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42)화 (42/85)

42

밤이 깊었다.

이제 배우가 투입되는 숲속 신을 찍을 차례였다. 달리는 뒷모습만 나오는 터라 유명한 배우를 쓸 필요는 없어서 최근 데뷔한 신인 남자 배우를 섭외했다. 잘 뛰는 배우로 섭외해 달라고 부탁을 해 둬서 그런지 얼핏 봐도 날렵한 인상의 젊은 배우였다.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패기 넘치는 인사에 선율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밤중에 달린다고 고생 많으실 텐데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우와, 제가 좋아하는 스파클링 에이드네요! 무려 레몬 맛!”

준영은 신인답게 인사성이 아주 바르고 싹싹했다. 별것도 아닌 음료 한 병에 저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선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것도 잠깐이겠지. 뜨고 나면 괜히 음료 하나 잘못 권했다가 살이 찌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싫은 소리나 할 테니까.’

저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갈까 가늠해 보던 선율이 상념을 털어 내며 활짝 웃었다.

“그럼 바로 촬영 시작하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전될 때까지 달릴 자신 있어요!”

그러나.

포부 넘치게 시작한 촬영은 예상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으앗!”

의욕적으로 달리던 준영이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숲속을 달리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린 모양인데, 하필이면 내리막길이라 세 바퀴나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윤준영 씨 괜찮아요?”

“하, 할 수 있습니다!”

준영은 설마 광고에서 잘리나 싶어 얼른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오른 발목을 디디자마자 그의 잇새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괜찮습니…… 으헉!”

선율은 조명으로 준영의 발목을 비춰 보았다.

“세상에.”

복숭아뼈 부근이 벌써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긴급 조치로 얼음 팩을 대어 보았지만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준영은 애써 얻은 기회를 날릴 위기 앞에서 울상을 지었고 선율은 선율대로 촬영에 차질이 생겨 난감했다.

‘촬영 시작하자마자 다쳐 버려서 어쩌지? 어느 정도 찍어 둔 게 있어야 편집해서 쓰기라도 하지.’

다친 배우를 원망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왔다.

‘어차피 뒷모습이니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 볼까?’

선율은 기대라곤 조금도 없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촬영 현장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일곱. 그중 선율과 주희를 포함해 여자가 셋, 남자가 넷이었다. 카메라를 잡고 있는 촬영 감독을 제외하면 세 명이 남는데 그중 둘은 미안한 말이지만 모델로서 가치가 없을 정도로 체구가 형편없었다. 남은 한 명은 그럭저럭 키는 컸지만 하필이면 빡빡머리였다.

대충 찍어서 CG를 입혀야 하나.

새로운 모델을 부르기엔 늦었고 촬영 날짜를 다시 잡기엔 시일이 촉박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가발을 공수해 올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산장 뒤편의 주차장에서 눈이 부시게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쫙 번졌다.

차 문을 열고 내리는 훤칠한 실루엣. 바닥에서부터 쭉 뻗은 늘씬한 다리.

새카만 코트를 입은 모습이 차가운 흑표범을 연상케 하는 그는 바로 유신이었다.

‘찾았다. 내 모델!’

선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촬영 감독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무언의 대화가 순식간에 오갔다.

‘방금 나랑 같은 생각 했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이게 웬 떡이래요?’

씨익.

둘의 입술이 똑같이 호선을 그렸다.

* * *

같은 시각, 김한주 회장의 저택.

막 경찰 조사를 끝내고 나온 기철이 한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입 다물어.”

“……예.”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만큼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방금까지 흠씬 얻어맞은 왼뺨이 무척 쓰라렸지만 기철은 감히 얼굴을 어루만져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포는 기철에겐 꽤 익숙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손을 올리곤 했으니까.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바쁜 아버지였지만 일 년에 열두 번도 안 되는 그날엔 반드시 호통을 듣거나 회초리를 맞았다. 한주는 늘 기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내길 원했고,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을 버러지 취급하기 일쑤였다.

어릴 땐 그런 아버지라도 좋았고, 조금 더 커서는 애정을 갈구했다. 그러나 머리가 완전히 굵은 후로 기철은 작은 기대마저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그에게 아버지란 ‘용이 지키고 있는 금광’과도 같은 존재였다. 금을 캐내려면 용이 입으로 쏘아 낸 불길을 온몸으로 뒤집어써야 한다. 맞을 때마다 뜨겁고 아파도 금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싸지른 똥을 치우기 위해 내가 몇 명한테 고개를 조아린 줄 알아?”

용이 또 한 번 뜨거운 불길을 뿜어냈다. 기철은 ‘저 돈줄, 또 시작이네.’ 속으로 짓씹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딴 말은 집어치워!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철은 이곳에 오기 전 계순에게 미리 귀띔을 들은 상태였다. 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제 여자 친구였던 한선율과 조유신 그놈이 사귀는 사이입니다. 조유신은 저를 노리고 회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고, 과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제 여자 친구를 빼앗았어요! 저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 그래서 몰카나 찍고 다닌 거냐? 그깟 놈이 노린다고 발끈해서 하는 짓이라니, 쯧!”

