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잔뜩 갈급한 혀가 서로의 안을 더듬었다.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맹렬한 키스에 영혼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
우주에 오롯이 둘만 남은 듯한 아득함 속에서 둘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그의 저돌적인 사랑 앞에서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폭포수에 쓸려 가듯 장벽이 무너지고 오로지 그를 원하는 마음만 남았다. 숨이 목구멍 끝까지 치받아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올라와요.”
유신의 손이 선율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파 아래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몸이 가뿐히 들렸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었다. 유신은 소파 위에 선율을 눕힌 채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흣…….”
단단한 그의 몸이 바로 배 위에서 느껴졌다. 입 안을 파고드는 그의 숨결은 깊고 아찔했다. 오래 참은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조금의 양보도 없이 그가 밀려들었다.
방금 걸친 홈드레스가 거침없이 말려 올라갔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오르자 예민해진 오감이 아우성을 쳤다. 가슴을 간지럽히는 야릇한 느낌에 선율은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았다.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로, 쇄골로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내려왔다. 진득하게 몸에 새겨진 그의 흔적이 늘어날 때마다 선율이 등을 들썩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 중에 드러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선배.”
그의 음성은 아찔하리만치 낮았다.
“앞모습은 오랜만인데.”
귓바퀴를 핥으며 그가 속삭였다.
“여전히 예쁘네.”
낮은 중저음이 피부에 스며들 듯 온몸으로 번졌다. 선율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난번 그의 회사에서 나누었던 정사가 떠오른 탓이다. 잔뜩 날이 선 몸으로 서로를 할퀴어 댔던 그날 밤, 그는 선율을 책상 앞에 세운 채 무자비하게 그녀를 흔들어 댔다. 갈라지는 것 같은 몸의 고통보다 마음이 더 아팠던 날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유신은 급하게 선율을 밀어붙이면서도 배려를 잊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선율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질 때까지 그는 정성을 다해 그녀를 애무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온몸에 도장을 찍듯 그는 빠짐없이 흔적을 새겨 넣었고 선율은 뜨거운 신음으로 화답했다.
“잠깐 기다려요. 콘돔 가지고 올 테니까.”
선율의 허벅지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본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미 근육이 풀려 버린 선율은 대답할 힘조차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유신이 건넛방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잘 뜯기지 않는 비닐을 치아로 뜯어내고 준비를 마친 유신의 눈초리가 삐딱해졌다.
“하아.”
선율은 기절하듯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연일 밤낮없이 일을 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숨도 못 쉬고 헐떡일 땐 언제고 벌써 꿈나라야.
몇 년 동안 한 번 사 보지도 않은 콘돔까지 준비한 성의가 있는데 진짜 너무하네.
유신은 허망한 눈길로 선율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런 것도 로망이라면 로망인데 때리면 좀 맞지, 뭐.”
유신은 그대로 선율의 허벅지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짙은 숨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식을 줄 모르는 그의 단단한 몸이 피부에 닿자 깜빡 잠이 들었던 선율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야……!”
“그냥 재워 줄까 생각도 해 봤는데 확인해 보니 이게 유통 기한이 있어서.”
그가 바닥을 턱으로 가리켰다. 선율의 눈에 찢어진 콘돔 껍질이 들어왔다.
“콘돔에 유통 기한이 어디 있어!”
“한국 들어올 때 사 뒀던 거거든요.”
선배를 다시 만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결국, 우리가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아까우니까 깐 건 일단 씁시다.”
유신은 선율이 뭐라 항변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읏.”
피로가 쌓여 솜처럼 무거웠던 몸에 화르르 불이 붙는 걸 느끼며 선율은 눈을 감았다. 그와 하나가 되어 흔들리는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낯설었다.
* * *
간밤의 일이 꿈처럼 아득했다.
유신은 잔뜩 부르튼 아랫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며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둘 다 소파에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각 방마다 하나씩, 침대가 다섯 개나 있는데 굳이 이 좁은 소파에 끼어 자다니.
유신은 짧게 웃으며 식어 버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함께 잠들었던 선율은 이미 호텔을 나선 상태였다. 새벽 6시에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기계처럼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고 비몽사몽간에도 마음이 짠했다.
“두 시간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피곤하겠네.”
유신은 누운 채로 선율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주스를 갈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셀러리와 사과를 썰어 넣고 믹서에 갈아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복수가 찾아왔다. 빈 냉장고를 채워 주기 위해 양손에 바리바리 반찬을 들고 온 그가 머리에 까치집을 한 유신을 휭 지나쳐 냉장고를 열었다.
“구, 굿모닝.”
유신은 방금 만든 주스를 새로 한 잔 따라 그에게 건넸다.
“어미 새예요? 뭘 이렇게 매주 만들어 와요.”
“내, 내가 안 챙기면 맨날 아침 굶으니까 그러지.”
“안 굶어요. 건강 주스 꼬박꼬박 갈아 마시는데.”
“주, 주스로 밥이 되냐.”
복수가 늦둥이 동생에게 잔소리하듯 유신을 타박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건넨 건강 주스를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개수대에 빈 잔을 가져다 넣고 돌아서던 복수가 문득 유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오, 오늘따라 얼굴이 좋아 보인다?”
“그래요?”
“너 설마?”
