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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유신의 호텔에서 출근한 선율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사려 깊게도 출근 복장까지 준비해 준 유신 덕에 다행히 금요일에 입었던 정장을 다시 입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전부터 일이 너무 많았다.
기획팀 회의에 제작팀 회의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회의의 향연이었다. 그 와중에 마음은 얼마나 심란한지, 새벽녘 보았던 유신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환장할 지경이었다.
‘조유신, 내 머리에서 나가라, 훠이훠이.’
스무 살에 상경한 후 십 년을 넘게 혼자 살아온 탓에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 새벽녘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넋을 놓고 볼 만큼 환상적이었다.
반듯하게 다물린 입술과 그린 듯 뻗은 눈썹, 짙게 음영 진 콧날까지.
한참을 눈에 담느라 출근 시간도 잊었다. 일하는 도중에도 옆에서 자고 있던 유신의 벗은 몸이 자꾸 떠올라 누가 이름만 불러도 화들짝 놀라곤 했다.
“한 팀장님!”
“네? 아, 네!”
“미팅 시작하려고 하는데 회의실로 가셔야죠?”
“네. 지금 가요.”
선율은 민망한 얼굴로 자료를 챙겨 일어났다.
오전 10시에 제작팀과 회의가 있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촬영 장소를 섭외하고 일정을 픽스하기 위해 관계자 모두가 모이는 날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방성범 부장이 전적으로 선율에게 일임한 터라 선율은 최선을 다해 미팅을 주관했다. 제작팀이 엄선해 올린 촬영 장소 중 한 곳을 선정하고 모두의 스케줄을 조율하는 데 걸린 시간이 두 시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사흘 후에 다시 뵙죠.”
스케줄이 빠듯하긴 하지만 다행히 다들 협조적인 분위기라 중지를 모으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조유신 이사님께 보고는 직접 올리시는 거죠?”
“네. 제가 직접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까탈스러운 분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겨우 뺀 스케줄이라, 허허.”
제작 PD가 소탈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접었다. 까다로운 광고주의 경우 제작팀에서 정한 일정을 임의대로 바꾸는 경우가 있어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일쑤였기에 그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까탈스러운 스타일은 아니에요. 제가 잘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율은 그를 안심시키며 회의를 마쳤다.
선율이 베링거 모터스 한국 지사로 떠난 것은 저녁 8시가 지난 무렵이었다. 미리 약속을 해 둔 터라 보안을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 꼭대기 층에 도착하니 그 흔한 그림 하나 걸리지 않은 깨끗한 복도가 나타났다. 이전에 한번 와 본 터라 선율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안에 있나?’
그의 집무실은 흔치 않게 사방이 통창으로 되어 있었다. 보통의 임원실이 두꺼운 문으로 철통 보안을 하는 것에 비해 무척 개방적인 공간이었다. 물론 내부가 기역 자로 꺾여 있어 유신의 책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는 소파에 앉아 있어 모습이 잘 보였다. 어깨에 코트를 걸친 채 수행 비서에게 뭔가를 보고받고 있는 옆얼굴이 조각처럼 잘생겼다.
“근데 정말 조각 같지 않아요?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선율은 제 속마음이 무심결에 튀어나온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감탄사를 뱉은 건 복도를 지나가던 여직원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다른 여직원과 걷고 있던 그녀가 안쪽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 조유신 이사님 얼굴 보려고 일부러 계단 이용하잖아요. 운 좋으면 하루에 세 번도 볼 수 있어요!”
“그 정도 발품은 팔아야 세 번은 볼 수 있는 거군요.”
“진짜 볼 때마다 더 잘생겨지지 않아요? 이사님 보는 맛에 회사 다닌다는 여직원들이 한 트럭은 될걸요.”
“저 포함하면 두 트럭이요, 큭큭. 게다가 능력은 좀 좋아요? 완전 사기 캐릭터라니까요.”
“그게 불만이긴 해요. 아니, 조유신 이사님은 왜 저렇게 빨리 승진하신 거야? 이사 아니라 팀장이나 부장쯤 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각 부서마다 조유신 이사 한 명씩 보급했으면 좋겠다.”
두 여직원이 쿡쿡 웃으며 옆을 지나쳤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고 있던 선율은 두 사람이 완전히 지나친 후에야 숨을 뱉었다.
“스타 나셨네, 아주. 일하라고 이사 시켜 놨더니 왜 얼굴마담을 하고 있어?”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왠지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 저 남자의 품에 안겼던 시간이 다시 한번 파도처럼 일어나 뇌리를 마구 헤집었다.
“누구시죠?”
잠시 자리를 비웠던 비서가 이사실 앞을 알짱거리는 선율을 수상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 저는 바이디오의 광고 담당자 한선율 팀장이라고 합니다.”
“아아.”
“여기 제 명함입니다.”
선율은 얼른 비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비서는 20대 후반의 쌀쌀한 인상의 여직원이었는데 미리 들은 바가 있는 듯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사실 안으로 걸어 들어간 비서가 유신에게 보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얘기가 끝났는지 수행 비서가 유신에게 허리를 숙이고 먼저 나왔고 여비서 역시 시간 차를 거의 두지 않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차는 뭐로 하시겠어요? 제가 지금 퇴근하는 길이라 미리 올려 드리고 가려고요.”
