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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계순은 한주그룹으로 달려왔다.
김한주의 반응이 어떨지 눈에 빤히 보여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8년 전 황준기가 얼굴을 다쳤을 때 계순은 모든 일을 자신의 선에서 해결했다. 남편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중한 사안도 아닌 데다 괜히 남편의 귀에 흘러 들어가 봤자 호통만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김한주는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버릴 수 있는 냉혈 인간이었다. 그게 제 와이프라도, 설사 제 자식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처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을 계순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신이 조유신을 어떻게 알아?”
비서가 나간 후 김한주가 무섭게 추궁을 시작했다. 계순은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기철이와 제법 친하게 지낸 아이였어요. 당신은 관심이 없어 몰랐겠지만.”
“회사 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다 큰 사내자식 교우 관계까지 줄줄 꿰고 있으란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저는 조유신이란 아이가 왜 경찰에 기철이를 신고했는지 알 것 같네요. 조유신은 우리 기철이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요! 기철이는 덫에 걸린 거라고요!”
계순의 말에 김한주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알아듣게 설명해. 자꾸 되묻게 할 거야?”
그가 언성을 높일 때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긴장하던 계순이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고 들어온 지금은 제법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8년 전 기철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술자리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어요. 기철이 친구 하나가 화상을 입은 사고였죠. 아니, 그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어요. 조유신이란 아이가 고의적으로 그 애를 밀어 버렸으니까!”
“그게 당최 기철이와 무슨 상관이란 소리야?”
“기철이가 그 사건의 목격자였으니까요!”
계순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말이 쉬이 이해되지 않아 지끈거리던 김한주의 뇌리로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설마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인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피켓을 들고 서 있던 꼿꼿한 모습만큼은 흐릿하게나마 뇌리에 남아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치지도 않고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중년 여인.
비서가 그 일에 대해 보고했을 때 김한주는 수출 계약 건으로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그녀가 무슨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는지 대충 들었던 것도 같은데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알아서 처리해.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김한주 입장에선 소소하다 못해 기억에 남지도 않는 일이었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주식이 빠졌다며 징징, 불법 해고를 당했다며 징징, 과로사로 남편이 죽었다며 징징. 1인 시위는 회사를 설립한 후로 늘 있어 온 일이고, 기껏해야 몇 달이면 스스로 나가떨어질 걸 알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비서가 아주 훌륭하게 일을 처리한 덕에 회사를 기웃거리던 기자들이 빈손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엔 수군거리던 직원들의 관심도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 덕에 김한주는 매일 석상처럼 서 있는 여자를 회사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 정도로 취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계순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여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김한주는 돌덩이를 씹은 것처럼 툭 불거진 턱으로 물었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자와 관련된 일인가?”
“참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그 여자 아들이 조유신이에요! 그 여자가 사건의 진범이 기철이라며 터무니없는 모함을 하고 있다고요!”
김한주는 이제야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과거에 ‘작은 사고’가 하나 있었는데 진범이 조유신이란 거지? 조유신은 자신을 범인이라고 증언한 기철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거고.’
유신이 들었다면 박장대소를 할 만큼 우스운 과거 조작이었으나 한주는 쉽게 믿었다. 계순에 대해 특별한 신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앞뒤 정황이 워낙 맞아떨어지다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한주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계순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대꾸했다.
“당신이 우리 기철이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당신이 언제 한번 아버지 노릇 한 적이 있어요? 경영학과 대신 미대 갔다고, 유학 보냈더니 2년을 못 채우고 돌아왔다고 완전히 내놓은 자식 취급했잖아요!”
“성에 차지 않는 자식을 꾸역꾸역 회사에 들여앉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
“아뇨, 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이 여편네가 진짜!”
김한주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계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평소엔 고개 한번 제대로 못 들던 계순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처럼 악다구니를 썼다.
“우리 기철이 이제라도 챙겨 줘요.”
“이봐,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누군 지금껏 당신 안 봐주고 산 줄 알아요? 다른 년이랑 뒹구느라 집에 코빼기도 안 비칠 때도, 시댁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 날 외면했을 때도 당신 밥 한 끼 굶긴 적 없었어. 비리로 잡혀 들어갔을 때 옥바라지한 게 누군데!”
김한주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계순의 말이 영 틀린 구석만 있는 건 아니어서 그냥 무시하고 넘길 수도 없었다.
“기사 다 내리고 우리 기철이 경찰에서 빼내 줘요.”
