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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술 먹고 길바닥에 뻗어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게 법이고 상식인데 그걸 무참히 깨부순 건 김기철이에요.”
“그래도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어.”
“선배, 나 봐요.”
유신이 의기소침한 선율의 눈을 들어 제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조심하는 건 좋은데 자책하지는 마요. 선배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술 취한 여자 방에 기어 들어가 몰카나 찍는 게 사람 새끼야? 개새끼도 그렇게는 안 해요.”
개새끼 세 글자를 유독 힘주어 말하는 그의 위로에 선율은 그만 웃고 말았다.
“푸흡. 그건 그렇네.”
“정 불안하면 내 앞에서만 마셔요.”
“그쪽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인 것 같은데?”
“적어도 난 동의 정도는 구하잖아.”
유신이 씨익 웃었다.
“키스해도 돼요?”
달빛 아래 또렷이 윤곽 진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꿈에서 늘 보았던 그 얼굴처럼 순수하면서도 나른한, 조유신 특유의 미소에 선율의 긴장감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에 대한 갈구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었다. 많이 원했고, 그만큼이나 참기 버거웠던 마음이었다.
“돼.”
선율이 먼저 두 손으로 유신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허리를 잡아당긴 손이 부드럽게 등을 감쌌다. 추위에 빳빳해진 패딩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밀착되었다.
촉.
부드럽게 닿은 입술에서 알싸한 알코올 맛이 느껴졌다. 청아한 달빛과 어우러져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는 그의 입술이 금세 달아올랐다.
깊게, 더 달콤하게.
몇 번을 부딪쳤다 떨어진 입술이 이내 매끄럽게 얽혀 들었다. 잇새를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가 부드럽게 감아올리는 것을 느끼며 선율이 눈을 감았다.
* * *
며칠 후 바이디오 사무실 안.
자막 작업을 끝낸 주희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 허리야. 이틀이나 밤새웠더니 죽겠네.”
멈춰 놓은 화면에 ‘the newest weapon, 슈퍼스터드 V880’이라는 문장이 번쩍였다. 제작팀에서 넘어온 편집 영상에 주희가 자막을 입힌 것이었다.
약 1분 30초가량의 영상은 초반 기획대로 아주 스펙터클하고 박진감 넘쳤다. 압도적인 영상미에 모두가 만족했는데 특히 방성범 부장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근 몇 년간 바이디오에서 제작한 광고 중 가장 비싸 보인다며, A급 스타를 모델로 기용한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며 놀라워했다.
그의 반응에 주희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왜긴요. 모델이 조유신이라 그렇죠.’
사실 주희도 조금 놀랐다. 급히 투입된 인력이 저렇게 훌륭할 수가 있나. 우월한 키는 둘째 치고 뒷모습만으로도 어찌나 고급스러운지 여기가 숲속인지 런웨이인지 헷갈릴 뻔했다.
그러나 눈이 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대타 투입 사건은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같은 광고주님이 발바닥에 땀 날 때까지 숲속을 뛰어다녔다는 걸 알면 회사에서 기함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광고주님이 친히 부탁하신 내용이기에 당시 촬영장에 함께 있었던 일곱 명은 모두 공범이 되어 입을 꾹 닫았다.
‘이 사실 알게 되면 CD님 기절초풍하시겠네. 큭큭.’
주희는 저만 아는 비밀을 속으로 곱씹으며 웃음을 흘렸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나니 어느덧 11시가 넘었다. 주희는 뻐근한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하자, 퇴근!”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던 주희가 불을 모두 끄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녀의 집은 사무실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용산구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준기가 살아 있을 때 함께 살았던 월셋집이었다.
괜히 그 집에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드니 이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복수가 몇 번이나 권했지만 주희는 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끝내 슬픈 추억이 되었을지라도 그곳은 오빠의 흔적이 남은 유일한 공간이었다. 준기가 쓰던 책상과 즐겨 보던 책, 녹이 슨 면도기까지 뭐 하나 버릴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우리 오빠 되게 보고 싶네.”
주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텅 빈 방 안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주인 없는 방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이번 주말에 오빠 방 청소나 한번 해 줘야겠다. 더러운 거 질색하는 사람이었는데.”
주희는 고단한 몸을 소파에 털썩 누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후우…….”
지난 몇 년이 쏜살같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오빠의 복수를 하기 위해 눈이 뒤집혀 지나온 나날들.
주희와 준기는 보통의 남매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한 가족이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라 온 터라 의지할 데가 서로뿐이었던 데다가, 꽤 나이 차이가 있는 탓에 준기가 거의 부모처럼 주희를 보살폈기 때문이었다.
준기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과외비를 모아 월셋집 보증금을 마련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어릴 적부터 꽤 영특했던 주희는 열심히 사는 오빠를 돕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사고 한번 치지 않고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오빠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할 거야. 제대로 된 월급 받으면 제일 먼저 너 선물 사 줄게. 아이패드 갖고 싶다고 했지?]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얼굴이 검붉게 타 버린 오빠는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수술을 받으며 그간 알뜰살뜰 모아 온 돈은 금세 바닥이 났고 둘은 월셋집 보증금마저 써야 할 위기에 처했다.
