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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54)화 (5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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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과 나란히 앉아 있는 복수를 발견한 한주의 미간이 움푹 패었다.

‘저놈이 대체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그는 복수와 사이가 무척 나빴다. 결함이 발견된 신차 출시 문제로 크게 다툰 후 제 손으로 그를 내쳤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연구 성과를 죄다 강탈한 것으로 모자라 감옥에서 4년을 썩게 했다. 복수 입장에선 한주가 철천지원수일 거고 한주 입장에선 마주하기 껄끄러운 과오나 다름없었다.

‘출소 후 베링거 모터스에 들어갔다더니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스승의 도움으로 한자리 꿰찼단 얘기는 들었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예전과 비할 데 없이 멀끔해진 모습이었다.

“오셨으면 앉으시죠.”

유신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건방진 태도에 한주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감히!’

그러나 어쨌든 부탁을 하러 온 쪽은 자신이었다. 한주는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달래며 좌식 의자에 앉았다.

“예의상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겠지. 난 김한주요.”

한주가 삐딱하게 말했다.

“베링거 모터스 이사 조유신입니다.”

유신 역시 딱딱하게 대꾸했다.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테이블 위에 한기가 불었다. 정갈스럽게 차려진 밥상은 손대는 이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양측 모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자리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험악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이 와 있을 줄은 몰랐군. 장복수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한주가 새파란 눈길로 물었다. 제 앞에 서면 평소보다 말을 두세 배는 더 더듬는 복수를 알기에 유신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유신에 의해 철저히 커트당했다.

“호칭부터 제대로 정리하시죠. 여기 있는 분은 베링거 모터스의 연구소장이자 상무 자리에 앉아 있는 분입니다. 한때 회장님 밑에 있던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건 듣기에 편치 않네요.”

끄응.

한주의 미간에 더 깊은 고랑이 파였다.

‘저게 진짜 해 보자는 거지?’

회장 자리에 오른 후 누구도 그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듣기 좋은 말만 했고 모두가 그를 추앙했다. 간혹 주제도 모르고 직언을 하는 놈이 있으면 자르면 그만이었기에 한주는 모두의 위에 군림하며 왕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다른 자리에서 만났으면 모르되 지금은 철저히 한주가 을인 입장이었다.

‘두고 보자. 새파랗게 어린놈의 자식!’

한주는 속으로 바드득 이를 갈며 겉으론 태연한 척 표정을 정리했다.

“그렇군요. 옛정을 생각하다 보니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한주그룹 김한주외다.”

한주가 악수를 청했다.

“베, 베링거 모터스 장복수 상무입니다.”

복수가 형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두 남자의 손이 꽉 쥐어졌다.

“오늘 제가 이 자리를 청한 건 모터쇼에서 있었던 소동 때문입니다. 철없는 제 아들놈이 과욕을 좀 부린 모양입니다. 베링거의 디자인을 도용하다니 낯이 뜨거워서 고개를 들 수가 있어야지요, 허허.”

한주는 분위기를 제 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일부러 넉살 좋게 웃었다. 디자인 도용 문제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은 스무스하게 넘어가 주십사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정식으로 차를 출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모터쇼에서 한번 공개한 것을 가지고 법정까지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유신은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법정까지 갈 수 없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눈빛이었다.

“우리 베링거에서는 디자인 도용에 관해서는 불관용의 원칙을 준수합니다. 특히 베링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작품일 경우엔 더더욱.”

예상보다 뻣뻣한 태도에 한주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물론 불쾌하실 거 이해합니다. 저희 쪽 실수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고 같은 업계에 몸담은 처지에 한 번쯤은 유연하게 넘어가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실수가 아니라 고의였죠. 설사 실수였다고 해도 우리 입장은 같습니다.”

유신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디자인 도용에 관용은 없습니다. 절대로.”

이것 봐라?

한주의 희끗희끗한 눈썹이 꿈틀했다.

어느 정도 어르고 달래면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젊은 사내는 말 몇 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흐음. 그렇습니까?”

그러나 한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젊은 놈이 혈기를 부려 봐야 제 눈엔 피도 덜 마른 햇병아리일 뿐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돈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뻣뻣한 놈이라도 돈을 쥐여 주면 금세 나긋나긋해지는 게 세상 이치였다.

한주는 찬물로 입을 헹군 후 꼿꼿하게 세운 등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으면 얘기해 보시죠.”

속삭이듯 은밀하게 건넨 제안에 유신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타협의 여지가 정말 없는 거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굳이 여기까지 나온 건 제게 바라는 게 있다는 뜻 아니오?”

