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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복수는 유신의 집에서 우렁이 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이 자식 냉장고는 왜 이렇게 인간미가 없어? 이럴 거면 내, 냉장고는 왜 산 건지, 원.”
그가 투덜거리며 냉장고를 기웃거렸다.
냉장고 중간 칸엔 생수 서른 병과 맥주 몇 캔이 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지난번에 복수가 갖다준 반찬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제외하곤 먹을 게 전혀 없는 냉장고였다.
“지, 집밥 잘 챙겨 먹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
삼시 세끼 잘 차려 먹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밥다운 밥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복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를 소홀히 하는 유신이 못마땅했다.
“아, 안 되겠어. 볶음밥이라도 해서 내, 냉동고에 넣어 둬야지. 당근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마치 유신의 끼니를 챙기는 게 지상 과제인 것처럼 복수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유신을 알고 지낸 지 올해로 7년이 되었다. 감옥에서 유신을 처음 만났을 때 복수는 세상만사를 포기한 것처럼 무기력한 상태였다.
스무 해를 넘게 헌신한 회사에서 버림받고 그간의 연구 성과를 모두 빼앗긴 채 철창신세까지 지게 되니 세상이 참 무섭고 허무하기만 했다. 그래서 처음 유신이 감방에 들어왔을 때도 데면데면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불면증에 고통받던 어느 날, 새벽녘 홀로 그림을 그리는 유신을 보았다. 태블릿은커녕 변변한 스케치북도 없어서 조간지로 나온 신문 위에 뭔가를 끄적이는 모습이었다. 잠도 안 자고 뭐 하나 싶어 들여다본 그의 눈에 칙칙한 배경 위 검은 연필로 그려진 차체가 보였다. 그건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신문지 위에 피어난 예술이었다.
‘완전 물건이 들어왔네.’
관심 없는 척 등을 돌리고 누웠으나 머릿속엔 내내 그의 그림이 떠다녔다. 다음 날 오전 자율 시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홀로 감방에 남은 그는 유신의 옷가지를 뒤졌다. 그 안에 수북이 쌓인 신문지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이란!
그때부터 유신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복수는 무려 두 달을 그의 그림을 훔쳐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나간 줄 알았던 유신에게 현장을 발각당했다.
[뭐 주워 먹을 거 있다고 남의 자리를 기웃대요?]
복수의 손에 들린 신문지를 홱 낚아채 박박 찢어 버린 그가 사나운 눈으로 경고를 날렸다.
[산업 스파이라더니 개 버릇 남 못 주네.]
상당히 삐딱한 놈이었다. 그러나 맹렬한 비난에도 복수는 오직 하나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어이쿠, 저걸 왜 찢어? 아까워 죽겠다.’
그날 복수는 처음으로 유신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 보았다. 놀랍게도 그를 이곳에 있게 만든 게 김한주 회장의 아들이란 소리를 듣고서 그는 난생처음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 희망도 없이 무기력하게 보내던 감옥 안에서 유신을 만난 게 단지 우연일까? 아니, 그건 운명이었다. 어쩌면 신이 그에게 내린 마지막 기회.
‘거기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얼른 여길 나가 김한주에게 복수해야지.’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복수는 다시 일어섰다.
그 후로 몇 달이 흘렀다. 감옥 안에서 유신과 온종일 머리를 맞대고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품은 꿈을 나누었다. 감옥 안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형기를 채우고 먼저 출소한 복수는 곧장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사 학위와 포스트 닥터를 미국에서 이수한 그에겐 ‘존 웰슨’이라는 스승이 있었는데 복수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가 직접 연락을 취해 왔다.
존 웰슨은 베링거 모터스에서 연구소장을 역임하고 부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었다. 경영학도 출신이 경영진에 오르는 경우가 많은 한국에 비해 미국은 실무진이 직접 경영 일선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서 자동차 모터 연구의 대가인 그가 부회장 자리까지 오른 건 그다지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베링거 모터스 연구소장으로 발탁된 후 복수의 연구 성과는 빛을 발했다. 슈퍼 카 브랜드 중 전기 자동차 개발에 다소 뒤처지던 베링거 모터스는 복수의 합류 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의 연구팀은 고속에도 과열되지 않는 모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베링거 모터스는 그의 연구를 주축으로 향후 10년간 사업 모델을 발표했다.
‘성능은 해결했으니 문제는 디자인인데.’
그간 베링거 모터스를 이끌어 오던 대표 디자이너가 고령을 이유로 퇴임한 후 현재 수석 디자이너가 공석인 상황이었다. 베링거에서는 대대적으로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고 복수는 그때 처음으로 유신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공모전 요강을 프린트한 종이 한 장과 명함 한 장.
밤새워 쓴 편지를 끝내 휴지통에 구겨 넣은 후 복수가 보낸 건 그게 다였다.
‘설마 감방에서 나와 한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자리를 잡은 후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했었다. 네 자리까지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붙잡으라고.