“차는 괜찮습니다.”
“네, 그럼.”
여비서는 칼같이 대답하곤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선율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이사실 안으로 들어섰다. 유신은 집무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를 맞이했다.
“회사까지 찾아와 주니 영광인데요. 호텔에서 볼 건데 그렇게 빨리 보고 싶었어요?”
저 능글맞은 자식.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매번 잘도 생각해 낸다니까.
선율은 그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며 꾸벅 묵례를 했다.
“촬영 날짜랑 장소 나왔습니다, 조유신 이사님. 검토해 보시고 컨펌해 주시면 바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선율이 가방 안에서 A4 여섯 장짜리 보고서를 꺼냈다.
촬영 일자와 장소, 제작 인원 등 촬영 전반에 대한 보고서였다. 유신은 책상에 걸터앉은 채 한 손으로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사흘 후네요.”
“네. 장소는 속초로 결정했습니다.”
“1박 2일?”
“아무래도 밤 촬영이다 보니 하루 가지곤 부족할 것 같아서요.”
“같이 가죠.”
“네?”
선율은 놀란 눈으로 유신을 쳐다보았다. 뭐 제작 PD 말대로 까탈스러운 광고주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질척거릴 수가.
“뭐 문제 있습니까?”
유신은 당당했다.
살짝 내리깐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광고주인데 그런 것도 못 해?
“……그렇게 한가하세요?”
“내가 어딜 봐서 한가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특. 별. 히. 동행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작하는 광고라 본사에서도 관심이 크거든요.”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선율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그럼…….”
“보고 끝났습니까?”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몸을 일으켰다. 선율을 지나쳐 뚜벅뚜벅 입구로 걸어간 그가 촤르륵, 블라인드를 내렸다.
통창이 막히며 집무실은 순식간에 암실이 되었다.
“왜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선율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퇴근 시각 지났네요.”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린 유신이 표범이 기지개를 켜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섰다.
“업무 끝났으니 우리 볼일 볼까.”
“!”
커다란 손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늘씬한 곡선을 드러낸 블라우스 안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야, 조유신……!”
선율은 기함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한 몸집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선율의 허벅지를 번쩍 들어 창가 난간에 앉혔다. 쏟아지는 야경의 불빛이 피부 위를 어지러이 수놓은 가운데 유신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몸을 밀착했다.
“야, 회사에서 뭐 하는 거야?”
“왜요. 어제 선배도 반칙했잖아요.”
“무슨 반칙……!”
“콘돔 챙겨 오는 사이에 잠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똥 매너야, 아주.”
그 일에 대해서라면 억울할 만큼 할 말이 많다. 선율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항변했다.
“깨웠잖아!”
어디 깨우기만 했어? 비몽사몽 정신도 없는데 물고 빨고 핥고, 아주 혼을 쏙 나가게 했지.
살짝 밀어내다가, 신음하다가, 결국 흐느껴 버린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자 뺨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네가 더 똥 매너야. 회사에서 이러시면 정말 안 됩니다, 이사님.”
“내 사무실에서, 내 여자 안으면 안 된다는 법은 못 들었는데.”
“얘 좀 봐. 누구 마음대로 네 여자래? 많이 컸다, 조유신.”
선율은 일부러 유신을 어린 취급 하며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몰랐다. 조유신이 말발로는 어디 가서도 지지 않는 남자라는 걸.
“크기는 예전부터 컸어요. 여러모로.”
그가 귓바퀴를 부드럽게 물었다 놓았다. 허벅지 사이에 밀착된 그의 하체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선율은 뒤로 슬금슬금 몸을 물렸으나 바로 뒤가 닫힌 유리창이라 도망갈 곳이 없었다.
“확인해 볼래요?”
선율은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식겁해서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변태.”
터질 듯 짱짱해진 그의 바지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유신은 파르르 떨리는 선율의 속눈썹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눈을 감으면 나더러 참지 말라는 거지.’
이거 아예 나 잡아 잡숴 하는 거 아닌가.
촉.
물컹한 입술이 선율의 잇새를 침범했다.
“하지 마.”
“그럼 눈이나 감지 말든지.”
유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벌어진 틈 사이로 날숨을 밀어 넣었다. 선율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선 진짜 안 돼. 짐승도 아니고 왜 이래?”
“짐승 아니라고 누가 그래.”
“……나 갈 거야.”
선율이 유신의 허벅지 사이를 무릎으로 확 밀어붙였다. 부지불식간에 공격을 당한 그가 억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와……. 이건 진심인데?”
“당연히 진심입니다. 조. 유. 신. 이. 사. 님! 저 갈 거니까 붙잡지 마세요.”
선율은 톡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같이 가요!”
유신이 절룩거리며 뒤따라왔다. 금세 순한 강아지가 되어 버린 그가 귀여워 선율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맺혔다.
티격태격하며 이사실을 막 나섰을 때였다. 선율이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따라오던 유신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리는 것을 보고 선율이 다가서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