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49)화 (49/85)

49

상미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여장부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신이 어릴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아이를 부양하며 살다 보니 어느새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대한민국의 씩씩한 아줌마가 되었다.

남편과 함께 나누어야 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사는 동안 설움이 왜 없었을까.

그 흔한 학부모 상담도, 아이의 졸업식에도 늘 혼자였다. 가끔 퇴근이 늦을 때면 놀이터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는 아들을 보며 눈물을 훔친 적이 몇 번인지.

그럴 때마다 외려 더 씩씩하게 엄마의 손을 잡아 주던 아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이었다. 하나뿐인 아들 유신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아등바등한 보람이 있게 잘 자라 주었다.

동네에서 제일 잘생긴 애, 동네에서 제일 똑똑한 애, 동네에서 제일 인기 많은 애. 온갖 수식어를 별처럼 달고 다녀 엄마의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던 든든한 아들.

그런 아들이 스무 살에 감방에 가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상미는 무척 상심했지만 그래도 아들을 믿었다.

‘사연이 있었겠지. 아무렴 내 아들인데.’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이 ‘베링거 모터스 이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는 정말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연거푸 물었을 때 유신은 처음으로 복수에 대한 얘기를 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도 없을 거라고.

‘이 사람이 장복수구나.’

그는 상상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숱 많은 더벅머리에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두꺼운 뿔테 안경은 얼핏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냉철한 과학자를 연상했으나 사실상 수더분한 아저씨 쪽에 가까웠다. 방금 농촌에서 상경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순박한 모습에 상미는 저절로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유신이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너무 감사한 분이라고요.”

상미가 사 온 재료를 아일랜드 바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언제 한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이리 만난 김에 제가 닭볶음탕이라도 끓여 드릴게요. 마침 재료를 다 사 온 참이라.”

“아, 아뇨. 별말씀을요. 제,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유신이에게 좋은 분이면 제게도 은인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미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마음 같아서는 절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만약 그랬다간 저 순진한 사람이 기절할 게 뻔해 자제한 것이었다.

“어, 어이쿠, 이게 무슨……!”

복수는 마주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여자 손 한번 못 잡아 본 숫총각처럼 귓불을 붉힌 그를 보며 상미는 괜히 안쓰러움이 치밀었다.

“그, 그럼 같이 하시죠. 마침 저도 유신이 주려고 볶음밥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래요, 그럼.”

두 사람은 엉겁결에 나란히 서서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복수는 연신 이마에 땀을 훔쳤다.

“유, 유신이 어머니. 당근 다 볶았습니다. 이, 이제 감자 썰까요?”

“네. 양파 다듬느라 손이 없으니 좀 부탁할게요.”

“별말씀을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숨 막히던 긴장감이 조금 가셨다. 상미는 야무지게 앞치마를 두르고 채소를 썰고 있는 복수를 힐끗 보며 웃었다.

“다 큰 자식 해 먹인다고 늙은이 둘이 뭐 하는 짓인가 모르겠네요.”

“느, 늙은이라뇨. 아직 젊고 아름다우신데요.”

“아름답기는요. 좋은 시절 다 갔죠.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내 나이가 쉰둘이네요.”

“누님이시네.”

작게 중얼거린 말에 상미의 귀가 쫑긋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유신이 어머니.”

혼낸 것도 아닌데 자꾸 당황하는 게 웃겼다. 초면이지만 괜히 놀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미가 투덜댔다.

“자꾸 유신이 어머니, 유신이 어머니 그러니까 더 늙은 것 같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내 이름은 복상미예요.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자꾸 유신이 어머니래?”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누구의 와이프,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제 이름이 없어지는 거라며 푸념하던 친정어머니를 보고 자라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도 제 이름 석 자로 불리는 게 좋았다. 조유신 엄마가 아니라 복상미. 그녀 자신으로서.

복수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초면에 괜한 부담을 줬나 싶어 쳐다보니 그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함이 복상미……? 서, 설마 복 누님?”

놀란 건 상미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나 중학교 때 별명인데. 장복수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호, 혹시 연천중학교 나오셨어요?”

“그걸 어떻게…….”

“복 누님! 저 복수예요, 장복수! 여, 연천중학교 1학년 3반이요! 저랑 같이 성가대 하셨잖아요!”

상미는 놀란 가슴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연천중학교 얘길 하는 거 보니 같은 동네에서 자란 모양인데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중학교 졸업한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돌아서면 어제 일도 까먹는 나이에 36년 전 일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무척 반가워하는 복수를 보며 상미는 매우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이름이 낯서네요. 나이가 이래서 그런지 기억력이 영 부실하네.”

“그, 그러실 수도 있죠.”

잔뜩 흥분했던 복수는 금세 풀이 죽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입술까지 삐죽이고 있었다.

“워,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요. 기억 모,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괜찮아요.”

