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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율 씨. 나 유신이 엄마예요.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주말 오후,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모터쇼가 한창 진행 중이라 유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사실상 선율의 일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홀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선율은 느닷없는 메시지에 스프링처럼 벌떡 몸을 튕겨 일어났다.
“유신이 어머님? 나한테 어쩐 일이시지?”
지난번에 한주그룹 앞에서 잠깐 보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얘기한 적은 없었던 터라 선율은 적잖이 놀랐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기는커녕 통성명도 한 적이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선율은 메시지에 답을 하기 전에 유신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통화 버튼만 누르면 전화가 연결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끝내 손가락을 접었다.
‘……그냥 나가는 게 낫겠어.’
며칠 전 유신은 그가 넘어야 할 커다란 산에 대해 얘기했었다. 확 밀어 버릴 수도 없는 산이라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오를 수밖에 없다고.
그가 말한 산이 어머니 복상미라는 건 눈치로 알았다. 유신은 자신이 정한 바운더리 안의 사람에게는 무섭게 집착하는 스타일이지만 그 밖의 일엔 세상만사 초연한 편이었다. 그런 그를 죽상을 하고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었다.
‘어머님이 날 반대하시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말을 아끼던 유신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상미에게서 직접 연락이 오니 좀 더 확실해졌다.
‘과거의 일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면 내가 탐탁지 않을 수도 있어. 이유 막론하고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은 맞으니까.’
여자애 하나를 지키기 위해 아들이 감방에 갔다는 걸 알게 된 부모의 심정이 어떨까.
선율은 만나기도 전에 상미에게 죄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래도 일단 나가 봐야겠지.”
유신을 계속 만나려면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일이었다. 선율은 최대한 마음을 가볍게 하고 메시지를 전송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시간과 장소 정해서 알려만 주세요.>
곧이어 상미에게서 답신이 왔다. 몸이 안 좋아 멀리 나갈 수 없으니 집 근처 카페로 와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선율은 알았다고 답을 보낸 후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차분한 옷을 갖춰 입고 단정히 머리를 묶은 선율이 집을 나섰다.
“이러니까 꼭 면접 보러 가는 거 같네.”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에 내리쬐는 햇살.
바람이 차서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코트를 여미고 있었지만 버스 안엔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선율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얼마 전 유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쉽지가 않네. 모든 게.]
그의 말이 맞았다.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은 사랑이었다. 서로를 원하는 만큼 겹겹이 쌓인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를 넘었다 싶으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무너트렸다 싶으면 다른 하나가 나타났다. 그 거친 길을 유신은 겁도 없이 내달려 왔다.
그에 반해 나는 어떤가. 외면하고 움츠리고 도망쳐 왔다. 선율은 이제 더 이상 유신 혼자 그 험한 길을 달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예상한 대로 말씀하신다면…… 나도 반드시 얘기해야겠어. 유신이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지,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선율은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상미가 말한 장소는 그녀의 집 근처에 위치한 동네 카페였다. 겨울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적한 주택가.
그 아래 ‘작은 침묵’이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가 있었다. 안에 있는 테이블이라고 해 봐야 세 개가 전부인 소박한 곳. 그나마도 모든 테이블이 비어 있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선율은 어느새 어스름해진 밖을 내다보며 머플러를 풀었다. 모처럼 방문한 손님에 곰 같은 덩치의 카페 주인이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다.
“주문할 거요?”
“일행 오면 같이 주문할게요.”
“그러쇼.”
아저씨 엄청 무뚝뚝하시네.
왜 손님이 없는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서 선율은 짧게 웃었다.
7시 정각에 상미가 도착했다. 겨울이라 금세 해가 떨어져 어둑한 풍경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선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한선율입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선율에게 상미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유신이 엄마 복상미예요. 우리 구면이네요.”
상미의 인상은 한주그룹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때와는 많이 달랐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의 그녀가 전사 같았다면, 지금은 고상하고 조금 깐깐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보다 무척 야윈 얼굴이라 선율이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지난번에 뵈었을 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인 줄 바로 알아보시네요.”
“손님이 한 명밖에 없잖아.”
“아……. 네.”
“농담이에요. 사실 한주그룹 앞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냥 친한 선후배 관계는 아니겠구나. 풍기는 분위기가 그래서.”
“그러셨군요.”
생각보다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다. 선율은 조금 안도하며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음료 주문할까 하는데, 뭐로 드시겠어요?”
“밤이라 커피 말고 다른 걸 마시는 게 좋겠어요.”
“허브티 괜찮으세요?”
“따뜻한 걸로 부탁해요.”
