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46)화 (46/85)

46

유신은 차를 멈추고 기어를 파킹으로 두었다. 그러곤 깊은 눈매로 선율을 응시했다.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싫은 게 아니라……!”

“싫다고 하면 앞으로 안 할게요. 선배가 싫어하는 짓은 나도 하기 싫어.”

요망한 입술이 그녀를 종용한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싫었어?”

선율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뻗댈 타이밍은 이미 지난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그래, 싫었어.”

“황준기 동생이라고 해도?”

“준기 동생은 뭐 여자 아니냐? 솔직히 주희 씨 매력 있잖아. 동글동글하고 귀엽고 나처럼 땍땍대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런가.”

“그리고 주희 씨가 너한테 관심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물론 네가 싸가지 없고 가끔 정 팍팍 떨어질 정도로 음흉한 인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얼굴이 지나치게 반반하죠?”

“……재수 없어.”

유신이 씩 웃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란 건 그의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미소가 어린 이목구비는 순간적으로 눈앞을 환히 밝힐 정도로 근사했다.

졌다, 졌어.

저 얼굴에 몇 번을 넘어가는 거냐.

“선배 안심시켜 주는 말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유신이 선율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턱 얹었다.

“계속 불안해했으면 좋겠어. 나만 신경 쓰고 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선배 모습 계속 보고 싶거든요.”

“와……. 더 악랄해져서 돌아왔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가볍게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그가 다시 전면을 보았다.

“출발할까요?”

“하든지 말든지.”

말싸움에서 또 한 번 패배한 선율이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유신의 눈매가 야릇하게 휘었다.

“아직 배가 덜 고픈가 보네.”

“뭐?”

“힘 좀 빼고 갑시다. 눈 감아요.”

순식간에 의자가 젖혀졌다.

“미쳤어? 길바닥에서……!”

코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에 선율이 숨을 훅 들이마셨다. 당황하는 그녀의 귓가로 툭툭,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 한번 믿어 봐요. 선팅에만 차 한 대 값은 들였으니까.”

그의 입술이 달콤하게 안을 헤집었다. 선율은 눈을 부릅뜨고 버텼으나 솜사탕처럼 입술을 적셔 오는 그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창밖의 풍경이 어느새 눈에서 멀어지고 보이는 건 오로지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콧대와 올올이 내려앉은 속눈썹뿐이었다.

“흐으…….”

옅은 신음조차 그의 잇새로 모조리 먹혀 들어갔다. 블라우스 안으로 쑥 들어온 그의 손이 달래듯, 유혹하듯 선율의 몸을 어루만졌다. 꽉 쥐었다가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아귀에 선율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선배.”

귓바퀴를 쓸어내리는 낮은 음성은 애원하듯 호소력이 짙었다. 그의 앞에선 모든 게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버틸 수가 없어. 밀물에 그대로 떠밀려 부서져 버리는 것만 같다.

“사랑해요.”

“읏!”

“진짜 미칠 거 같아.”

기어이 그가 안을 꽉 채우고 들어왔다. 나지막한 신음이 터졌다. 그의 심장과 꽉 맞닿은 가슴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좋아서 돌아 버리겠어.”

유신이 움직일 때마다 선율의 몸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미 축축이 젖어 버린 목덜미에 또다시 그의 입술이 매끄럽게 흘렀다.

“나도…… 나도 그래.”

꾹 다문 선율의 입술 안으로 흐느낌이 샜다. 이 충만한 느낌을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를 미치게 원하는 이 마음을 그간 어떻게 참아 온 건지, 너무 커져 버린 마음은 다시 욱여넣을 수도 없다.

빈틈없이 근육이 들어찬 유신의 등에 선율의 손톱자국이 길게 새겨졌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신음에 어느새 목이 쉬어 버렸다. 창문 안쪽으로 뿌옇게 낀 입김이 차 안에 가득한 열기를 아찔하게 그리고 있었다.

* * *

모터쇼가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모터쇼는 전 세계 유수의 럭셔리 카 브랜드가 대거 참여하는 초대형 모터쇼였다. 베링거 모터스를 비롯해 평소엔 쉽게 접하지 못하는 슈퍼 카 브랜드가 다음 시즌 신모델을 선보이는 자리라 시작도 전부터 열기가 높았다.

한주 자동차는 맨 끄트머리의 부스를 받아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럭셔리 카가 아님에도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이번 모터쇼의 기조가 ‘전기 자동차의 럭셔리화’였기 때문이다.

한주 자동차는 한국에서 전기 차 분야로 가장 혁혁한 성과를 내보이고 있었다. 복수에게서 강탈한 연구 성과를 발판 삼아 차츰차츰 성장해 간 한주 자동차는 미래 산업을 지향하는 정부의 두둑한 지원금으로 날개를 펼쳤다.

최근 출시한 경차가 잇따라 히트를 치면서 ‘한국의 전기 차 하면 한주 자동차’라는 공식을 성립시켰다. 길을 가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한주 자동차의 로고를 보며 김한주 회장은 매우 뿌듯해했다.

그러나 한주 자동차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브랜드 이미지 자체가 워낙 경차에 한정되어 있어서 고급화 전략을 쓸 수가 없었다. 자동차 출시 가격을 백만 원만 올려도 비싸다고 난리를 쳐 대니 울며 겨자 먹기로 천만 원 내외의 출고가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경영진은 그 문제의 답을 ‘디자인’에서 찾았다.

