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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53)화 (53/85)

53

유신이 맥파이로 대중 앞에 등장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광고 점검을 끝내고 모터쇼를 구경하던 선율은 우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와……. 조유신.’

사람에게서 빛이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 많은 사람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오로지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열광하는 인파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짓는데 가슴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뛰었다.

“팀장님, 곧 있으면 침 흘리겠어요. 입 좀 다무시죠?”

곁에 서 있던 주희가 낄낄댔다. 선율은 민망한 마음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좋아서 쳐다본 거 아니야. 거기에 있으니까 본 거지.”

“에이, 저기 몰린 사람이 못 해도 수백 명인데 팀장님 눈은 한곳에만 꽂혀 있던걸요? 속일 사람을 속이세요.”

주희의 뒤엔 호리호리한 남자 두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유신이 붙인 경호원이었다. 선율은 괜히 그들을 흘깃거리며 말문을 돌렸다.

“그나저나 주희 씨 이제 좀 더 조심해야겠어요. 디자인을 넘긴 게 함정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김기철이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래도 밤길 조심하려고요. 다행히 유신 오빠가 경호원도 붙여 줘서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아요!”

주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선율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모터쇼 곳곳을 구경했다. 자동차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모터쇼에 와 본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구경거리가 많았다. 평소에 잘 볼 수 없던 각국의 럭셔리 카부터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차세대 모빌리티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타 볼 수도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점심도 거른 채 한참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나 여기서 선배 보이는데.

전화를 받아 보니 유신이었다. 선율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기서는 안 보여요. 여기 2층 세미나실인데. 올래요?

선율은 곧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희와 헤어진 후 홀로 2층으로 향한 선율은 유신이 알려 준 세미나 룸을 찾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1층에 마련된 드넓은 행사장에 바글바글 들어찬 인파와 달리 2층은 한적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스태프들을 위한 공간이라 관계자 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왜 혼자 있어?”

세미나 룸에 도착하니 유신이 책상에 걸터앉은 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의자가 어림잡아 백 개는 넘게 놓인 커다란 룸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그를 보니 괜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다 나가라고 했죠. 이리 와요.”

툭툭.

유신이 제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가까이 가 보니 미리 주문해 두었는지 초밥 도시락이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고추냉이가 든 거, 하나는 따로 포장한 거.

선율은 자연스럽게 고추냉이가 든 초밥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안 그래도 출출한 참이었는데 잘 됐다.”

“선배가 좋아하는 걸로 시켰어요. 입맛 안 변했죠?”

“사람이 죽기 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변하는 게 입맛이라더라.”

포장을 열어 보니 선율이 좋아하는 참치와 연어가 골고루 들어 있었다.

예쁘게 색색으로 담긴 초밥을 보니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그와 연애할 때 초밥을 먹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대학 농구 동아리에서 주최한 자유투 시합에서 우승해 상금을 받았다며 유신이 그녀를 일식집에 데려갔는데 학교 앞임에도 불구하고 꽤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저렴한 회전 초밥집이야 몇 번 가 봤지만 일식 요리사가 하나씩 만들어 직접 접시에 놓아주는 초밥집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와, 초밥 하나에 돈이 얼마야.’

손이 떨려 선뜻 먹지도 못했던 기억이 났다. 공돈으로 사 준다는데 왜 먹지도 못하냐며 그녀 대신 주문을 해 주던 유신의 목소리도.

선율 인생에서 제일 맛있었던 초밥이었다.

“근데 신기하네. 너랑 나랑 초밥 먹으러 딱 한 번 갔었는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선배도 내가 고추냉이 따로 먹는 거 기억하고 있잖아요.”

“……아.”

자신 역시 그와의 추억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까 나 괜찮았나?”

유신이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아까?”

“부스 앞에서 김기철이랑 맞짱 떴을 때.”

“아, 그거. 속이 뻥 뚫리더라. 김기철 표정 아주 볼만했어. 그런데 내가 보고 있던 거 어떻게 알았어?”

“선배밖에 안 보이던데.”

“몽골인이야? 거리가 꽤 있었는데 그게 보이다니!”

선율은 괜히 오버하며 대꾸했지만 사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에 에워싸여 있어도 오직 조유신만 보였으니까.

“이제 어쩔 생각이야?”

“선배 밥 먹이고 잡아먹으려고.”

“그거 말고! 김기철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넌 어떻게 된 애가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냐?”

“그러게.”

유신이 태연하게 초밥을 씹으며 웃었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책임져야지 어쩌겠어요.”

저 능글맞은 자식.

대놓고 야하니까 음흉하단 말도 못하겠고 너무 뻔뻔하니까 구박할 의지도 안 생긴다. 선율은 곱게 눈을 흘기며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얘기를 꺼냈다.

“기분은 좀 괜찮아졌어? 어제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했어.”

평소였으면 아무 일 없다고 얘기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신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턱을 괴었다.

“그냥 그래요.”

“왜? 김기철 잡았으니까 아주 날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쉽지가 않네. 모든 게.”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선율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남았어?”