복수는 그렇게 유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유신에게서 답장은 없었고 복수는 한동안 초조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공모전 마지막 날 서류 하나가 도착했다. 그것을 열어 본 복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 자식…… 답장을 이런 식으로 보낸다 이거지?”
‘맥파이’라는 디자이너명으로 응모한 서류 안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포트폴리오가 들어 있었다. 색채를 입은 그의 디자인은 신문지에 끄적거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하여간 난놈은 난놈이라니까.”
유신은 베링거에서 주최한 그 공모전에서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미국에서 재회했다. 뜨거운 포옹으로 그간의 인사를 대신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김한주 부자에게 복수하는 건 잊지 않았겠지?]
[잊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죠.]
존 웰슨의 신임을 얻은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베링거 모터스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연구 분야와 디자인 분야의 환상적인 컬래버는 회사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의 구심점이 된 존 웰슨은 차기 회장으로 점쳐지게 되었다. 좌 복수, 우 유신을 거느린 그야말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 동안 복수와 유신은 핏줄보다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복수는 친아들처럼 살뜰하게 유신을 챙겼는데 특히 그의 식사를 무진장 신경 썼다. 정나미 없이 무뚝뚝한 녀석의 성격은 참을 수 있어도 그의 냉장고가 비는 일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당근이 없잖아. 이, 이 자식은 집에서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복수는 투덜거리며 지갑을 챙겨 일어났다. 당근이며 감자며, 심지어 그 흔한 달걀조차 없는 냉장고에 학을 떼면서.
달칵.
호텔 문을 열고 나선 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으앗!”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낯선 인영에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시죠?”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설마하니 문 안에서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한 듯 상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복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찬찬히 앞에 선 인물을 훑어보았다.
‘이거 뭐지. 김한주가 보낸 작자인가.’
그렇다기엔 행색이 너무 평범한데.
눈앞에 선 여자는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다소 마른 체격에 키는 조금 큰 편이었고 머리는 짧게 잘라 단정했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어찌 보면 쌀쌀한 인상이었지만 고풍스러운 말투나 꼿꼿한 자세 등을 보면 쌀쌀이라기보다는 꼬장꼬장한 쪽에 가까웠다.
‘중학교 때 선생님 보는 것 같네.’
무진장 엄하던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복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운을 뗐다.
“개, 객실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여긴 펜트하우스로 장기 투숙하는 고객에게만 제공되는…….”
“룸서비스 하시는 분인가요?”
“예?”
“잘못 찾아온 거 아닙니다. 내 아들이 여기 묵고 있어요.”
헉.
복수는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만……’
그녀가 바로 유신의 어머니라는 걸 눈치챈 복수는 더욱 이 상황이 난감하게 느껴졌다.
“아, 그러시군요. 저, 저는 룸서비스 하는 사람은 아니고…….”
“우리 유신이와 아는 사이인가요?”
“네, 네. 따지자면 그렇죠. 그냥 아는 사이는 아니고 미, 미국에서부터 절친한…….”
“설마 장복수 씨?”
“……절 아십니까?”
말 더듬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 칼같이 말을 자르던 상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유신으로부터 은인이 있다는 얘기는 몇 번이고 들은 터다. 설마하니 그 은인을 이렇게 맞닥뜨릴 줄은 몰랐던 터라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유신이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미국에서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요. 너무 감사해서 한번 찾아뵐까 했는데 끝까지 연락처를 안 주더라고요. 아시다시피 그 녀석이 정나미가 없는 편이라.”
“예, 예.”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들의 은인이면 제 은인과도 마찬가지인데 룸서비스 운운해서 죄송해요. 유신이 집에서 나오길래 난 혹시 또 김기철과 관련된 사람인 줄 알았죠.”
경계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서로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웃겨서 복수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사실 여긴 처음 와 봐요. 유신이 지내는 곳을 이제야 알게 돼서. 못난 어미죠.”
“그, 그렇지 않습니다. 유신이가 어머니 얘기를 많이 했거든요. 강직하고…… 멋진 분이라고요.”
“그 녀석이요?”
의외라는 듯 상미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8년이나 엄마를 속이고 미국으로 내뺀 자식이 티끌만 한 양심은 있나 보네.”
신랄한 어투에 복수는 연신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겁대가리 없는 유신의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멀리서 찾을 것도 없지 않은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피켓을 들고 무려 2년이나 1인 시위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강단 있는 여자일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건 뭐 여전사가 따로 없다.
‘아, 기가 빨리는 것 같아.’
복수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상미의 물음이 한발 빨랐다.
“뭐 하러 나가시는 길이었어요?”
“아……. 지, 집에 당근이 없어서 좀 사려고요.”
“당근이요?”
“유신이 볶음밥 해 주려고…….”
죄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 작아지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여자라고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는데.
“당근이라면 여기 많이 있는데.”
상미가 두 손에 든 까만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감자도요.”
“?”
“그리고 계란도.”
“!”
맙소사.
처음 본 여자랑 호텔 방에서 볶음밥을 하게 생겼다.
여자 손목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숙맥의 등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