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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50)화 (50/85)

50

―김기철이 결국 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한주그룹에서 손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법정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기철이라고?

상미의 걸음이 멎었다. 얼른 그녀의 눈치를 본 복수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 그 부분은 나중에 만나서 하지.”

―네. 디테일한 건 만나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수고했어.”

―아, 그리고 한선율 씨 몰카 말인데요.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상대의 입에서 낯선 비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상미의 귀에도 또렷이 들려왔다.

―한선율 씨 몰카는 세상에서 사라진 게 확실시된 듯 보입니다. 그 동영상이 아직 남아 있다면 김기철이 궁지에 몰린 지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이유가 없거든요. 검찰에서 기소 처분이 내려진 걸 그쪽에서도 확인했을 텐데 여태 아무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안전히 처리된 것 같습니다.

당황한 복수가 닭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황급히 통화를 종료시켰다. 유신이 무엇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된 건지 정확히 아는 건 사건의 당사자를 제외하곤 딱 두 명뿐이었다. 장복수와 황주희.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곤 유신은 누구에게도 선율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특히나 그의 어머니에게는 선율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불편한, 아니 불필요한 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동영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어…… 네?”

“방금 동영상이라고 그랬잖아. 한선율 몰카?”

예상치 못한 전개에 복수의 안색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우리 유신이와 관련된 얘기인 거 같은데.”

상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복수를 마주 보았다.

“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 잔잔했던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 *

같은 시각.

유신은 선율의 집에서 아직도 뭉그적대고 있었다.

호텔 룸에 비하면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좁아터진 집구석이 왜 이렇게 아늑한지.

이불에서 나는 그녀의 향기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그녀의 물건들이 자꾸만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데 몸은 불끈불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달뜬 체온은 연신 그를 부추겼다.

한 번 더 그녀를 안으라고.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다고.

‘발정기네, 아주.’

시도 때도 없이 음란해지는 머릿속이 제가 생각해도 음침했다. 유신은 흐트러진 이불로 간신히 하체만 가린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몸이 끓어오를 땐 딴생각을 하는 게 상책이다.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군.”

발신인은 오경민과 복수, 그리고 상미였다. 세 사람의 연속된 전화가 무얼 의미하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그가 복수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할 때, 막 샤워를 마친 선율이 욕실에서 나왔다.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걸어오는 그녀를 보니 기껏 잠재운 혈기가 다시 들썩였다. 유신은 불빛 아래 당당히 드러난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같이 하자니까. 잘 씻겨 줄 자신 있는데.”

선율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 요망한 입으로 또 뭘 할 줄 알고. 내가 사람을 믿지 짐승을 믿냐.”

“내 입이 뭐가 어때서.”

어떻긴 어때. 아주 야하지.

입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온몸을 어찌나 들볶는지 아예 오징어가 되는 줄 알았다. 욕실 안에서 또다시 온몸을 물리고 빨릴 생각을 하니 아찔해서 굳이 샤워까지 시켜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 참이었다.

“얼른 가. 벌써 새벽 한 시야.”

“가기 싫다.”

유신은 선율의 어깨에 고개를 비비며 측은한 눈빛을 했다. 물론 선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집주인 아저씨 새벽 네 시만 되면 기상해서 앞마당 쓴단 말이야.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집에 남자 들인다고 광고할 일 있어?”

선율의 타박에 유신은 더욱 끈적하게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결혼하면 같이 있을 수 있나.”

“뭐?”

“할래요, 결혼?”

이거 청혼인가.

느닷없는 제안에 선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야, 결혼은 무슨! 너랑 나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소릴 해.”

“연애만 8년인데 결혼 얘기할 만하지 뭘 그래요.”

“양심 없다. 8년이라 하기엔 너무 떨어져 있지 않았냐. 하물며 랜선 연애도 하루 한 번씩은 꼬박꼬박 연락하는 게 정석이라고.”

“난 한 번도 선배와 헤어진 적 없어요. 하루도 선배 생각 안 한 날 없었고 밤마다 생각했어.”

아니, 그 타이밍에 내 몸은 왜 훑는 건데?

밤이나 낮이나 참 한결같은 그의 태도에 선율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허, 동공 단속 안 할래?”

“내 동공이 어떤데.”

“야하잖아!”

“타고나길 야한 인간이에요. 갈아 끼울 수도 없는 걸로 타박하지 맙시다.”

은근슬쩍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겨우 마른 입술이 다시 한번 그에게 먹혀 들어가려는 찰나 선율이 탁 그의 입술을 쳤다.

“적당히 해라.”