“산은 산인데. 밀어 버릴 수가 없는 산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유신의 표정은 한없이 애틋하고 서글펐다. 선율은 그가 말한 ‘산’의 존재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 때문이구나.’

유신의 어머니는 유신에게 남은 단 한 명뿐인 가족이었다. 닭살 돋게 다정한 모자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크다는 걸 선율은 알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와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것도 나 때문인 걸까.

“빙 돌아가는 건 어때?”

“마음이 조급해서.”

“그럼 별수 있어? 매일 조금씩 올라가는 수밖에 없겠네.”

선율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그에게 말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어떤 산이라도 결국엔 넘게 될 거야.”

“정말 그럴까?”

“네가 지치지만 않으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산이 다름 아닌 엄마이기 때문에,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멈추지 않고 산을 오르는 것뿐이었다.

‘매일 조금씩, 부지런히.’

선율이 한 말을 입 속으로 곱씹으며 유신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꾸준히 두드려 볼 생각이었다.

“한선율 원래 좀 비관적인 캐릭터 아닌가? 선배답지 않게 되게 희망적이네요, 오늘은.”

“응. 나 이제 좀 긍정적으로 살아 보기로 했어.”

“갑자기?”

“아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네 모습을 보는데 깨달음이 왔거든.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꿈을 이뤄 낸 위대한 맥파이! 사람들한테 막 박수받는 모습을 보는데 뭉클하더라. 네가 그때 멈췄더라면 지금의 맥파이는 없는 거잖아. 정말 멋있었어.”

선율이 초밥을 우물거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인간 극장은 뭐 하냐? 너 안 찍어 가고.”

“선배가 찍어 줘요.”

“뭘? 광고?”

‘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하며 눈을 반짝거리던 선율의 상상은 다음 순간 무참히 깨졌다.

“아니, 입술 도장.”

저 요망한 입을 죽여, 살려?

입술을 쭉 내민 유신을 보며 선율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음란 마귀가 진짜 정신 못 차리지!”

퍽, 퍽!

선율이 유신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유신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농담이에요. 그만 때려요. 진짜 아파!”

“농담 아니었잖아! 조유신 몸에서 썩 나가라, 이 음란 마귀!”

“내 주먹 반만 한 게 왜 이렇게 매워. 윽!”

유신은 등을 구부린 채 선율의 주먹질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등 위에서 콩콩거리는 손이 얼마나 귀여운지, 이대로 평생을 맞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리며 그는 내내 되뇌었다.

이 행복이 계속되면 좋겠다고.

선배와 나, 지금처럼만 웃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 * *

유신과의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빨리 마련되었다.

한주가 연락을 취한 바로 다음 날 유신에게서 만남에 응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한주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해 그에게 알려 주었다.

저녁 7시. 예인정.

프라이빗한 룸이 갖춰진 고급 한정식집으로 장소를 잡은 한주는 제일 비싼 양복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꿇리고 들어갈 순 없지, 암.’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제법 거칠게 굴러 여기까지 온 사람이었다. 대기업 협력사의 말단 직원에서 시작해 상사의 구두 밑창까지 핥으며 차근차근 승진해 나이 마흔에 본부장 직함을 달았다.

정부 차원에서 차세대 에너지 개발을 하게 되면서 협력사가 분리될 때 당당히 사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건 스무 해 넘게 상사들의 수발을 들며 간, 쓸개 다 빼 준 공로 덕이었다. 본사의 윗자리를 차지한 인간들은 제 비위를 기가 막히게 맞춰 주는 한주를 파격적으로 사장 자리에 앉혔다. 제 구두를 핥던 놈이 승냥이 새끼인 줄도 모르고.

‘조유신이란 놈은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까? 적당히 구슬리는 게 먹히는 타입이면 좋겠는데.’

그는 유신을 만나 취해야 할 행동을 다시금 정비했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 모르기에 시나리오도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돈푼이나 쥐여 준다고 넘어오는 타입은 아닐 것 같고. 적당히 합의를 보려면 이쪽에서도 손실을 각오해야 할 거야. 그나마 적당한 수준으로 합의가 되면 다행이지. 물불 안 가리는 뻣뻣한 놈이면 이쪽에서도 손을 거칠게 쓸 수밖에 없는데 툭 건드리기엔 생각보다 거물이란 말이지? 흐음.’

한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7시 5분 전.

예인정에 도착한 그가 차에서 내렸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종업원들이 그를 룸으로 안내했다. 아무나 예약할 수도 없는 고급 룸,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며 한주가 물었다.

“손님은 도착했나?”

“예. 먼저 와 계십니다.”

한주는 대꾸 없이 문 앞에 섰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저 안에 있는 애송이 하나 다루는 것쯤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일단 무슨 소릴 하는지 들어나 보지.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후에 결정하면 될 일이야.’

그러나 그의 예상은 초장부터 깨졌다.

룸 안에 앉아 있는 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중 한 명은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너는…… 장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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