복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채소를 썰었다. 상미는 몹시 미안한 마음에 좌불안석이 됐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동창을 만나도 반가운 일인데 아들의 은인과 과거에 아는 사이였다니! 한데 기억이 깜깜하니 뭐라고 아는 체할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기…….”

뭐라도 단서를 얻으면 기억이 날까 싶어 운을 떼던 상미의 머릿속이 문득 번쩍했다. 시무룩하게 칼질을 하고 있는 복수의 옆얼굴에 묘하게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설마…… 단수복수?”

복수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네, 맞아요! 단수복수! 이, 이제야 기억나셨나 보네요!”

상미의 눈이 지진 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야가 어느새 먼 과거를 더듬어 가고 있었다.

단수복수라는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던 그 아이를.

* * *

바야흐로 36년 전.

상미가 중학교 3학년, 복수가 중학교 1학년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들이 다니던 연천중학교는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던 곳이라 주말마다 성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성가대지, 그냥 할 일 없는 친구들끼리 모여 간식이나 받아먹고 소소하게 뛰어놀던 그런 모임이었다.

당시에도 씩씩했던 상미는 모든 아이의 구심점이었다. 친구들은 밝고 명랑한 그녀를 좋아했고 반장을 도맡아 하던 그녀는 자연스레 성가대의 리더가 되었다. 그녀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신입생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복수였다.

“야, 단수복수! 이리 와서 쫀득이 먹자!”

한창 수학에서 단수, 복수에 대해 배우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갖다 붙인 유치한 별명에 모두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단수복수래, 큭큭.”

“장복수 안 그래도 공붓벌레라 맨날 수학책 파고 있잖아. 지랑 딱 어울리는 별명이네, 하하!”

상미는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신입생을 놀리는 게 달갑지 않았다. 선후배 사이에서 쭈그리가 된 복수의 앞을 가로막은 채 그녀가 허리에 손을 착 올렸다.

“니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별명을 멋대로 짓고 그래? 내가 너희 별명 막 지어 부르면 기분이 어떻겠어? 거기 넌 키가 땅딸막하니까 김땅콩, 그 옆에 넌 머리가 뻗쳤으니까 대걸레! 이렇게 부르면 기분 좋아?”

“선배님……!”

“놀리니까 기분 나빠? 그럼 너희들도 얘 놀리지 마!”

기억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때부터 상미는 이름을 제. 대. 로. 부르는 것에 유달리 집착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상미가 이번엔 복수를 쳐다보았다.

“너 이름이 뭐라고?”

“자, 장복수…….”

“뭐?”

“복수요. 장복수.”

소심한 복수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상미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때의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였다. 누님, 누님 하면서 소심하게 간식을 건네주던 일도 희미하게 떠오르긴 했지만 선명히 남은 건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만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상미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졸업을 했고 그 후론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니.

‘그런데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일주일에 한 번, 성가대에서 만날 때마다 소심하게 힐끔거리던 그 아이가 어느새 쉰 살이 되어 제 앞에 서 있다는 건 그저 반갑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너 맞구나! 말 더듬는 버릇도 예전이랑 똑같네.”

상미는 반가운 마음에 덥석 복수의 손을 붙잡았다. 복수는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 누님이 유신이 어머니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인연이란 말로는 부족하지! 이건 완전 천운이야, 천운!”

뜻하지 않은 인연에 두 사람은 회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때의 일을 거의 잊어버린 상미에 비해 복수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과거 이야기에 상미는 간만에 감상에 젖어 들었고,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인연을 설계한 신의 뜻이 놀랍기만 했다.

“내 정신 좀 봐. 이러다 음식은 하나도 못 하고 돌아가겠다. 내가 요리할 테니까 앉아 있을래? 바쁘면 먼저 가도 되고.”

“오, 온 김에 저도 같이 할게요.”

“그럴래?”

“닭부터 써, 썰면 되죠?”

복수가 야심 차게 생닭을 꺼내 들었다. 비닐장갑도 끼지 않고 덥석 닭 모가지를 잡는 그의 패기에 상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닭볶음탕 할 거니까 먹기 좋게 자르면 돼.”

“맡겨 주세요. 이, 이래 봬도 혼자 산 지 30년도 넘어서 요리 잘합니다.”

“30년? 결혼 안 했어?”

“네, 어, 어쩌다 보니…….”

상미가 의외란 표정으로 복수를 바라보았다. 온순하고 배려심 있는 성격이라 지금쯤 가정을 꾸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쉰이 되어서까지 미혼이라니.

때마침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복수의 휴대폰이었다. 닭을 자르느라 손이 엉망인 복수를 보고 상미가 물었다.

“전화 받아 줄까?”

“예, 예. 스피커폰으로 해 주시면…….”

“오케이.”

상미가 앞치마에 손을 닦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무님, 오경민입니다. 조유신 이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이쪽으로 보고드립니다.

“어, 그, 그래.”

언뜻 복수가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자리를 피해 주기 위해 상미가 앞치마를 풀고 돌아섰을 때 남자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