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기철은 꼬리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다급히 베링거 모터스의 부스로 향했다. 그 앞엔 한주 자동차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비켜요, 비켜!”
기철은 인파 속을 헤치고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부스 안에 휘황찬란하게 떠 있는 3D 입체 영상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아까 그 꼬마의 말이 맞았다. 베링거 부스 안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차체의 모습은 그가 몇 주간 그토록 매달렸던 디자인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외관의 컬러만 다를 뿐이지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헤드라이트도, 곡선을 그리는 보닛도,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휠도 똑같았다.
“아빠, 내 말이 맞잖아요. 아까 그 차랑 똑같은 거 맞죠?”
“어, 그렇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때마침 아까 부스에서 만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철은 이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똑같기는 뭐가 똑같아! 꼬마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이런 데 오려면 넌 매너부터 다시 배워야겠구나.”
“흐아아아앙!”
매서운 엄포에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대기 시작했다. 기철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개중 한주그룹 부스에 다녀온 사람 몇몇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아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몰아붙입니까? 한주 자동차 관계자예요?”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지금 저쪽 부스에서 오는 길인데 누가 봐도 디자인이 똑같은데요. 눈썰미 좋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인데 그 정도 말도 못 합니까?”
어느새 사람들이 둥그렇게 기철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고 우는 아이와 성난 눈으로 쏘아보는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기철은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함정이었어. 황주희가 내게 건넨 디자인은 이미 베링거에서 선점한 디자인이었다고!’
그것이 단순한 습작이 아니라 정식 등록을 마친 디자인이라는 것에 기철은 제 손목을 걸 수 있었다.
‘속았다.’
뒤늦게 깨달은 충격이 아찔하게 뒷골을 울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십 번 의심하긴 했지만 결국엔 조유신을 증오하는 마음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를 추락시키려고 쏘아 보낸 총알이 부메랑이 되어 제 가슴에 박힌 꼴이었다.
‘어쩌지? 이제 어떡해야 해?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아시는 날엔 진짜 맞아 죽을지도 몰라!’
기철은 그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성난 관람객들은 그를 도망치게 놔두지 않았다.
“얼굴 보니까 아까 한주 자동차 부스에 있던 사람 같은데 맞죠?”
“아…… 아니야…….”
“누가 봐도 디자인이 똑같은데 왜 발뺌합니까? 꼬마가 지적하는데 발끈하는 거 보니까 떳떳한 쪽은 아닌가 보네요. 한주 자동차가 베링거 모터스의 디자인을 베낀 겁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패닉에 빠진 기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똑같지 않아! 자동차 디자인이 거기서 거기지, 바퀴 네 개 달린 것도 베꼈다고 할 건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마시죠.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고소한다는 말에 좌중의 소란이 잠시 가라앉았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 기철은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알았다.
한주 자동차의 대표로 이 자리에 나온 놈이 관람객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어린 꼬마를 상대로!
‘제기랄.’
그는 덜덜 털리는 턱을 꽉 부여잡고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여러분들이 우려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같은 날 비슷한 디자인을 봤으니 당연히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한주 자동차가 바보도 아니고 베낀 디자인을 모터쇼에 출품했겠습니까?”
하긴.
관람객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기철이 어깨를 쭉 펴고 당당히 말했다.
“설령 비슷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내가 베꼈다고 누가 그럽니까?”
그때였다. 홍해처럼 쫙 갈라진 인파 사이에서 유신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럼 설마 내가 베꼈을까.”
오만할 정도로 치켜든 턱, 자연스럽게 어깨에서 떨어지는 실키한 코트, 다소 흐트러진 듯 자유분방한 머리카락.
수백 개의 눈동자를 단숨에 휘어잡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였다.
그가 서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는데 기철은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아씨……. 저 새끼는 왜 또 지금 나타난 거야?’
난데없이 등장한 유신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중 누군가가 ‘흡!’ 하고 입을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맥파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맥파이라고? 베링거 모터스의 간판 디자이너 맥파이?”
모터쇼에 참석한 자동차 애호가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이름.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맥파이라는 이름만큼은 베링거 모터스란 브랜드 못지않게 유명했다. 모터쇼에 등장한 천재 디자이너에 주변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열기를 더해 갔다.
“네. 제가 맥파이입니다.”
그들 앞에 우뚝 선 유신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사했다.
“베링거의 다음 시즌 신모델 슈퍼 스터드 880S.”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3D 영상을 가리켰다.
“바로 저 자동차를 그려 낸 디자이너죠.”
“우와아, 맥파이다! 맥파이!”
