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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44)화 (4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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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철 팀장님. 잘 지내시죠?>

뜬금없이 온 주희로부터의 연락에 기철은 귀찮은 듯 미간을 구겼다.

“뭐야? 얘는 또.”

바이디오에 다닐 때 1년 넘게 본 사이지만 주희와 개인적인 연락을 할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잘 따르던 후배. 주희에 관해 기철이 가진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네, 주희 씨.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퇴사하고 이렇게 연락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튼 반갑네요.>

그러나 기철은 귀찮은 내색하지 않고 반갑게 답을 보냈다. 이참에 회사 돌아가는 사정도 좀 듣고 선율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좀 들을까 싶어서였다.

‘황주희면 선율이 직속 후배잖아. 둘이 되게 친한 사이니까 자연스럽게 소식도 들을 수 있겠지? 조유신 그 새끼랑 진짜 사귀는 건지 물어봐야겠다.’

마음을 정한 기철은 좀 만나고 싶다는 주희의 연락에 흔쾌히 응했다. 한주그룹 근처로 약속 장소를 잡고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기철은 내내 선율을 생각했다.

‘몰카 가지고 나오다 발각됐을 때 선율이랑 조유신 그 자식이 같이 있었잖아. 그 시각에 둘이 같이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틀림없이 사귀는 거야. 회사에선 그렇게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어 놓고 뒤에선 벌써 쿵짝이 맞은 거라고!’

기철은 괘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조유신이라면 치를 떨던 그녀가 아닌가! 오늘 주희로부터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확실하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 그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그의 머릿속에 쫙 계획이 섰다.

‘우선 박 주임을 이용해 바이디오에 소문을 쫙 퍼트려야겠지. 이번 광고 선정에 조유신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꽤 그럴싸한 시나리오였다. 공교롭게도 처음 치러진 최종 PT 때 유신은 결정을 한 번 번복한 적이 있었다. 모두가 양 팀장이 승리할 거라고 점쳤던 PT에서 유신은 말없이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고, 하루 뒤 다시 한번 경쟁 PT를 실시하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그건 기철이 고의로 삽입한 영상 때문이었지만 이유를 모르는 직원들 눈에는 광고주의 변덕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차여차 잘됐어. 이번 기회에 조유신 콧대를 확 꺾어 버려야지. 그 자식 때문에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면 선율이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고.’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기철이 만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이렇게라도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 팀장님, 일찍 와 계셨네요.”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커피숍 문이 열렸다. 어깨 위에 달랑거리는 갈색 단발머리와 속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 항상 웃는 낯이 귀염상인 주희였다.

“주희 씨 왔어요? 그새 더 예뻐졌네요.”

“에이, 팀장님도 참! 마음에도 없는 말씀 마세요.”

“진짠데. 내가 원래 입에 발린 소리는 못 하는 성격입니다.”

“네, 그럼 칭찬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희는 해맑게 웃으며 기철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밖에서 보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 기철이 흠흠 헛기침을 뱉었다.

“잘 지내셨죠? 새로운 회사에 적응은 끝나셨어요?”

“그럭저럭 다니고 있습니다. 제 자리에 다른 사람 들어왔나요?”

“네! 이틀 전에 새 직원 뽑았어요. 경력직이라 나름 잘하고 계신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내가 갑자기 빠지게 돼서 폐를 끼치는 거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일상적인 대화가 잠깐 오갔다. 기철은 떠보듯 주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별 의심 없이 술술 대답하는 그녀를 보곤 안심했다.

‘순진한 건 여전하네. 이제 슬슬 선율이 얘기도 꺼내 볼까?’

분위기 봐서 한번 물어봐야겠다 생각한 기철이 탐색하듯 주희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체크무늬 블라우스에 단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체형이었으나 얼굴이 둥글어 조금 통통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뺨이 좀 말라 보였다.

‘저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니 누굴 닮은 것도 같은데…….’

묘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락 말락 했다. 그러나 끝내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죠?”

“그게…… 일단 한 잔 마시고 시작해도 되죠?”

주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기철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커피를 술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며칠 밤을 고민했는데도 답이 안 나와서요……. 팀장님,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하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비장해요?”

“자칫하면 제 모가지가 날아가는 일이에요.”

주희의 굳은 표정을 본 기철이 그제야 허리를 곧추세웠다.

뭔가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나올 것 같은데.

“그래요. 거짓 없이 대답할게요. 이제 말해 봐요.”

“팀장님은 조유신 이사님 싫어하시죠?”

……빙고.

주희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에 기철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겉으론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나요?”

“그런 편이죠.”

“한선율 팀장님과 조유신 이사님이 사귀는 거 아세요?”