유신은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입가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 선율 씨랑 얘기 잘된 거야? 잘했어, 이 자식아! 저, 정말 잘됐다.”
복수는 제 일처럼 기뻐하며 유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퍽퍽 두드렸다.
“아, 형! 엉덩이는 좀!”
“이, 인마! 좋아서 그러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은 하지 맙시다. 내 엉덩이가 왜 좋은데.”
“어, 엉덩이가 좋다는 게 아니라 둘이 잘된 게 좋다고!”
유신은 질겁하며 도망쳤다. 복수는 꼬리잡기를 하듯 넓은 응접실을 몇 바퀴나 돌며 유신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식, 더, 더럽게 빠르네.”
유신은 씩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형도 평소에 운동 좀 해요. 연애도 좀 하고.”
“연애?”
“나이가 오십인데 변변한 연애 한번 안 하고 완전 헛살았네.”
복수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 내 주제에 무슨 연애야.”
그는 어릴 때부터 앓은 말더듬이 증세 때문에 지금껏 연애는커녕 고백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여자 앞에만 서면 더욱 심해지는 증상으로 인해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살았다.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나이가 오십쯤 되니 그 외로움에도 익숙해져서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은 딱 끊은 지 오래였다.
“형이 뭐가 어때서? 머리 좋아, 능력 좋아, 돈도 잘 벌어. 얼굴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뭐 아주 못 봐 줄 정도는 아니니까.”
“이, 이 자식이 형을 갖고 노네!”
“갖고 노는 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러지. 나만 행복해져서.
유신은 뒷말을 애써 삼켰다. 그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해서 복수는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그, 그래. 노력은 해 볼게. 나, 나 같은 말더듬이를 누가 좋아할지 모르겠다만.”
“형.”
유신은 깊은 눈동자로 복수를 응시했다.
“사랑에 빠지는 데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나 봐요. 편부모에, 대학교 중퇴에, 성격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좋아해 주잖아.”
“그, 그걸 위로라고 하냐!”
탈우주급 얼굴을 하고 그딴 말을 내뱉으니 퍽이나 위로가 된다, 자식아.
복수는 더욱 우울해졌다.
“그나저나 김기철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그가 화제를 돌렸다.
“혼자 열심히 삽질 중이죠.”
유신은 어제 선율의 집 앞에서 그를 목격했으며, 아무래도 선율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 때문에 선율을 호텔로 데려왔으며, 선율의 집 앞은 그의 수행 비서가 24시간 대기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무, 문형주 같은 꼴통이 또 있었네. 모, 몰카 안 찍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그것도 정신병의 일종이라 안 찍으면 몹시 불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문형주 말로는 직장에서 잘린 느낌이라던데? 아무튼 불을 지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됐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일을 크게 벌려 볼 생각이에요.”
유신이 간밤 내내 계획한 것을 복수에게 정리해 주었다.
현재 선율의 집 앞은 그의 수행 비서와 경호원 한 명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말이다. 이삼일 안에 김기철은 분명 다시 나타날 테니, 그가 집 안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는 순간을 노리라고 지시를 내려 두었다.
“동시에 경찰에 신고도 들어갈 거예요. 현장을 덮쳐야 하니까.”
“조, 좋은 생각이야. 쉬쉬할 게 아니라면 아예 빠져나가지 못하게 덫을 치는 게 좋겠지.”
“언론에도 터트릴 생각입니다.”
“어, 언론에?”
“기자 한 명 섭외해 뒀어요. 경찰 쪽과 관계가 있는 인터넷 기자라 현장을 덮치는 즉시 기사를 쓸 겁니다. 그럼 김한주 회장 귀에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겠죠.”
유신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복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기, 김한주 회장 불같은 성격에 가만있지 않을 텐데.”
김한주 회장 밑에서 십수 년을 일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성격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항상 저울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추가 기운다면 사람 목숨 하나쯤 거두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신은 이미 모든 것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예. 아마도 기사는 금방 내려가겠죠. 김한주가 협박이든 회유든 뭐든 할 테니까. 아마 돈을 많이 써야 할 거예요.”
“으음.”
“대신 김기철에게 불똥이 튀겠죠. 부친의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사고를 치게 되었으니 김기철은 아주 초조해질 겁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위험한 유혹을 이기지 못할 만큼.”
기철을 위해 준비한 독 사과를 떠올리며 유신이 씩 치아를 드러냈다. 그건 바로 얼마 전 주희에게 보여 준 적 있는 베링거의 다음 시즌 디자인이었다. 유신이 뼈를 갈아 창조한 그것은 가히 역작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디자인이었다. 궁지에 몰린 기철은 아마 덥석 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물어보려 했는데. 그, 그냥 주희를 시키는 게 어떨까? 단순히 디자인을 노출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면 괘, 괜찮지 않을까?”
“저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너무 위험해요. 우리 쪽에서 디자인 도용 문제를 터트리는 순간 주희가 우리 쪽 사람인 걸 김기철이 알게 된다는 뜻이니까.”
“음.”
“김기철은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이에요. 주희에게 해코지를 할지 몰라요.”
“그, 그러면 안 되겠네.”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유신이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그 얼굴에 복수는 속이 꽉 차오르는 걸 느꼈다.
교도소에서 만나 여태껏 한 번을 편하게 웃는 꼴을 못 봤는데.
활기를 되찾은 유신을 보니 이제야 좀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