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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총괄 이사에게 대충 얘기는 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걸 그렸기에 그렇게 난리들이야?”
기철이 자리하기도 전에 한주가 대답을 재촉했다. 지난번 선율의 집에 몰카를 설치한 일로 경찰서에 다녀온 후 집에서도 말 한마디 걸지 않던 아버지였다.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한주의 시선이 어쩐지 부드러워, 용기를 얻은 기철이 심호흡을 하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글쎄요. 그냥 떠오르는 대로 그려 본 건데 다들 높게 평가해 주시더라고요.”
“보자꾸나.”
“예, 아버지.”
잠시 후 한주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게…… 정말 네가 그린 디자인이라는 소리냐?”
그것은 그가 평생을 염원해 온 꿈을 정확히 옮겨 놓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과감하면서도 기본을 지키는 그야말로 완벽한 차체의 곡선. 내부와 외부 할 것 없이 조화로운 차체는 디자이너의 세세한 배려가 돋보였고, 눈에 확 띄면서도 거슬리지 않는 개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네 솜씨라고?”
한주가 거듭 물었다. 믿기 힘들다는 듯 떠보는 어투에 기철이 덤덤히 대답했다.
“네, 아버지. 대학교 다닐 때부터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는 거 아시잖아요. 대학 졸업하고 잠깐 다녔던 아트 스쿨도 도움이 되었고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네가 이런 걸 그렸다는 게 도통 믿기지 않는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한주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허, 이런 실력을 왜 지금껏 썩히고 있었던 게야? 못난 놈!”
타박하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벙글거렸다. 처음으로 받아 본 아버지의 인정에 기철은 한껏 고무되었다.
“이게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들다마다! 널 디자인실로 보낸 게 신의 한 수였구나. 이 김한주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어, 허허허!”
한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TF팀 꾸려서 준비하거라. 이번 모터쇼에서 다음 시즌 디자인으로 공표해야겠어.”
“그렇게 빨리요?”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외부로 새어 나가기 전에 우리 거라고 당당히 선포해야지. 괜히 뭉그적거리다가 디자인 유출이라도 되면 골치 아파져.”
그의 말이 옳았다.
당장 유신만 해도 뭉그적거리다가 디자인을 도난당한 셈이 아닌가!
모터쇼에서 썩은 호박처럼 일그러질 유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철이 히죽 웃었다.
“네, 아버지. 바로 TF팀 꾸리겠습니다.”
기철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회장실을 나서는 그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빛났다.
* * *
기철의 모략이 한창 움트고 있을 때 유신은 다른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헤어지기 싫은데.’
저녁도 먹었고 영화도 봤고 술도 한잔했으니 이제 집에 데려다줄 차례였다. 자정도 훌쩍 넘은 시각이라 헤어져야 하는 건 아는데 도통 떨어지기가 싫었다. 그러나 선율은 대리 기사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주저 없이 자신의 집 주소를 불렀고, 유신은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잠자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신세였다.
‘진짜 매정하네. 볼일 다 봤다고 쌩하니 들어가겠다니.’
오늘 하루 정도는 같이 있을까 먼저 얘기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대학생 때부터 선율은 집에서 자는 걸 철칙으로 여겼다. 집주인 부부와 아버지가 종종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라 외박하는 거 들켰다간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린다나 뭐라나. 홀로 자취를 하면서 그런 철칙을 세운 게 기특하긴 하지만, 그 철칙의 범주에 자신이 포함될 때는 얘기가 다르다.
유신은 오늘 반드시 선율과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냥 차 돌리자고 하면 들은 척도 안 하겠지? 집 앞에서 술이나 한잔 더 하자고 할까?’
오늘부터 1일이라고 선언한 건 아니지만 다시 연인이 되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손잡으면 안고 싶고, 안으면 키스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 데다가 무려 8년이나 그리워했던 연인이 아닌가! 하루도, 아니 일분일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확 보쌈해서 제 옆에 붙들어 놓고 싶은 마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꾸역꾸역 삼키는지 유신은 인내하는 데 제 하루치 체력을 다 소진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골몰해도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차는 선율의 집에 거의 다다랐다.
“아…….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네. 벌써 집 도착한 거야?”
차가 멈추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선율이 퍼뜩 일어났다. 유신은 기사에게 대리비를 쥐여 주고 그녀를 따라 내렸다.
“왜 따라내려? 피곤할 텐데 그냥 타고 가지.”
선배랑 조금만 더 있고 싶어서요.
솔직히 말하기엔 좀 없어 보이고 그냥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쓸데없이 왜 내려?’ 하고 묻는 선율에게 마땅히 댈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뭐.”
유신은 제 앞에 선 선율의 어깨를 폭 끌어안았다.
“잠깐 바깥 공기 좀 쐬고 싶어서요.”