거짓 증언을 종용하며 수표를 내밀던 계순의 악랄한 얼굴은 그들 남매에겐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 돈을 받던 날 준기는 시뻘게진 눈으로 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 대학은 보낼 거야. 심장 수술도 시켜 줄 거고. 그러니까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준기는 그 돈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의리와 제 자존심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얻은 그 돈은 오로지 동생 주희를 위해 써야 하는 돈이었다. 제때 화상 치료를 받지 못해 얼굴이 곪아도 절대로 그 돈만큼은 쓸 수가 없었다.
준기의 장례식 날.
얼굴과 마음의 상처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빠의 영정 사진 앞에 유신이 찾아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하얀 국화꽃을 한 송이 뽑아 준기의 영정 앞에 바쳤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돌아서는 그를 잡은 것은 어쩌면 반쯤은 충동적이었다.
[조유신…… 맞죠?]
유신은 대꾸 없이 주희를 바라보았다.
[나 너무 억울해요. 우리 오빠 장례식인데…… 오빠를 저렇게 만든 놈은 코빼기도 안 내밀잖아! 나 좀 도와줘요. 네? 우리 오빠랑 제일 친했다면서!]
주희는 유신 역시 피해자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절박하게 매달렸다. 모든 일의 원흉인 기철에게 복수하고 싶은데 방법을 알지 못해서, 무작정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기철과 그 엄마한테 복수하고 싶어요. 나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모른 척만 하지 말아 줘요. 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유신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였다. 김기철의 근처에 머물러 그의 동태를 살필 것. 언제 어느 때 독을 건네도 의심 없이 받을 정도로 그의 신뢰를 얻어 둘 것.
기철이 바이디오에 입사한 걸 알아낸 주희는 끈질긴 도전 끝에 그곳에 입사했다. 그러나 부서 발령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제작팀이 아닌 기획팀으로 발령이 나서 선율의 부사수가 되었다.
그것이 운명의 장난이었음은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기철과 유신을 철천지원수로 만들고 제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의 발단이 동영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그 동영상에 찍힌 게 선율이었다는 것도 유신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알게 되었으니까.
사수로서 선율을 친언니처럼 따랐던 주희에겐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밉기도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주희는 모든 건 기철의 삐뚤어진 욕심으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도, 선율도, 준기도, 그리고 자신도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었다.
“오빠…….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유신 오빠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김기철이 아직도 멀쩡히 밖을 활보하고 있는 걸 보니 속이 쓰리네.”
현행범으로 조사를 받던 기철이 귀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희는 잠이 오질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몰카까지 설치하고 나왔는데 아무 벌도 받지 않는 게 말이 돼? 심지어 회사에 아무렇지 않게 복귀도 했다고 한다.
경찰도, 언론도 모두 한통속이라며 분개하는 주희를 달래며 복수는 말했다.
[버, 벌을 받지 않은 게 아니라 일단 구속만 면한 거야. 지금 감옥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죄,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언제 벌을 받는 거냐고요! 나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아저씨도 알잖아!]
[조,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응? 유신이도 다 생각이 있어. 주희 너, 너도 알잖아. 이번 일은 간을 본 거라는 거.]
물론 주희도 알았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뼈를 갈면서도 유신은 서두른 적이 없었으니까. 김기철이 편히 발 뻗고 자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며 조급해하는 주희에게 그는 항상 강조했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야. 차근차근 가자.]
그는 무척 신중하게 설계를 짰다. 비단 한주그룹을 무너트리는 것 이상의 절망감을 기철에게 주기 위해 몇 겹의 거미줄을 친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기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것이고, 김한주 회장은 장복수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고공 행진을 하던 한주그룹의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는 날, 비로소 그들의 복수는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유신이 계산하지 못한 단 한 가지는 주희의 인내심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철없는 신입 사원 행세하며 기철의 곁을 맴돌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볼 때마다 차오르는 분노를 삭이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그런데 더 기다리라고?
‘결국은 김기철에게 이걸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별로 위험할 것도 없는 일을 왜 망설이는 거지?’
주희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 속의 사진을 응시했다. 그것은 며칠 전 유신의 태블릿에서 몰래 찍어 온 베링거 모터스의 다음 시즌 신모델의 디자인이었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경탄을 유발할 정도로 완벽한 디자인. 천재 디자이너가 영혼을 갈아 바쳐 만든 인생의 역작이었다.
‘김기철이 옳다구나 하고 이걸 받으면 게임 끝나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김한주 회장의 눈 밖에 났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고 유신 오빠와 사이도 안 좋으니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주희의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디자인을 어떻게 입수하게 됐는지, 이걸 왜 자신에게 가지고 왔는지 묻겠지. 대답만 확실히 준비하면 돼.’
주희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기철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