한주가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찼다.

“노리는 놈이 있다면 숨통을 끊어 놔야지! 고작 몰카 따위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어리석은 것, 쯧쯧!”

고개를 푹 숙인 기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계순의 말이 옳았다. 한주는 기철이 저지른 범죄를 탓하는 게 아니었다. 좀 더 확실하지 못했던 처신을 탓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앞으로 더욱 확실히 처리하면 될 일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아버지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실수했다간 용서하지 않아!”

한주는 말을 섞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기철은 고개를 깊이 숙이곤 뒷걸음질로 서재를 걸어 나왔다. 뺨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고무적이었다.

‘엄마 말대로 했더니 엉겁결에 조유신을 칠 명분이 생겼네?’

[노리는 놈이 있다면 확실히 숨통을 끊어라.]

방금 들은 한주의 말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이 불처럼 이글거렸다.

* * *

‘와……. 광고주 데려다가 이렇게 개고생시키는 건 어느 나라 법이냐.’

자정이 넘은 무렵, 유신은 산장 앞 평상에 앉아 궁상을 떨고 있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엉겁결에 선율에게 낚인 그는 무려 두 시간이 넘도록 아닌 밤중에 뜀박질을 해야 했다.

“괜찮아? 생각보다 많이 까졌네.”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온 선율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밤중에 숲속을 달리느라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손등이며 얼굴이며 잔가지에 긁힌 부분이 많아서 누가 보면 지옥 훈련이라도 다녀온 줄 알 것이다.

“아파요.”

유신이 아픈 시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선율은 왼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살살 연고를 펴 발라 주었다.

“그러게 요령껏 뛰었어야지. 육상 경기도 아닌데 우사인 볼트처럼 달리면 어떡해?”

“요령이 뭔데. 먹는 건가.”

유신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난 원래 요령 없는 놈이에요. 뭘 하든 최선을 다할 겁니다. 선배와 관련된 일이면 더더욱.”

연고를 발라 주던 선율의 손이 멈칫했다. 그래, 그가 그런 남자인 거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랬기에 제 인생의 3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나 하나 지킨답시고 갈아 넣었겠지.

‘……바보.’

유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선율의 시선이 뭉클했다.

유신은 그녀에게 손을 맡긴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밤, 조용한 산장에 그녀와 함께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괜스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유신은 가만히 선율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요?”

“자기는! 벌써 술판 벌어졌어.”

“다들 체력도 좋네요.”

“체력 없으면 이 바닥에서 못 버티지. 촬영 끝나고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촬영 감독님 지금 완전 신나셨어.”

유신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봐도 소주 짝으로 드실 것 같더라니.”

“푸흡! 그 말 감독님한테 전해 드려도 돼?”

“그럼요. 칭찬인데요.”

하여간 뻔뻔하다니까.

선율은 곱게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라 찬 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폐가 깨끗해질 정도로 맑은 공기였으나 밖에 오래 앉아 있으니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신이 코트를 벗어 주려 하자 선율이 냉큼 손을 내저었다.

“옷은 됐고. 술이나 한잔할래?”

조심스레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이곳에 오니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4학년 가을 MT 때 있었던 끔찍한 사건……. 정신없이 술에 취한 사이 당해 버린, 어쩌면 제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트렸을지도 모르는 그 일.

때문에 선율은 그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마당에 나와 있는 참이었다. 그러나 유신과 함께 있으니 어느새 두려움이 가셨다. 어느새 그를 이만큼이나 의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든든했다.

그리고 몹시 추운 것도 사실이었고.

“몸 데우는 데는 술만 한 게 없잖아. 싫어?”

“싫지 않아요.”

조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유신이 씩 웃었다.

“선배가 주는 거면 사약이라도 받아먹죠.”

잠시 후 산장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는 소주 두 병과 간단한 안주 한 접시가 들려 있었다. 살뜰하게 땅콩까지 챙겨 나온 그를 보며 선율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역시. 먹을 줄 아는군.”

“라면은 못 가지고 나왔어요. 면이 이미 불어 버려서.”

“괜찮아. 야밤에 라면 먹었다가 내일 아침에 얼굴 대참사 난다.”

산장 안에서는 연신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떠들썩한 그 소리를 들으며 선율이 중얼거렸다.

“여기 오니까 MT 때 생각이 나네.”

그녀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내리깔린 시선이 어느새 과거의 한 지점을 어루만지듯 아련해졌다.

“그날……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끝까지 정신 차리고 있었어야 하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낮게 이어진 독백에 유신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그가 선율을 응시했다.

“그게 왜 선배 잘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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