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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걸려들었네요.”
유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기철 말하는 거야?”
“네. 지금 선배 집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
몰카범이 제집으로 들어간다는데 두렵다기보단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유신의 계획에 딱딱 맞아 들어 가는지. 유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할 기철을 생각하니 은근한 희열까지 느껴졌다.
“구경할래요?”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신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몸을 숙여 단단히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손길에 선율은 생각했다.
전 남친을 몰카범으로 맞닥뜨리게 된 이 황당무계한 상황이 두렵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 사람 때문이 아닐까.
차 앞을 지나가는 유신의 너른 등이 더없이 든든했다.
* * *
기철이 선율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확히 72시간이 흘렀다.
‘찍혔을까? 뭐 하나는 건졌겠지?’
지금쯤이면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것이다.
조금 전 박 주임으로부터 선율이 베링거 모터스로 출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박 주임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선율의 동선을 파악하기엔 더없이 편리한 인력이었다.
‘그나저나 회의 내용을 보고하려거든 메일로 하지 뭘 회사까지 찾아가? 둘이 진짜 연애라도 하는 거 아니야?’
기철은 몹시 불쾌한 심정을 꾹꾹 누르며 선율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1층의 주인 내외는 벌써 잠들었는지 불이 꺼져 있었고 2층 역시 깜깜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순식간에 담을 타고 넘어갔다.
“휴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에 든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안으로 들어갔다. 몰카를 설치한 곳은 드레스 룸 위쪽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평소 손이 닿지 않아 선율이 거의 열어 보지 않는 곳이었다. 손을 더듬어 카메라를 찾아낸 기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들키진 않았나 보네.”
카메라는 예상대로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뭐가 찍혀 있을까 궁금했지만 여기서 볼 건 아니라서 기철은 서둘러 기척을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음?”
막 현관으로 걸어 나오던 기철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집이 왜 그대로지?’
선율의 집은 카메라를 설치하러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의자에 걸려 있는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도, 카펫에 떨어진 고양이 모양 쿠션도, 반쯤 열려 있는 욕실의 쪽문도.
사람이 생활을 했다면 이렇게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가 없었다. 기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신발장을 내려다보았다.
“신발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카메라를 설치하고 나올 때 선율의 구두 한 짝이 발에 걸리적거리는 바람에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발을 털어 내면서 쓰러졌던 구두 한 짝이 여전히 신발장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설마 2박 3일이나 집을 비웠단 소리야? 박 주임은 그런 얘기 안 했는데?”
묘하게 머리털이 쭈뼛했다.
그 순간 불투명한 창문 밖으로 요란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기철은 고개를 쭉 빼 밖을 내다보곤 식겁해 입을 틀어막았다.
‘헉. 경찰이잖아!’
그냥 순찰을 도는 중이겠지. 경찰 지나가면 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기철은 한참이나 신발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경찰차 사이렌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급기야 아랫집 주인 내외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설마 들킨 건가?’
기철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토록 정확한 타이밍에 경찰이 들이닥친 걸 보면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읽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십중팔구 조유신이겠지.’
씨팔.
기철은 잇새로 거친 욕설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미루어 보아 이미 몰래 빠져나가기는 글렀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기철은 일단 손에 쥔 증거부터 없애야겠다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변기에 넣고 그냥 내리는 게 낫겠지?’
좀 아깝기는 하지만 경찰에게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의 집에 왜 들어왔냐고 물으면 술김에 전 여친 집에 찾아왔다고 둘러대야지. 아, 그러려면 술을 한 모금 하는 게 낫겠는데.
애주가인 선율의 냉장고에는 술이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기철은 냉장고를 열어 소주 한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 후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그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기철의 눈에 경찰과 함께 들어오는 선율의 모습이 보였다.
“동작 멈추고 손들어!”
기철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 당해 보는 굴욕감이 발밑으로 퍼짐과 동시에 손바닥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냉담한 선율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계획이 처음부터 들통났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카메란데.’
그는 소형 카메라를 손바닥에 꾹 말아 쥐고서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움직이지 마!”
경찰이 엄포를 놓았으나 기철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현행범이라 해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설마 총을 쏘기야 하겠어? 빠르게 판단을 내린 그가 얼른 손에 있는 카메라를 변기 안에 떨어트렸다. 그러곤 곧장 물을 내렸다.