좋은 향기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자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늘 그를 불안하게 했던, 끓어오르는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게 했던 그녀의 향기.
“……좋다.”
유신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녀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선율은 고양이처럼 파고드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두 손으로 껴안아 지지도 않는 커다란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지자 어느덧 그녀의 가슴도 몽글몽글해졌다.
“이러니까 꼭 연애 시작할 때 같네.”
싱그러운 어느 여름날, 오로지 둘밖에 없었던 교정이 떠올랐다.
저돌적인 그의 입맞춤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그날의 나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오직 우리 둘뿐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나만 바라보던 너.
긴 세월을 건너뛰었지만 조금도 바래지 않은 그날의 색채가 두 사람을 짙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선율은 울컥한 감정을 추스르며 유신에게 속삭였다.
“잠깐 들어갔다 갈래?”
* * *
유신이 선율의 집을 제대로 본 건 참 오랜만이었다. 먼발치서 본 적은 많았지만 집 안까지 들어온 것은 지난번 기철의 침입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참 따뜻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선율의 체취가 묻은 공간, 반쯤 정리하다 만 듯 적당히 어질러진 물건들.
“좀 지저분하지?”
행거에 줄줄이 걸린 속옷을 황급히 치우며 선율이 볼을 붉혔다. 유신은 못 본 척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래 이렇게 안 치우고 사는 사람이 아닌데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 그래서 그래.”
“왜요. 인간적이고 좋은데요.”
부끄러워하는 선율이 너무 귀여웠다. 자꾸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입가에 꾹 눌러 담고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던 그가 문득 멈춰 섰다.
“이건…….”
유신의 손이 자석에 이끌리듯 거실장 한편에 놓여 있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사진이었다.
요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환히 웃음 짓는 할머니를 다정히 끌어안고 있는 건 선율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아, 그거.”
속옷을 침실에 쑤셔 박고 나오던 선율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거야. 할머니 부쩍 살이 많이 빠지신 때여서 나만 통통하게 나왔어.”
“……누가 보면 선배가 우리 할머니 손녀인 줄 알겠네요.”
“피만 안 섞였다 뿐이지 손녀 맞아. 할머니, 아마 너보다 날 더 좋아하실걸?”
유신은 애틋한 손길로 액자를 쓸어 보았다.
자신이 미국에 있는 동안 선율이 매주 할머니를 찾아갔던 건 알고 있었다. 유신을 그토록 끔찍이 원망하면서도 선율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요양원에 들렀다고 했다.
“괜히 감동받지 마. 너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 보러 간 거니까. 좀 더 정확히는 할머니가 꾸깃꾸깃 숨겨 놓은 간식 털어먹으러 간 거야.”
“예쁜 도둑이네.”
유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치매로 인해 자신을 딸로 아는 할머니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깊은 속내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참 고마운 사람.
얼굴 못지않게 마음도 예쁜 사람.
그래서……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은 사람.
먼 미국 땅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의 삶처럼, 그녀 역시 치열하게 유신을 지키고 있었음이 피부로 와 닿는다. 유신은 듬성듬성한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 보았다.
“우리 할머니 진짜 행복해 보이네. 선배를 진심으로 예뻐했나 봐요.”
“당연하지! 간식으로 홍삼 캔디 나오면 무조건 나한테 주셨다고. 그 귀한 홍삼 캔디를 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할머니 돈 많았으면 선배한테 전 재산이라도 주셨겠네.”
“두말하면 잔소리지.”
선율이 브이 자를 그리며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미소에 유신은 감정이 복받쳤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던 못난 손자인데.
철없는 시절 여자 친구랍시고 데려갔던 그녀는 잊지도 않고 꼬박꼬박 할머니를 찾아 주었다. 유신으로 인해 철저히 삶이 망가졌던 그때조차도.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빚을 진 것 같네요. 고마워요, 선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서로 갚으면서 살아가기로 하죠.”
유신이 선율의 얼굴을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평생 갚을게요.”
깊은 눈매가 쓸어내리듯 그녀의 콧대를 따라 흘렀다. 입술에 닿은 그의 시선은 뜨겁고도 달콤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요. 어디로도, 죽을 때까지.”
낮은 음성은 언제 들어도 감미로웠다. 조용해서 더 확실히 느껴지는 심장 박동. 그의 손길이 닿은 뺨이 홧홧했다.
“헐, 나 왠지 방금 족쇄 찬 느낌 들었어.”
가만히 있으면 그에게 삼켜질 것 같아서 선율이 장난스레 대꾸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유신은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치는 그녀를 더욱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족쇄 한쪽은 내 손목에 묶여 있어요. 절대 못 풀어.”
고개를 푹 숙여 여린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은 그가 새겨 넣듯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
“다시는 내 곁에서 떨어트려 놓지 않을 거니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