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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37)화 (3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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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빛에 장난기는 조금도 없었다.

선율의 가슴이 쿵쿵 진동을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아까부터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참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티셔츠를 걸치고 있지만 그의 몸매마저 예사롭지는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가슴은 남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조각같이 섬세한 이목구비는 섹시했다.

잠시라도 넋을 놓으면 혼을 쏙 빼 갈 정도로 아찔한 유혹이었다.

“꿈 깨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분명 말했잖아.”

선율은 혼란한 정신을 꽉 붙잡았다.

“이삼일 신세 진다고 했지, 누가 너랑 잔대?”

“나 역시 들이대지 않겠다고 대답한 적 없어요.”

유신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큰 키에 선율의 정수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의 품에서 물씬 풍기는 보디 워시 향기에 잠식될 것 같았다.

“선배는 늘 나에게 절박한 사람이었고.”

유신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선율을 내려다보았다.

“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만큼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에요.”

털끝 하나도 닿지 않았으나 이미 그의 품 안에 갇힌 듯 선율은 온몸이 떨려 왔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허리를 숙여 선율과 눈높이를 맞춘 유신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지금 내가 꼬시면, 넘어오나?”

오만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얘가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나, 나 이 집에서 멀쩡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더욱 혼란스러운 건 이대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제 마음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선율은 복잡한 머리를 내저으며 겨우 상념에서 벗어났다.

“여기 방 많지? 제일 작은 방 내가 쓸게.”

“자려고?”

단칼에 거절당한 유신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더 마음 약해지기 전에 선율은 얼른 등을 돌렸다.

“너도 잘 자.”

* * *

막상 누웠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최근 몰아닥친 여러 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 뇌 속에 똬리를 튼 기분이었다.

‘김기철 진짜…… 어떻게 내 집에 또다시 카메라를 설치할 생각을 하지? 구제 불능이네, 정말.’

유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집에서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과 반년이나 사귀었다니 돌이켜 생각해도 끔찍했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남자였다. 8년 전 그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죄의식 없이 선율의 근처를 서성였다는 게. 몇 해 전 바이디오에 입사했을 때 놀란 반응을 보이는 선율과 달리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었다.

[여기에 너 근무하는 거 알고 왔어. 다시 보니 반갑다, 선율아.]

지금 생각해 보니 애초에 그는 선율을 노리고 입사한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부친이 운영하는 한주그룹을 놔두고 굳이 이름도 없는 광고 대행업체를 선택할 이유가 없으니까.

사귀는 동안 참 다정했기에 감쪽같이 몰랐던 그의 본모습.

그의 모친이 선율에게 한바탕 퍼붓기라도 하는 날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그를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내게 그렇듯 모친에게도 그럴 거라고, 그래서 모질게 잘라 내지 못하는 거라고. 두 사람 사이에서 너도 참 힘들겠구나, 안쓰러운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모든 건 가식이었다. 그에게 농락당했던 세월을 떠올리니 소름이 와락 끼쳤다.

기철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신의 얼굴이 그려졌다.

좋은 사람이길 원했던 기철과 달리 기꺼이 천하의 쌍놈이 되는 길을 택했던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8년간 수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의 모든 선택이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선율은 그가 원하는 마음 한 자락 내주지 못했다.

왜일까.

미워한 순간조차 그를 보면 가슴이 떨렸는데.

손을 뻗어 만지고 싶고,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고, 지금도 그의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가 내밀어 온 손조차 잡지 못하는 저 자신이 답답했다.

‘무서워서 그래. 조유신을 떠올리면 과거의 기억까지 함께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선율은 오랜 고민의 답을 그렇게 내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선율에게 트라우마 같은 존재였다. 8년 전 그날 이후 선율은 남자를 쉽게 믿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가 없었다.

끈질긴 기철의 고백을 받아 준 후로도 마음마저 주지는 못했다. 또다시 배신당할까 두려웠으니까. 뜨거운 사랑은 결국 연기처럼 가벼웠음을 유신으로 인해 배웠으니까. 그때의 아픔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했다.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술 한 잔이 간절해지는 밤이다.

선율은 아까 유신이 꺼냈던 와인을 떠올리며 살금살금 응접실로 나갔다.

‘헉.’

반쯤 비운 와인이 놓인 테이블 건너에 유신이 잠들어 있었다.

‘얘는 그 많은 방 놔두고 왜 소파에서 자는 거야?’

