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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가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네 엄마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야. 나 그 여자애 절대 보고 싶지 않아. 행여나 내 앞에 데려오는 날엔 다신 너 안 본다.”
“엄마.”
“그래, 나 네 엄마야! 배 아파 낳고 죽어라 키워 낸 네 엄마라고! 네가 사람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단 얘길 듣고도 널 믿었고, 할머니와 날 버리고 미국으로 가 버린 널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렸어. 키워 준 보답 같은 거 바라지도 않아. 그냥…… 그냥 이번 한 번만 내 말 들어주면 안 되니?”
유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상미가 이 정도로 극구 반대한 건 처음이었다. 유신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기 시작했다.
“선율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알아.”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선배도, 나도 피해자일 뿐이라고.”
“알아……. 안다고……! 하지만 용서가 안 돼.”
“엄마!”
“그 애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잖아!”
상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유신은 극도로 흥분한 상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옥에 갈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엄마였다. 정나미 없다 느껴질 정도로 합리적인 사람이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모습은 두렵다 못해 처참했다.
“못 헤어져요, 엄마.”
그러나 유신은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그녀로 인해 내가 숨을 쉬고 있다고, 그녀가 없는 세상이 지옥이었기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거라고.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이렇게 고집 피운 적 없는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절박해서 그래요. 내가, 너무 간절히 원해서.”
“유신아 너 엄마한테 이러면 안 돼…….”
상미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흐느낀 그녀가 이윽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끝내 유신이 들은 답은 그토록 원치 않던 한마디였다.
“정리되면 연락하거라.”
“엄마!”
“그전엔 엄마 얼굴 볼 생각 하지 마. 네 연락 안 받는다.”
쾅!
상미가 호텔 문을 닫고 나갔다.
어둑한 방 안에 홀로 남은 유신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한숨이 깊어졌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 * *
모터쇼 하루 전.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니 밤 10시였다.
퇴근하고 나가 보니 늘 그렇듯 유신의 차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어둑한 도로를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차를 향해 선율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평소 같으면 선율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왔을 유신은 시트 헤드에 고개를 젖힌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짙은 선팅 안쪽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오늘따라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똑똑똑.
“조유신 이사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기에 사람 온 줄도 몰라요?”
“아, 선배. 왔어요?”
선율이 차창을 노크하자 유신이 문을 열고 내렸다. 싱긋 웃고는 있지만 어딘지 어두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뭐 복잡한 일 있어?”
유신이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 차에 오르며 선율이 물었다. 유신은 미리 대답을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여상하게 대꾸했다.
“내일이 모터쇼 개막이잖아요. 아무래도 좀 긴장이 돼서.”
“너도 긴장이란 걸 하는구나.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선율은 간밤에 그를 한숨도 자지 못하게 만든 일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긴장 안 돼요?”
“왜 안 되겠어. 내가 직접 제작한 광고가 모터쇼 개막식에 걸린다는데. 한선율 커리어에 이만한 이벤트는 없었다, 진짜.”
두 사람은 내일 있을 모터쇼에 대해 연신 대화를 나누었다. 개막전 광고가 어디에 걸리는지부터 베링거 모터스의 부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취재진 인터뷰가 몇 시에 잡혀 있는지 등등. 덕분에 유신도 복잡한 일을 잊고 잠시 편안해질 수 있었다.
“이번 모터쇼가 총 열흘간 진행된다고 했지?”
“맞아요.”
“모빌리티 시승 행사는 언제 해? 이번엔 슈퍼 카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라 신청도 박 터졌을 것 같은데.”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주최 측에서도 고심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평소에 접하지 못한 브랜드의 차들이 나오다 보니까 시승 신청이 과열될 것 같아서. 작년에 프랑스에서 진행한 행사에선 시승식 하던 중 차가 도난당한 일도 있었거든요.”
“헉, 그래?”
“네. 그래서 이번엔 시승 행사 대신 레이싱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어요. 자율 주행 레이싱으로.”
선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자율 주행 레이싱이라니, 뉴스에서나 몇 번 봤지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율 주행 레이싱이면 카레이서 없이 자동차 혼자 트랙을 달린단 소리야?”
“맞아요. 이번 모터쇼의 하이라이트죠. 자율 주행 레이싱은 친환경, 지능화된 모빌리티를 선보이고자 하는 이번 모터쇼의 주제에 가장 걸맞은 행사가 될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유신의 어조에 선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향후 미래를 이끌어 갈 신기술의 집약체를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선율이 감탄했다.
“뭘 상상해도 그 이상일 겁니다.”
정작 유신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좀 다른 의미로 그 역시 기대가 크긴 했다. 모두를 들뜨게 할 축제의 피날레에서 그는 오랜 악연의 끝을 맺을 작정이었다.
‘그날의 축포는 한주 자동차가 터트리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화려하게 트랙을 수놓을 불꽃을 떠올리며 유신이 입술을 비틀었다. 찰나에 스쳐 간 비릿한 웃음을 선율은 눈치채지 못했다.
“긴장도 풀 겸 간단히 한잔하고 갈래?”
집에 도착한 후 선율이 안전벨트를 풀며 물었다.