[요새 고객들은 기능적인 부분보다 심미적인 부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 보니 차량 기능은 거기서 거기라는 경험이 축적된 거죠. 우리 한주 자동차에서도 유능한 디자이너를 영입해 심미적인 부분을 보강하는 게 시급할 것 같습니다.]

한주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디자이너를 구하기가 그렇게 쉬운가? 인사팀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으나 한주의 성에 차는 디자이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디자이너의 몸값을 맞출 수가 없었다.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의 경우 그야말로 부르는 게 몸값이었다. 경영진의 연봉을 모두 합한 것 이상의 액수를 부르는 건 예삿일이었고 아예 연락도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의 경우 디자이너의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맥파이’가 그랬다. 6년 전 베링거 모터스에 입사했다는 이 젊은 디자이너는 무서울 정도의 천재성으로 맥파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가 디자인한 자동차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미국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두 번째 시즌은 예약 판매가 시작되기도 전에 선주문이 마감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 잘난 ‘맥파이’가 조유신이라는 걸 몰랐기에 망정이지 만약 알았더라면 속이 끓어 잠도 이루지 못했으리라.

이런 와중에 기철의 입사는 단비와도 같았다. 산업 디자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데다 자동차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는 아들이니 디자인팀으로 보내면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미대 가는 걸 그렇게 반대했는데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지 뭔가!’

한주는 망설임 없이 기철을 디자인실 본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건 금세 증명되었다. 입사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기철의 팀에서 들려온 소식 때문이었다.

[회장님!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김 본부장이 일을 내셨다니까요!]

이 자식이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 성긴 눈썹을 휙 올리는 한주를 향해 총괄 이사가 거의 울먹이며 보고를 올렸다.

[오늘 차기 시즌 모델 선정 건으로 디자인팀에서 회의가 있었는데요. 거기서 글쎄, 김기철 본부장이 디자인을 하나 내밀었는데! 아, 말로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이건 정말 대박이에요! 김 본부장 말론 그냥 습작일 뿐이라는데 이 바닥에서 이십 년 넘게 구른 제 안목으론 습작이 아니라 걸작 수준입니다. 회장님께서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호들갑 떨지 않는 총괄 이사의 흥분에 한주의 눈매가 길게 늘어났다.

‘얼마나 대단한 디자인이기에 저래?’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반쯤은 의심하며 한주가 기철을 불러들였다.

똑똑똑.

“들어오거라.”

회장실 문이 열렸다.

이윽고 한주의 눈앞에 태블릿을 들고 선 기철의 모습이 들어왔다.

* * *

기철은 주희에게서 디자인을 건네받고 3일 밤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이걸 덥석 먹어도 되는 걸까? 잘못 주워 먹었다가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질투에 눈이 돌아 버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평소 주희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급진적인 태도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하기야 두 사람 갈라놓겠다고 나도 별짓을 다 했었는데, 뭐.’

둘을 갈라놓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발표 자료에 몰카 영상을 삽입하는 대범한 일까지 저지른 그였다.

혹시 정식으로 등록을 마친 디자인이면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나, 그 부분이 제일 걱정이긴 했다. 그러나 망설이는 기철에게 주희는 걱정할 거 하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조유신 이사는 폴더를 세 개로 관리하고 있었어요. 이미 출시가 끝난 디자인, 새 시즌 등록을 마친 디자인, 그리고 습작 폴더.]

[……그래요?]

[이번에 광고를 촬영하면서 조유신 이사의 태블릿을 운 좋게 가까이서 볼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아요. 습작 폴더에 있는 디자인 중 아직 세상에 공개된 건 하나도 없어요.]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굶어 죽으나 탈이 나서 죽으나 마찬가지지.’

그는 디자인실 회의가 시작하기 30분 전부터 회의실에서 태블릿을 꺼내 놓고 집중하는 시늉을 했다. 하나둘씩 회의실로 입장하던 직원들이 자연스레 그의 태블릿을 기웃거렸다.

“이거 뭐예요?”

기철은 쑥스러운 듯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 안엔 유신의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 그린 그림이 자랑스레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관심을 보이던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찬탄으로 바뀐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오, 이거 본부장님이 직접 스케치한 거예요?”

“네, 뭐…… 습작으로.”

“대애애애박! 습작 수준이 아닌데요! 이대로 바로 출시해도 대박 칠 거 같은데요? 본부장님 천재 아니에요? 산업 디자인 전공하셨다곤 들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실력을 그동안 어떻게 감추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기철은 제가 그린 디자인처럼 우쭐했다.

바로 그날 저녁, 회장실로부터 호출이 왔다.

“본부장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한주에게서 온 연통에 기철의 심장이 심하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면 이제 이 일은 빼도 박도 못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반, 유신의 공로를 가로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러나 기철은 두려움을 이겨 내고 복수하는 쪽을 택했다.

많은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디자인 분야는 누가 먼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등록’을 마치는지가 중요할 뿐.

기철이 이 디자인을 정식으로 등록해 제 것으로 인정받고 나면 그 후에 유신이 제 것이라 우긴다고 해도 크게 위협적이진 않을 것이다. 지루한 법정 싸움이 계속되겠지만 법원도 결국은 제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회장실 문을 노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