보다 비명을 지른 여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는 데에 더욱 놀라 버렸다.

“어머님?”

선율은 앞뒤 잴 것도 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눈에 모자를 푹 눌러쓴 시커먼 인영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를 내리치는 모습이었다.

“안 돼!”

선율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번뜩이는 남자의 눈이 힐끗 선율에게 닿았다. 위협하듯 눈을 부라린 그가 가차 없이 다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선율은 뒤돌아 달아나는 대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뛰어들었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사람은 틀림없이 상미였다. 저 남자가 누구든, 무슨 목적으로 상미를 해치려는 것이든, 선율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뭐야, 넌.”

남자는 놀라지도 않고 선율을 향해 돌아섰다. 방해꾼의 등장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상대가 가녀린 여자 하나라 만만히 본 듯했다. 선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상미를 막아섰다.

“당신 누구야. 한주그룹에서 보낸 놈이지?”

허, 이것 보게?

남자가 귀찮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완전 범죄로 끝났어야 하는 일이 발각된 것도 곤란한데 심지어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여차하면 선율까지 해칠 생각으로 팔에 든 스패너를 치켜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남의 가게 앞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멀지 않은 곳에서 불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두 팔을 걷으며 다가왔다. 무뚝뚝한 카페 사장이었다.

‘아, 다행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사실 선율이 기대한 건 단 하나였다. 카페 사장님이 제발 들어주기를! 찻잔을 나를 때 언뜻 보았던 우락부락한 팔뚝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심상치 않게 건장한 실루엣을 본 남자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에이, 씨팔!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차피 글렀다고 판단한 남자가 후다닥 등을 돌려 달아났다.

선율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상미의 머리에서 흐른 피가 뜨끈하게 손바닥을 적셨다. 선율이 도착하기 직전 뒤에서 기습을 당한 모양이었다. 선율은 정신을 잃은 상미를 품 안에 끌어당겨 안았다.

“아저씨,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112에 신고부터…… 아니 119부터요!”

내내 무뚝뚝하던 카페 사장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감에 물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슈.”

그는 선율의 요청에 따라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축 늘어진 상미를 안은 선율의 얼굴이 참담했다.

‘이것 역시 그들 짓이겠지.’

그들 부자와 유신의 악연이 결국 상미를 이렇게 만든 거라면…… 결국 이것도 내 탓인 걸까.

모든 악연의 시작점에 제가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처절하게 숨통을 조일 줄은 몰랐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제 다짐이 이토록 무기력할 줄도.

뜨끈하게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마치 그것이 제게 내려진 사형 선고인 것만 같아 선율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으려고 버티고 선 두 다리가 마구 휘청였다.

* * *

상미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곧장 달려온 유신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CT 촬영을 해 보니 지주막하 출혈의 소견이 보입니다. 환자분이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 동공 반응이 아예 없는 상태는 아니고요. 개두술을 하여 일단 출혈 부분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수술 부탁드립니다.”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지는 상미를 보며 유신은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신고를 받고 나온 경찰은 ‘묻지 마 폭행’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정황상 인적이 드문 동네, 그것도 해가 진 이후에 중년 여성을 상대로 한 폭행이라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범죄일 가망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주의 무릎을 꿇린 지 채 24시간도 되지 않아 사건이 발생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안이했다. 이럴 걸 예상 못 했나?’

김한주 부자의 포악한 성정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복수가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에 더욱 경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디자인을 유출해 함정을 판 게 주희이기에 아무래도 그쪽을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느라 정작 세상에 하나뿐인 어머니를 신경 쓰지 못했다. 깊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병신 같은 새끼.”

유신은 이마를 짚으며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서. 하나뿐인 가족이라면서! 그런데 왜 뻔히 눈에 보이는 위협에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거냐.’

“도대체 왜!”

쾅!

유신의 주먹이 하얀 벽을 내리쳤다. 단단한 벽에서 커다란 소음이 울리며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왔다.

그럼에도 유신은 멈추지 않고 두 번, 세 번 더 벽을 내려쳤다. 이렇게라도 자신을 단죄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만해.”

보호자 대기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던 선율이 그의 팔을 억지로 붙잡았다. 유신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몇 번 더 벽을 내려쳤으나 선율이 꽉 몸을 껴안자 거친 몸부림을 서서히 멈추었다.

“……선배.”

“미안해.”

선율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있었어.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어.”

“그딴 소리 하지 마. 선배 잘못 아니야.”

“내 잘못 아니라고, 그래, 그 말 어머니도 하시더라. 그런데 정말 내 잘못이 아니야?”

선율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잘못 꿴 단추였어. 내가 MT 자리에서 술에 취하지만 않았으면, 김기철이 그런 놈인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니…….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신에게 또다시 들이닥친 불행 앞에서 선율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책하지 않으려 했는데, 정작 나쁜 놈은 따로 있다는 것도 아는데 죄책감이 떠나질 않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유신이 비릿하게 조소했다.

“왜, 아예 태어나질 말지 그랬냐.”

“유신아.”

“그딴 식으로 인과 관계를 따지면 만나도 되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선배 그냥 가라.”

“……너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

선율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유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 만난 거 정말 후회 안 하냐고.”

유신은 수술 중이라 쓰인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물이 범벅이 된 선율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가 저 방 안에서 다시 나오지 못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뿐인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그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대답이 뭐이길 바라는데.”

“바라는 거 없어. 그저 궁금한 거야.”

“엄마 저렇게 수술대 위에 눕혀 놓고 내가 뭘, 무슨 말을 해.”

극도의 혼란으로 물든 유신의 눈동자에 선율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 너 역시 부인하지 못하겠지. 어머니가 저렇게 된 것에 내 책임이 조금도 없다고는. 만에 하나 어머니가 무사히 깨어나지 못하면 나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도 없겠지. 나 역시 그러하니까.

“너한테 가고 싶었어. 염치, 체면, 미안함 그런 거 다 내려놓고 너만 볼 자신 있었어. 그런데 유신아.”

선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 너무 무서워.”

내가 얼마나 너를 더 망가트릴지. 나로 인해 시작된 악연의 끝에 뭐가 있을지 이제 나도 모르겠어.

선율은 힘없이 돌아섰다.

“나 버릴 거 아니지, 선배.”

그녀의 뒤통수로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가 닿았다.

“가지 마.”

그가 부탁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처절한 애원이었다.

“나 버릴 거 아니잖아.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잔뜩 격앙된 음성이 복도를 찢어발겼다.

선율은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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