갈지자로 입을 다문 한주를 보며 계순은 자신이 이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알았다.
“기철이는 내가 알아서 단속할 테니까 당신은 조유신이 더는 헛짓거리 하지 못하게 단속해 줘요. 어차피 당신 뒤를 이을 사람은 우리 기철이뿐이잖아요! 그 애한테 오물 튀는 꼴 나는 못 봐요. 알았어요?”
패기 있게 소리친 계순이 도망치듯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이 여편네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쿵.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긴장한 계순이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한주가 따라 나와 머리채라도 잡을 줄 알았던 계순은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겨우 버티고 섰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잘했어, 안계순.”
그녀는 새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문을 외듯 되뇌었다.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했을 말이야. 잘했어. 아주 용감했어, 오늘.”
계순은 하나뿐인 아들 기철을 반드시 한주그룹 회장 자리에 올릴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8년 전 사건이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됐다. 한주의 비서가 과거의 일을 들춘답시고 이리저리 찌르고 다니다가 사건의 진실까지 파헤칠까 두려운 나머지 꼬리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회장실로 뛰어들었다.
‘남편을 속여 넘기는 덴 성공했는데 이제 어쩐다? 그것들부터 처리해야 하는데.’
유신과 선율을 떠올린 계순의 검은자위가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곧 회장 자리에 오를 아들에게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녀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본격적인 광고 제작이 시작되었다.
기획팀과 제작팀을 아울러 총 팀장직을 맡은 선율의 진두지휘하에 팀원 여섯 명을 포함한 일행이 촬영 장소로 출발했다. 유신에게서는 회사 일이 끝나면 따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피곤할 텐데 그냥 쉬지 굳이 왜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선율은 속으로 투덜댔지만 입가엔 슬쩍 미소가 피어났다.
회사 소유의 승합차에 선율을 포함한 일곱 명이 올랐다. 부피가 큰 촬영 장비는 따로 빼서 이동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짐이 많아 승합차는 만석이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스콘을 까서 오물거리는 주희를 필두로 누군가는 차창에 기대어 부족한 잠을 청했고 또 누군가는 이어폰을 끼고 휴식을 취했다. 선율은 달리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오랜만에 머리를 비웠다.
“도착했습니다. 짐 먼저 풀고 촬영 시작하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산장이었다. 보통 촬영을 나가면 촬영 장소 인근의 호텔에 묵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장소가 숲속 한가운데다 보니 마땅한 숙박업소가 없었다. 다행히 이 층짜리 산장이 하나 있어 부랴부랴 예약을 하긴 했지만, 막상 도착한 후 선율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귀곡 산장이야 뭐야.”
가뭄에 콩 나듯 손님을 받는 산장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다. 통나무 사이사이엔 까맣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높은 천장엔 거미줄이 가득했다. 언제 켰는지 까마득할 정도인 벽난로는 아예 켜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전기는 들어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자, 짐 다 풀었으면 장비 세팅합시다! 이제 곧 해 떨어지겠어요!”
선율은 산장에 대한 감상을 뒤로 미루고 세팅을 서둘렀다. 그녀의 한마디에 촬영 감독을 비롯한 제작 인원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의 콘셉트가 어두운 숲을 정신없이 헤치는 장면이 주가 되는 만큼 촬영은 해가 떨어진 후에야 가능했지만 조명과 마이크를 비롯한 장비는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제작팀을 눈으로 좇으며 선율은 스토리보드를 다시 한번 훑었다.
<누군가에 정신없이 쫓기는 한 남자가 숲속 한가운데서 샛노랗게 번뜩이는 흑표범의 눈동자를 맞닥뜨린다. 뒤에서 남자를 집어삼키는 새카만 그림자. 동시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흑표범. 남자가 흑표범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퀵 팬. 장면 전환하여 도로를 질주하는 슈퍼 스터드를 풀 샷으로 잡는다.>
직접 적어 넣은 메모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준비하는 사이 해가 떨어졌다.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선율이 지시를 내렸다.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서 먼저 세 번째 신부터 촬영하는 게 좋겠어요. 배우님은 조금 대기해 주시고 액션 캠 먼저 들어갑니다. 촬영 감독님 스탠바이 되셨죠?”
“네, 준비됐습니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자 한겨울의 추위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선율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완벽히 준비를 마친 그녀가 카메라 영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촬영 감독의 낭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레디,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