긴 다리 탓에 발목이 소파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게 안쓰럽기까지 하다. 위아래로 고르게 들썩이는 그의 가슴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율이 방에서 얇은 이불을 가지고 나왔다.

“어휴, 이 불쌍한 중생.”

번쩍번쩍한 대궐에 살면 뭐 하나.

푹신한 침대 놔두고 결국엔 소파에서 새우잠 자는 걸.

가슴 위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곤 막 돌아서던 선율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늘 장갑을 끼고 있던 그의 손에 지금은 아무것도 걸쳐진 것이 없었다. 선율은 머뭇거리며 다가가 가만히 소파 아래 쪼그려 앉았다.

“흉터가 제법 크네.”

소파 밖으로 튀어나온 그의 왼손 검지 위쪽부터 손목 아래까지 화상 흉터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지만 당시엔 꽤 큰 화상이었을 것 같다.

넘어지는 황준기를 붙잡으려다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시뻘건 숯불 구덩이에 손이 닿았으니 얼마나 뜨거웠을까 싶다.

“많이 아팠겠다.”

선율은 가만히 손을 들어 유신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이 흉터에 힘겨웠던 그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나로 인해, 나를 지키려고.

유신의 손등을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불현듯 멈췄다. 유신이 그대로 선율의 손목을 감아쥔 것이다.

“응. 많이 아팠어.”

유신은 오른손을 이마에 얹고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선배 불러냈던 날.”

“……응.”

“열여섯 시간을 기다리는데 손등에서 계속 진물이 나더라. 병원에 갈 시간도 없어서 대충 붕대로 감아 놨는데 밤이 되니까 너무 아픈 거야.”

그의 숨소리는 너무 평온해서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가 눈을 감고 있으니 선율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대로 손목을 잡힌 채 앉아 있었다.

“진짜 아팠어.”

조용한 밤은 평온을 선사했다. 유신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가슴에 격랑이 아닌 미풍이 일었다.

“미안해.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꾸 그 생각이 들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어둠 속에서 유신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듯 보였다.

“난 선배 만나서 너무 좋은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파 아래에 앉은 선율과 눈을 맞추며 그가 가만히 손을 이끌어 제 가슴에 댔다.

“이렇게 가슴도 뛰어 보고 미치게 그리워도 해 보고.”

쿵쿵, 쿵쿵.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연주처럼 선율의 손바닥을 울렸다.

“선배 곁으로 돌아오려고 나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안다.

그가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타고난 재능을 명패로 만들기 위해 넌 얼마나 치열했을까.

“안 받아 주면 어떡하나, 불안해질 때마다 그 생각 했어.”

“어떤 생각?”

“선배랑 보냈던 밤이요.”

유신이 뜨거운 눈으로 선율을 응시했다. 낯이 달아오를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았던 것만큼 선배도 좋았었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직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다.”

“…….”

“그날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선율은 태어나서 지금처럼 가슴이 떨려 본 적이 없었다. 그와 첫 키스를 했을 때도, 8년 만에 돌아온 그를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한 사람의 진심이 가진 힘은 그렇게나 강렬해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선율은 진심을 토해 냈다.

“나도 좋았어.”

아주 오래전에 들려주어야 했을 그 이야기를.

“8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정도로.”

이제야 너에게 전해 본다.

유신은 먹먹한 눈으로 선율을 바라보았다. 오늘을 위해 참아 왔던 수많은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만난 걸 후회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한심하던 때가 있었고, 모든 걸 돌이키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또다시 이렇게 나는 당신을 찾을 수밖에 없어. 서로를 간직한 마음이 너무나 같기에 억울할 필요조차 없었던 거다.

“……그런 것 같네.”

“응?”

선율은 그의 시선이 미끄러진 목 언저리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러곤 이내 그의 시선이 의미한 바를 알아챘다.

항상 옷 안에 감추고 다녔던 목걸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이걸 아직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목걸이를 쥐었다.

“이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둘러대려던 선율은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맞아. 너 떠난 후로도 한 번도 몸에서 뺀 적 없어.”

그건 유신이 고백한 날 선물한 8만 원짜리 싸구려 목걸이였다. 그마저도 자투리 용돈을 두 달이나 모아 어렵게 산 것이었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하고 다니기엔 참 볼품이 없을 만큼 단출한 목걸이였다. 그걸 그토록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나?”

유신의 눈동자가 점점 뜨거워졌다.

“아마 네 해석이 맞을 거야.”

두 사람은 이끌리듯 서로의 목을 휘감았다. 달아오른 입술이 샘물을 찾아 서로에게 얽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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