선율은 카운터로 가 허브티 한 잔과 홍차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상미는 묵묵히 선율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 흠잡을 데 없나 샅샅이 보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저 ‘아, 이 아이였구나.’ 하는 정도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어 선율의 가슴이 초조하게 뛰었다.
“허브티 누구 앞에 놔 드릴까?”
“이쪽으로요.”
불친절한 주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선율은 예의상 상미가 먼저 음료를 마시길 기다렸다가 제 앞으로 나온 홍차 라테로 입술을 축였다.
“유신이가 네 살 되던 때 애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제일 먼저 무슨 말을 꺼낼까 긴장하고 있던 선율은 예상을 한참 벗어난 상미의 첫마디에 왠지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네.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심정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그건 평생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아픔이었어요.”
상미의 시선이 먼 곳 어느 지점을 짚어 가듯 아득해졌다.
“유신이는 잘 자라 주었어요. 지금은 무뚝뚝하지만 어릴 땐 애교가 참 많았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 품에 폭 안겨 잠들어 있었는데, 엄마 오는 소리만 들리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쪼르르 달려오고 그랬다니까.”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유신이와 유신이 할머니, 두 사람이 있어서.”
“네.”
“남들은 나한테 남편도 없는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효부라고 하더군요. 정작 나를 지탱해 준 건 두 사람이었는데 말이에요.”
“유신이를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특별한 아들이란 건 부인 못 하겠네요. 맞아요. 유신이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예요. 유신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고 참 애쓰며 살았네요.”
다시 또 침묵이 이어졌다. 짧은 말 몇 마디에 상미의 인생이 오롯이 담기지는 않겠지만 선율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제일 후회하는 게 뭔지 알아요?”
선율은 잠자코 상미를 올려다보았다.
“유신이 감옥 들어가던 날 미역국을 못 끓여 줬어. 그다음 날이 유신이 생일이었는데 못난 어미가 끝내…… 그걸 못 해 줬네요.”
상미의 음성이 끝내 갈라졌다.
“난 정말 유신이가 저지른 짓인 줄 알았어요. 내 아들이 어떻게 사람 얼굴을 그렇게 만들어. 난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아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봐. 그래서 미역국도 안 끓여 주고 그냥 보냈어요.”
“아…….”
“싸늘한 감옥 안에서 생일을 맞았을 유신이를 떠올리면 아직도 피눈물이 나요.”
일그러진 상미의 눈가를 보는데 선율은 저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선율의 손을 상미가 덥석 붙잡았다.
“선율 씨.”
“어, 어머님!”
“내가 바라는 건 큰 거 없어요. 그냥 나는…… 우리 아들이 이제 그만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선율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과거에 아팠던 일들은 모두 잊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꿈만 꾸었으면 좋겠어요. 그 애, 선율 씨를 알게 된 후 8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대요. 수면제를 안 먹으면 잠을 못 잔대. 내 아들이…… 누구보다 건강했던 내 아들이 말이에요.”
상미의 눈이 간절했다.
“유신이 손에 화상 자국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불타는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다 제가 죄송해요.”
“선율 씨 잘못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는 자꾸만…… 우리 유신이 인생에 선율 씨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차라리 헤어져 달라고 대놓고 말했으면 뭐라고 한마디라도 받아칠 수 있었을까.
네깟 게 뭔데 내 아들 앞길을 망쳐 놓은 거냐고 악다구니라도 썼으면…… 그랬다면 마음이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내가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라 선율 씨에게 힘든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손을 붙잡고 흐느끼는 상미 앞에서 선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독한 현실은 그렇게 또 한 번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몇 번이나 되뇌었던 다부진 결심은 아들에 대한 애끓는 모정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선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뚝뚝 눈물만 흘렸다.
* * *
상미가 먼저 카페를 나선 후 선율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홍차 라테가 초라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선율은 아무 의미 없이 잔을 손에 쥐었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미가 떠난 자리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던 간절한 마음까지도.
선율은 초점 없는 눈으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선율 씨 잘못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는 자꾸만…… 우리 유신이 인생에 선율 씨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녀가 남긴 한마디가 귓가를 맴돌았다. 차라리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모르되, 선율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미의 입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라도 같은 말을 했을 거야.’
곁에 있으면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붙여 놓기만 하면 서로의 살을 깎아 먹는 상대가 있다. 유신에겐 선율이 딱 그랬다.
재수 없는 애,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애.
고상한 말로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도 하지.
상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딱 그랬을 것이다.
‘이별……이라.’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그 순간이 점차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커피숍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유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