어지간하면 받아 줬을 텐데 오늘은 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계속된 야근에 녹초가 되었는데 연거푸 두 번이나 안기고 나니 진이 쏙 빠졌다.

젊음이 좋긴 좋구나. 고작 네 살 어리다고 저렇게 팔팔할 일인가.

속으로 푸념하며 선율은 엄포를 놓았다.

“지금 안 나가면 엉덩이 발로 차서 쫓아낼 거야.”

“그냥 물어 줘요.”

“뭘…… 물어?”

“가볍게 만져 줘도 좋고.”

“이 자식이 진짜!”

선율의 주먹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유신은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그녀를 품 안에 쏙 안았다.

“장난이에요.”

보디 워시 향기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유신이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았다가 놓았다.

“그만 갈게요.”

헤어짐은 아쉽지만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힐 수는 없었다.

“잘 자요, 선배.”

유신이 선율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하며 집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괜히 휑하게 느껴지는 침대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선율은 중얼거렸다.

“그냥 자고 가라고 할 걸 그랬나……?”

* * *

차창으로 불어오는 새벽의 바람이 신선했다.

차가운 바람이었지만 가슴이 따뜻해서 그런지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의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유신이 중얼거렸다.

“결혼이라…….”

아까 선율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반쯤 장난이었지만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원했던 일이었다.

“하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도 됐지.”

선율 입장에선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성급하다 느낄 수 있겠지만 8년 동안 한 번도 선율을 마음속에서 놓은 적이 없던 그에겐 그다지 뜬금없는 일도 아니었다.

헤어질 때마다 이렇게 아쉬운 걸 어쩌나. 같이 사는 수밖에 없지.

급한 김에 동거부터 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외박도 안 하는 여자가 동거를 잘도 하겠다 싶었다.

“정말 결혼해야겠는데.”

그녀와 같은 잠옷을 입고 잠들고, 포근한 이불 안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주말이면 꼭 붙어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가끔 다투는 일이 생기면 애교도 떨어 보고. 늦은 새벽, 집에 돌아갈 걱정 없이 함께 영화를 보고. 샤워를 할 땐 서로의 몸을 씻겨 주는 상상.

그녀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의 즐거운 상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응접실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은 상미를 맞닥뜨린 순간 유신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엄마?”

유신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가 왜 제집에 계세요.”

“얘기 좀 할까 해서 기다렸더니 벌써 새벽이네.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오는 거니?”

중학생 때 몰래 PC방 갔다가 걸린 이후로 이렇게 가슴이 뜨끔한 적은 처음이었다. 일이 늦게 끝났다고 하는 편이 좋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그 여자애 만났니?”

상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날카롭게 유신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 여자애?’

뾰족한 그 단어가 가슴에 박힌 순간 유신은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상미가 선율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아 버렸다는 걸.

유신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상미를 응시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묻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상미는 세상에서 유신을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유신이 사고를 쳤다고 했을 때도 곧이곧대로 믿고 황준기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고, 미국으로 대뜸 떠난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없이 보내 주었다. 고깃집 사건의 진범이 기철임을 알았을 때 왜 그랬냐고 묻기는 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는 유신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는 아니겠지. 단지 그녀는 아들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믿었을 뿐이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여자 때문이라니.

여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유신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교도소에 복역했다는 평생 지우지 못할 낙인이 남겨졌고 창창하던 꿈이 좌절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으로 인해 상미는 교감 승진을 앞두고 학교를 나와야 했다. 그야말로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정말 여자애 하나 때문에 네 앞길 말아먹기로 작정한 거야?”

상미가 다그치듯 물었다.

“얘기해. 더는 거짓말하지 말고!”

상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추궁하자 죽상을 하고 털어놓은 복수의 얘기에 평생 자신했던 이성적인 모습은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애 하나로 인해 자신의 가정에 이런 불행이 닥쳤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너 지금 그 여자애 만나고 온 거야?”

“그 여자애가 아니고 한선율이에요. 예쁜 이름 놔두고 왜 그런 식으로 부르세요.”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유신의 가슴도 덩달아 콱 조여들었다. 그는 빈 컵에 찬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곤 상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제겐 제일 중요한 문젭니다. 지금 엄마가 내 애인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래, 아주 못마땅해.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라 앞에 있었으면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어! 여자애 하나 때문에 금쪽같은 내 아들이 진창길을 굴렀다는데 화가 안 나는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어!”

“맞아요. 진창길을 굴렀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나 잘살고 있어요.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 주변에서 본 적 있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상미가 유신의 손을 잡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애원했다.

“유신아. 그 여자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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