“……그렇습니까.”

주희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이 의미하는 바를 기철은 금세 캐치할 수 있었다.

‘뭐야. 설마 삼각관계?’

이거 생각보다 게임이 쉬워지겠는데.

어떻게 하면 유신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골몰하느라 복잡했던 머리가 단번에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기철은 펄쩍펄쩍 뛰고 싶은 걸 꾹 참고 안됐다는 듯 손수건을 건넸다.

“진정해요.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차분하게 얘기해 봐요.”

“저는 조유신 이사에게 속았어요.”

“속았다니?”

“그때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그랬잖아요.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니라고, 자기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고요! 팀장님도 들으셨죠?”

“똑똑히 들었죠.”

“그래 놓고 몰래 뒤에서 사귀고 있더라고요! 용서할 수 없어요!”

주희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감정 표현이 아주 화끈하네. 기철은 속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조유신 이사를 좋아합니까?”

“아뇨!”

주희의 흰자에 핏발이 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젓던 그녀의 눈망울에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사실은……. 사실은 맞아요. 네, 저 조유신 이사님 좋아했어요. 한 팀장님과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진작 마음 접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키우게 해 놓고…….”

주희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기철은 젠틀한 손길로 주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쁜 놈이네. 뭐 그딴 놈 때문에 울고 그럽니까?”

“억울해서요. 두 사람한테 속았다는 게 너무 분해요! 복수하고 싶을 정도로!”

속내를 거리낌 없이 내보이는 주희에 기철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는 너털웃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걸 숨기고 의뭉스레 되물었다.

“무엇에 대한 복수 말입니까? 막말로 주희 씨랑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주희는 그에 대한 대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팀장님도 조유신 이사랑 똑같은 얘길 하네요. 팀장님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기철은 서둘러 태세를 전환했다. 떠보는 건 이만하면 됐다. 이제 그녀의 진짜 속내를 들을 타이밍이었다.

“이런! 제가 괜한 말로 오해를 샀군요. 주희 씨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혀요.”

“제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요. 조유신 이사님께 고백도 했어요. 그때 조유신 이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바빠서 연애할 시간 같은 거 없다고,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 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때 한 팀장님이랑 사귄다고 말했으면 저도 미련 없이 마음 접었을 거예요! 두 사람이 뒤에서 몰래 연애하는 것도 모르고 혼자 가슴앓이하는 동안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 사람이 거짓말한 거잖아요. 고의로 나를 속인 거 맞잖아요!”

주희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다. 질투가 난 나머지 정신이 좀 회까닥했나 싶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이거요.”

주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조유신 이사님 태블릿에 들어 있던 거예요. 베링거에서 내놓을 다음 시즌 신모델이래요.”

이거였구나!

기철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한눈에 봐도 조유신의 디자인이 분명했다. 혁신적이면서도 과하지 않고, 클래식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그야말로 완벽한 디자인이었다.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가 뭡니까.”

기철이 모른 척 물었다.

“무기는 있는데 휘두를 방법이 없어서요.”

“그 뜻은…….”

“김 팀장님이 빼앗아 주세요.”

“뭐라고요?”

“베링거에서 발표하기 전에 선수를 쳐 버리란 말이에요! 무슨 뜻이지 모르겠어요?”

주희가 시뻘게진 눈으로 소리쳤다.

“허허……. 이거 참…….”

긴장한 손을 옴지락거리는 기철을 보며 주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김기철은 결코 이 유혹을 끊어 낼 수 없을 것임을.

* *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던 주희는 뜻밖의 손님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오피스텔 앞.

초라하게 켜진 가로등 아래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

짙은 어둠도 가릴 수 없는 훤칠한 키와 조각 같은 옆모습에 주희는 덜컹 가슴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고 왔지?’

기철과 헤어진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평소 유신이 먼저 주희의 집을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지금의 방문은 오늘 주희가 저지른 짓을 알고 왔다는 뜻으로 보아야 했다. 가슴이 서늘해진 주희가 쭈뼛쭈뼛 다가섰다.

“……유신 오빠.”

그녀의 부름에 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꼈던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서글퍼 보였다.

“왜 그랬어, 주희야.”

“……어떻게 알았어요?”

“김기철 주변에 사람을 하나 붙였어.”

유신이 선선히 대답했다. 최근 그의 계략으로 구치소 신세를 진 데다 기사에도 이름이 오르내린 기철은 한창 악에 받쳐 있었다. 수가 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라 유신은 미리 그의 곁에 미행을 붙였다.

“그랬구나. 에이……. 몰래 하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네.”

주희가 쓴웃음을 지으며 유신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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