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우리 오빠 장례식장에서 내가 그랬었죠? 나는 이제 무서운 거 하나도 없다고.”
“주희야.”
“나 걱정해서 그 일은 다른 사람 시키겠다고 했던 거 알아요. 오빠 몰래 내가 해 버린 건 미안하지만…… 위험할 거 하나 없었어요. 봐요, 나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한층 더 어둑해진 유신의 눈치를 보며 주희가 말을 빨리했다.
“그나저나 김기철, 디자인 보자마자 눈이 벌게졌던데요? 아마 오빠 계획대로 될 거예요. 자기가 고안한 디자인이라고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했어요. 한주그룹에선 옳다구나 할 거고…….”
“황주희.”
유신이 가로등에서 등을 떼었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주희를 덮쳤다.
“준기 형 죽었을 때 눈도 못 감고 죽었다고 그랬지. 그 눈 감겨 주면서 너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게 됐다고.”
“오빠…….”
“복수해야지. 그래, 복수하자.”
“…….”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너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해선 안 돼. 그건 내가 준기 형 영정 앞에서 한 약속이기도 해.”
주희의 눈동자에 어느새 물기가 촉촉이 어렸다.
“미안해요, 오빠. 내 생각이 짧았어요.”
유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오늘부터 네 뒤에도 사람 붙일 거야.”
“네…….”
“감시받는 느낌이 들어도 참아.”
“네……. 그래야죠. 절 보호하려고 그런 건데요.”
“착하다.”
유신이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긴장이 풀린 주희가 쓰러지듯 유신의 가슴에 안겼다. 유신은 아이 달래듯 주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 * *
30분 전, 바이디오 회사 빌딩 앞.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유신은 종종 선율을 태우러 회사 앞으로 왔다. 급한 프로젝트가 끝나 조금 한가해진 선율은 일주일에 한두 번 그와 데이트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분위기 좋은 와인 바에서 와인을 나눠 마실 때도 있었고 때론 동네에서 국밥을 말아 먹고 포장마차에서 우동 국물에 소주를 기울이기도 했다. 데이트의 형식이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선율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좋았다. 같이 보내는 일상이 점점 자연스러워진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데리러 갈게요.>
퇴근할 즈음 유신으로부터 전송된 짤막한 문자에 선율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둑이 터진 듯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선율은 일 분에 한 번씩 손목시계를 보게 되었다.
6시 정각.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선율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나이스!”
6시 땡 하자마자 달려 나와 그런지 엘리베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선율은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정돈했다.
회사 정문엔 슈퍼 스터드가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한국에 딱 두 대뿐인 차라 번호판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걸음은 느긋하게. 아주 보고 싶었지만 전혀 그러지 않은 것처럼 선율이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유신이 차 문을 열고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선배, 여기!”
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선율은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그가 열어 준 조수석에 올랐다.
차 안에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곡이냐고 물었더니 ‘드뷔시의 달빛’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원래부터 클래식을 좋아했냐고 물으니 그는 여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조용한 음악을 찾아 듣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선율은 어쩐지 그의 불면증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모르고 지냈던 세월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에게 갚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제 마음을 다 내보이기엔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래서 더 노력이 필요했다. 선율은 잠시 침체되었던 마음을 다잡으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내가 살게.”
“됐어요. 미리 예약해 둔 곳이 있어서.”
“그럼 내가 그거 사면 되겠네. 나 이틀 뒤에 월급 받아. 오늘은 누나가 쏜다.”
“후회할 텐데.”
거듭 만류하는 말을 들으니 조금 겁이 나긴 했다.
‘설마 막 300만 원짜리 와인 주문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산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선율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월급보다 많이 나오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그래요, 그럼.”
유신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지갑을 털릴지도 모른다는 선율의 기우는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서졌다. 레스토랑에 막 도착할 때쯤 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온 탓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능숙하게 전화를 받은 그는 누군가로부터 보고를 받는 듯했다. 한참이나 대꾸도 없이 듣고만 있더니 한다는 말이.
“알았어. 지금 갈게.”
였다.
선율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급한 일이야? 나 지하철역 근처에서 아무 데나 내려 주면 돼.”
데이트가 무산된 건 아쉽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배려에 잠시 고민하던 유신은 그녀를 내려 주는 대신 곧바로 차를 돌렸다.