“바라는 게 없진 않은데.”

그럼 그렇지!

턱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한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유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예상에서 180도 비껴갔다.

“사과하세요.”

“뭐?”

“무릎 꿇고.”

“!”

한주는 제 귀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말한 건가?

“과거에 장복수 상무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사과하십시오.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갈지 해프닝으로 정리할지는 회장님 두 무릎에 달려 있겠네요.”

“…….”

“아,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디자인 도용 문제를 걸고넘어지면 몇억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유신은 강렬한 눈빛으로 한주를 쏘아보았다. 지금껏 제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구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

‘임자 제대로 만났구나.’

한주는 조유신이란 놈을 너무 얕봤던 것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뭔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텐데 이미 늦은 것 같다.

“사과, 안 하실 겁니까?”

유신이 힐끗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

한주는 초조한 기색으로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 사과 하나에 수십억이 걸려 있다. 베링거의 대표 디자이너인 맥파이의 작품을 건드렸으니, 그쪽에서 작정하고 손해 배상 청구에 들어가면 자칫하다간 한주그룹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한주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며 무릎을 꿇었다. 맞은편에 앉은 복수는 이 순간조차도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미안하네.”

조용한 내실 안에 한주의 목소리가 번져 나갔다.

“자네의 연구 성과를 빼앗고 산업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운 거. 사과하겠네.”

“…….”

“자네를 미워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 난 반드시 그 차를 출시해야만 했네. 정부 지원금을 받았으니 성과를 반드시 보여 줘야 했어!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했을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멀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복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그래선 안 되는 겁니다.”

한주는 펄쩍 뛰었다.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하다니! 안전성은 충분히 검토했어!”

“일정 소, 속도가 넘어가면 에, 엔진이 터질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물론 그 점은 인정해. 연구원으로서 자네가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도 알아. 하지만 나는 일개 회사원이 아니라 그룹을 이끄는 오너일세. 그런 자잘한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했고, 난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썼어!”

한주가 복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보게, 복수! 이건 어디까지나 입장 차이의 문제일세. 자네도 내 입장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아, 아뇨. 나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 시한폭탄을 길거리에 풀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네가 발견한 모터의 결함은 이후 연구로 상당 부분 보완되었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그렇게 믿고 싶으시겠죠.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복수는 싱겁게 대답하며 유신의 소매를 가만히 끌었다.

“그, 그만 일어나자.”

한주가 천천히 일어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유신과 복수의 시선이 따가웠다. 무릎을 꿇은 것만으로도 김한주 인생 최대의 굴욕감을 맛보았는데 가뜩이나 키가 큰 두 사람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미칠 것 같았다.

“내 사과는 받아 주는 건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잡으며 한주가 물었다.

유신은 내리깐 눈으로 나직이 말했다.

“그러죠. 회장님 무릎 값이 그 정도 가치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 * *

“으아아아아악!”

유신과 복수가 나간 후 내실 안에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이 김한주에게 그런 굴욕을 안기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 같아? 아아아아악!”

한주는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꾹꾹 삼킨 분노가 용암처럼 터져 나온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 던졌다.

“회, 회장님, 고정하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면 뭐! 이 김한주가 그깟 조무래기들 눈치까지 봐야 해?”

교자상에 정갈하게 세팅된 그릇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괜히 말리다가 접시에 이마를 얻어맞은 수행 비서의 얼굴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회장님, 제발 진정하세요!”

수행 비서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잡을 때에야 한주의 시퍼런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난장판이 된 내실을 둘러보다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 김한주를 무릎 꿇린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면 관짝 들어가서도 눈을 못 감을 게 분명해!”

이 빚을 어떻게 갚아 주면 속이 좀 달래질까.

그가 형형한 눈을 빛냈다.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땐 머지않아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만다는 걸 수행 비서는 알고 있었다. 비서의 목젖으로 굵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역시 혼쭐을 좀 내 주는 편이 낫겠지?”

“혼쭐이라면 어떤 식으로…….”

“몰라서 물어? 약점을 공략해야 할 거 아니야, 약점을!”

한주가 푹 콧김을 내뿜었다.

약삭빠르게 돌아가는 그의 뇌리로 쿡 찌르면 피가 철철 흐를 만큼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떠올랐다.

‘건방진 새끼. 이것까진 대비 못 할 거다.’

고개를 조아린 수행 비서의 귓가로 명령이 떨어졌다.

파리하게 식은 비서의 안색이 점차 질려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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