“아뇨, 오늘은 좀.”
당연히 오케이할 거라고 생각했던 선율이 멈칫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유신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 그래?”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대답이 너무 칼 같았던 것을 인지한 유신이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내일 종일 바쁠 테니까.”
선율은 조금 서운했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금세 수긍했다.
“하긴, 내일 중요한 날이니 컨디션 조절하는 게 좋겠지. 그럼 잘 들어가.”
“푹 자요. 선배.”
차가 미련 없이 떠났다. 이제껏 한 번도 빼먹은 적 없던 굿 나이트 키스도 생략하고 떠나 버린 유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율이 중얼거렸다.
“조유신 오늘 좀 이상하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 * *
모터쇼 개막식 당일.
모터쇼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개막 첫날, 수만 명의 인파가 밀려들었다. 발 디딜 틈 없는 인파 사이로 휘황찬란한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모터쇼는 세미나가 진행되는 곳, 비즈니스 상담이 진행되는 미팅 룸, 차량이 전시되는 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율이 제작한 광고는 모터쇼 입구, 그것도 정문에 걸렸다. 행사에 입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베링거 모터스에서 처음으로 내건 광고이니만큼 주최 측에서도 상당한 예우를 한 셈이었다.
입장을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전광판에 걸린 광고를 주의 깊게 쳐다보는 광경에 선율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휘몰아쳤다. 광고 회사에 입사한 지 벌써 7년이 되었지만 주로 TV 광고만 제작해 온 터라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적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제가 만든 광고에 집중을 한다는 건 상상보다 더 짜릿한 일이었다.
‘그래 이거지!’
선율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시관에는 이번 모터쇼에 참가한 수많은 업체의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각 부스 전면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차량이 전시되어 있고, 부스 뒤의 커다란 벽면에선 차량을 소개하는 짧은 광고가 반복해서 상영되었다.
부스 안쪽엔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과 신기술이 집약된 소재 등이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초등학생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이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각 회사에서 파견한 진행 요원들은 부스를 방문한 관람객들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며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고취하는 데 힘썼다.
선율이 광고를 둘러보며 점검을 하는 동안 기철 역시 현장에 있었다. 그는 한주 자동차 그룹의 부스 안에서 관람객을 맞는 역할을 했다. 수많은 외제차 브랜드 사이에 낀 부스라 관람객의 관심은 확연히 적었다. 기철은 초조해졌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관람객들 발길 붙잡아 놓으려면 3D 모델부터 띄워야 할 거 아니야! 빨리 설치해요, 빨리!”
기철의 재촉에 행사팀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번 모터쇼가 다른 모터쇼와 차별화된 것은 각 회사에서 준비 중인 차세대 모빌리티 디자인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스 벽면과 진행 요원 사이의 널따란 공간에 3D로 구현한 차세대 모빌리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재현한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실제 차체와 똑같은 크기의 3D 모델이 360도로 천천히 돌아가는 광경은 이번 행사의 백미였다.
“설치 끝났습니다!”
행사 요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뒤편으로 커다란 차체의 영상이 떠올랐다. 단순히 스크린에 떠오른 영상이 아니었다. 부스 안을 꽉 채우는 차체의 모습은 실제 자동차를 옮겨 놓은 것처럼 압도적이었다.
“됐다!”
기철이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입체 영상은 그간 한주 자동차가 선보였던 수많은 자동차 라인과는 확연히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희가 유신의 태블릿에서 훔쳐 왔다던 바로 그 디자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모터쇼에서 다음 시즌 디자인으로 공표해야겠어.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에 우리 거라고 당당히 선포해야지.]
김한주 회장의 엄명은 산을 깎아 강으로 만들고, 강을 메워 들판으로 탈바꿈시킬 만큼 강력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기철을 비롯한 디자인팀과 3D 구현 기술팀은 밤낮없이 프로젝트에 매달렸고, 그 결과 모터쇼 개막식 날 차세대 모빌리티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공을 들였으면 제아무리 훔친 디자인이라도 인정해 줘야지.’
기철은 뻔뻔한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3D 영상을 바라보았다.
“우와!”
입체 영상이 구현되자마자 관람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한주 자동차에서 만들고 있는 거예요? 언제 출시되는 거예요?”
“그동안 경차만 만든 걸로 아는데 그럼 이게 한주 자동차에서 처음으로 출시되는 중형 세단인 거예요?”
“완전 사고 싶다. 출고가는 얼마쯤 될까요?”
순식간에 질문이 쏟아졌다. 기철을 포함한 진행 요원들은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을 해 주며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어 놓았다.
그때였다.
똘똘하게 생긴 어린이 하나가 부스 안으로 들어선 건.
“아빠, 저거 아까 봤던 자동차 아니에요?”
“응?”
“저쪽에서요. 그건 파란색, 이건 빨간색. 색깔 빼곤 다 똑같은 거 같은데…….”
번잡한 와중에도 아이의 높은 하이 톤 목소리는 날카롭게 기철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까 봤던 자동차? 그게 무슨……!’
불길한 예감이 번뜩 든 기철이 아이의 손가락을 좇았다.
그 끝에 위치한 건 바로 베링거 모터스가 위치한 부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