“같이 가요.”
“그래도 돼?”
“나 오늘 선배랑 데이트하려고 새벽 4시에 나와 일했단 말이에요. 같이 밥 먹어요.”
“오래 걸리는 일 아니야?”
“30분 정도면 돼요. 지금 막 배고파서 사나워질 정도는 아니죠?”
이게 누굴 짐승으로 아나.
선율은 휙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사흘 밤낮을 굶어도 안 사나워져!”
그러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배에선 금세 꼬르륵 소리가 났다. 행여 그에게 소리가 들릴까 싶어 주린 배를 부여잡은 선율은 그의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유신은 오피스텔이 빽빽하게 들어선 어느 골목에 차를 세워 두고 금방 다녀오겠단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선율은 의자를 조금 젖혀 음악을 감상하다가 조금 지루해진 나머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10분 정도면 끝날 거 같다더니 벌써 20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선율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맑은 공기도 쐴 겸, 차에서 내려 근처를 한번 둘러보니 저 멀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어진 지 꽤 오래된 듯한 낡은 오피스텔 앞.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가 그보다 세 뼘쯤 작은 여자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 어귀라 실루엣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순정 만화의 한 장면처럼 달콤하게 보였다.
“만난다는 사람이 주희 씨였구나.”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잘 알면서도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선율은 그녀의 기억에서 답을 찾았다.
선율과 만나는 동안 유신은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대학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그는 선율 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그와 가장 가까운 수행 비서 역시 남자였다.
유신은 제 외모가 가진 힘을 잘 알았다. 밥 먹었냐, 어제 뭐 했냐 같은 일상적인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그랬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보이지 않았고 말조차 쉽게 건네지 않았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두 사람의 만남은 선율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예외는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저렇게 심각하게 나누는 거야?”
선율의 걸음이 자석에 이끌리듯 그쪽으로 다가섰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제 모습이 참 초라하게 느껴질 때쯤, 주희의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는 유신의 모습이 보였다.
“!”
선율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저 자식 손모가지를 진짜…….’
그녀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둘은 꽤나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준기의 동생. 저 정도 친밀함은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주희는 싹싹하고 애교 많은 성격이었다. 어디에 떨궈 놔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캐릭터라서 곁에 두고 일을 하면서 항상 즐거웠다. 그건 유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고 지낸 지 2년이 넘었다고 했지. 되게 친해 보이네.’
유신에게 여자는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가슴 한구석이 텁텁했다. 자신감이 과했던 건 아닌지 괜히 반성도 되고.
잠시 후 유신이 차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렸죠?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져서.”
유신이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생각이 많아진 선율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을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율을 보며 유신이 흘깃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질투해요?”
쿨럭쿨럭!
기승전결도 없이 훅 들어온 그의 말에 선율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쏟아졌다.
“질투는 무슨!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나 유신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반응 보니 맞나 보네.”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선율을 보며 그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던 사람이 돌아오자마자 죽상을 하고 있다. 안전벨트 안 맨 거 보니 나갔다 들어온 모양이고. 내가 뭘 잘못했으면 득달같이 따지고 들었을 사람이 말이 없어졌다.”
“…….”
“그럼 답이야 뻔한 거 아닌가.”
그 말을 할 때의 유신은 꽤 즐거워 보였다. 선율이 볼 것을 기대하고 일부러 노리고 한 행동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 못 본 새 되게 뻔뻔해진 거 알아?”
“나랑 사귈 때도 선배 그 말 자주 했어요. 그러니까 못 본 새 사람이 변한 건 아니고.”
“하아, 말발로는 못 이기겠네.”
“져 줄 테니 말해 봐요.”
“뭘 말해.”
“질투한다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변태야? 그 말이 왜 듣고 싶은데? 그리고 나 질투한 거 아니거든. 너랑 주희 씨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그냥 마음이…….”
“어땠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안 좋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거 같고 못 볼 걸 본 거 같고 그래, 솔직히 질투가 났다. 그런 사이 아니란 거 뻔히 알면서도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 건지. 학창 시절에 조유신 잠깐 사귈 때도 여기저기서 들이대는 거 커트하느라 알바비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그런 건데. 저 인간 만나려면 이 정도 수고는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거기서 머리를 왜 쓰다듬느냐고!”
선율이 기어이 소리를 빽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