쏴아아아아―
손톱만 한 카메라가 뱅글뱅글 원을 그리며 변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됐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를 경찰 두 명이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러나 욕실 바닥에 얼굴을 찍혀 눌리면서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증거를 없앴으니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아까 생각해 둔 시나리오대로 둘러대면 기껏해야 훈방 조치로 끝날 거다. 그렇게 되면…….
“찾아내.”
음?
그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순간 평온하게 이어지던 상념이 깨졌다. 기철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조유신.”
경찰에 제압당해 겨우 고개만 든 기철의 눈에 오만하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기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하듯 씹어뱉었다.
“서울 시내 정화조를 다 들어 엎어서라도 어떻게든 찾아내.”
“예, 알겠습니다.”
그의 수행 비서 두 명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사라졌다.
기철은 유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갑에 묶인 처지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뭐?”
김한주 회장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다시 말해 봐. 기철이가 뭘 어쨌다고?”
그의 앞에 선 비서가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 그게…… 도련님이 주거 침입 및 무단 카메라 설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현행범이라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기사까지 나 버려서…….”
와장창!
김한주 회장이 던진 물컵이 비서의 정수리 위를 스쳐 찬장을 박살 냈다. 비서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고, 고정하십시오, 회장님!”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대체 이 자식은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아닌 밤중에 들어온 소식에 김한주 회장은 대노했다. 광고 회사 그만두고 한주그룹으로 들어온다기에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나 했더니 시작부터 대형 사고를 쳐 버렸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몰카란다. 기업 이미지에 그야말로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스캔들이 아닌가!
“법무팀이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금방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한주 회장의 노여움을 사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서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김한주는 붉어진 얼굴로 비서를 홱 쏘아보았다.
“당장 기사부터 내려. 그리고 경찰청장과 자리 마련해.”
“네! 물론 그렇게 하겠지만 사실 기사를 내리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라서……. 일단 접촉은 시도해 보겠으나 오늘 당장은 힘들 수도…….”
“죽고 싶어?”
“회, 회장님!”
“내 입에서 두 번 말 나가게 하지 마. 기사 쓴 새끼를 잡아 족치든 돈을 먹이든 어떻게든 하란 말이야!”
“옛, 알겠습니다!”
비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김한주 회장 밑에서 가장 오래 버틴 비서였다. 그보다 앞서 일한 비서들이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지, 그 후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잘 알고 있는 그는 뭐라고 항변도 못 하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
“회, 회장님, 하나 더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말해.”
김한주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크게 중요한 사안인지 확신하지 못해 말씀드릴까 고민을 해 봤는데…….”
“사족 덧붙이지 말고!”
“네, 네.”
비서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몰카 피해자는 도련님의 전 애인인 한선율이라는 아가씨입니다. 그런데 경찰에 확인해 보니 신고자 이름은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별다른 사안은 아니라 그냥 넘기려고 하다가 뒷조사를 좀 해 보니까 뭔가 석연치가 않아서요.”
“누군데 그래?”
“조유신이라고, 현재 베링거 모터스 이사입니다. 도련님과는 대학교 동창이더라고요.”
“베링거 모터스?”
김한주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조유신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지만 베링거 모터스는 모를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대부호들이 가장 선호하는 차 1위, 럭셔리 카계의 선두 주자. 전기 자동차 시장에서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신생아 격인 한주 자동차 입장에선 그야말로 태산같이 커다란 존재였다.
‘베링거 모터스 이사라. 그러고 보니 장복수 그 자식이 상무로 앉아 있는 곳이 베링거 모터스라고 하지 않았나?’
김한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왠지 꺼림칙했다.
“조유신이란 놈에 대해 더 알아봐. 기철이와 대학 때 사이는 어땠는지, 현재 베링거에서 어떤 위치에 올라앉아 있는지, 가족 관계며 전부 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계순이 들어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눈치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섰다.
“그놈에 대해선 나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거든요.”
“당신이 그놈을 어떻게 알아?”
김한주가 수상쩍은 눈초리로 계순을 훑어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총천연색으로 차려입은 원피스를 흩날리며 계순이 비서에게 눈짓했다.
“나가요. 내가 얘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