자신감 넘치는 그의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설마하니 맥파이가 한주 자동차의 디자인을 도용했을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재적인 디자이너 맥파이의 파격적인 등장에 술렁이는 인파 속에서 기철의 존재감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아씨……. 어쩌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그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막 등을 돌려 달아나려는 순간 허공에서 유신과 눈이 마주쳤다.
“한주 자동차 김기철 본부장님.”
“!”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실까요.”
까딱까딱.
유신이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씨익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그토록 사악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 * *
콰앙!
“뭐가 어쩌고 저째?”
한주그룹이 발칵 뒤집혔다.
모터쇼 첫날 일어난 디자인 도용 소란에 김한주는 꼭지가 돌아 버렸다.
“김기철 이 자식 지금 어디 있어! 빨리 내 눈앞에 안 끌고 와?”
“그, 그게 도련님과 연락이 닿질 않아서…….”
“도련님 같은 소리 하네! 그 또라이 새끼,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 꿇리지 않으면 니들 다 모가지야!”
쨍그랑, 쾅!
한주가 책상을 거칠게 쓸어 버렸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태블릿과 만년필, 유리컵 등이 와장창 박살 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의 앞에 공손히 시립한 비서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김한주 회장이 화를 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정말이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모가지가 날아갈 정도로 중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철이가 사람들 앞에서 디자인 도용을 시인했다고?”
“도련님 입으로 시인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 그것이…….”
비서는 최대한 한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맥파이가 등장했다고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맥파이가 종이 세 장을 사람들 앞에 꺼냈는데 한 장이 디자인 등록증이었고, 다른 한 장이 베링거 모터스의 사업 계획서, 그러니까 즉 그 디자인으로 이미 차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증명서인데…….”
“뻔한 얘기는 집어치워! 누가 그걸 몰라? 마지막 세 번째 종이는 뭔데?”
“그게, 백지였다고 합니다.”
“백지?”
한주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감돌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에 그는 팔뚝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설마 그 자리에서 같은 디자인을 그려 내라고 하던가?”
“그걸 어떻게……! 네, 맞습니다.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자신이 그린 디자인 정도는 눈 감고도 그려 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하아, 빌어먹을.”
한주의 잇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정말로 기철이 디자인을 도용한 거라면, 베껴 그리는 데만 급급했던 그가 시안도 없이 똑같은 디자인을 그려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맥파이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없이 잔인하게.
인파 속에서 난도질당했을 아들을 떠올리니 한주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하나뿐인 자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런 걸 아들이라고 키워 낸 자신이 한심해서.
‘자질 없는 놈은 애초에 회사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한주가 혀를 끌끌 차며 뇌까렸다.
“망할, 맥파이란 놈은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이 사달을 만든 거야?”
비서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그 부분이 이상해서 저도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조사를 해 봤는데요. 맥파이의 한국 이름이 조유신이라고 합니다.”
“조유신이 누구……!”
버럭 소리를 지르던 한주가 숨을 마저 뱉어 내지도 못한 채 입을 딱 벌렸다. 기억력이 부실한 그였지만 며칠 전 계순이 해 준 얘기 속에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분명히 있었다.
“기철이 대학 동창이라는 그놈?”
“네, 맞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따악!
한주가 분을 참지 못하고 비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비서를 마치 꿈틀거리는 지렁이쯤으로 치부하며 한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맥파이가 조유신이라면 그 디자인 역시 처음부터 함정이었던 거야. 그 자식이 작정하고 우릴 엮으려고 한 게 분명해!’
계순은 그가 기철에게 깊은 원한이 있다고 얘기했었다. 그 원한을 갚으려고 처음부터 일을 꾸민 거라면 당장 불을 끄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놈이 별 볼 일 없는 놈이면 모르되 명색이 베링거 모터스의 이사야! 문제를 회사 차원으로 끌고 들어온 이상 베링거 모터스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디자인 도용 문제가 법정 싸움으로 번지면 얼마나 개싸움이 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였다. 아마도 베링거에서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소송을 걸어올 테고, 한주그룹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법무팀 호출해.”
“예, 회장님.”
비서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니다. 남부 지검 박 검사한테 연락 넣어. 내가 당장 만나자고 한다고 해.”
“예, 회장님.”
한주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며 회장실을 서성였다. 그가 막 대답을 올리고 나가려는 비서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아니다, 아니야.”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가 방 안을 뱅뱅 돌았다.
대체 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한단 말인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한참을 고심하던 그가 이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조유신한테 연락해. 내가 만나자고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