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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36)화 (36/85)

36

기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선율의 집 앞에 도착했다.

‘박 주임한테 듣자니 아직 퇴근 안 했다지? 그럼 30분 정도는 여유가 있겠네.’

그는 손에 쥔 클러치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불 꺼진 선율의 자취방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의 가방엔 지름이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소형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아는 업자에게 부탁해 특별히 구한 것이었다.

‘어디다 설치하면 좋을까? 저번에 가 보니 화장실은 숨길만 한 데도 별로 없는 것 같던데…….’

그는 선율의 집에 몰카를 설치할 작정이었다.

솔직히 성적인 욕망 같은 건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계정이 폭파당하고 비밀 금고가 털린 후로 기철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제가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유신에게 약점을 잡혀 버렸으니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이번 건 걸리면 진짜 엿 되는 건데. 진짜 안 걸리는 거 맞겠지?’

카메라를 건네준 업자 말로는 카메라 크기가 워낙 작아 잘만 숨기면 눈에 띌 염려가 없다고 했다. 배터리도 충전 없이 사흘은 충분히 버틴다고, 즉 설치 후 사흘 이내에 빼내기만 하면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장한 손에선 연신 땀이 배어났다. 기철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곤 도둑고양이처럼 담을 넘었다.

* * *

꺾인 골목 안으로 차를 옮긴 유신은 새카만 눈으로 기철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가방 속에 든 물건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꼴을 보니 대충 뭔지 짐작이 갔다.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거면 답이야 뻔하지.’

이걸 집요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저질스러운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머릿속에 오직 몰카 생각밖에 없는 변태 아닌가!

‘저걸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하필 또 선율을 노린다는 게 무척 화가 나면서도 심장은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가뜩이나 흠 많은 놈이 제 손으로 헛짓거리까지 해 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일을 한번 크게 키워 봐?’

잔혹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

저 멀리 선율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유신이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슈퍼 스터드의 샛노란 라이트가 눈앞을 빛내자 선율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조유신?”

골목 한가운데에 나타난 슈퍼 카의 위용에 놀란 것도 잠시, 선율이 피곤한 눈으로 물었다.

“어디 가? 나 만나러 온 거 아니야?”

“호텔이요.”

유신이 대꾸했다.

선율은 내심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집 앞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던 남자가 그새를 못 참고 먼저 가 버린다고 하니 어딘지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매번 기다리게 하기 미안해 30분이나 일찍 앞당겨 퇴근했는데 벌써 가 버린다는 거지?

“그래, 잘 가.”

선율은 새초롬하게 인사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유신이 부드럽게 손목을 잡아끌었다.

“같이 가죠.”

“됐어. 내가 왜.”

“지금 선배 집에 김기철 있어요.”

“!”

그런 얘길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선율은 그의 말뜻이 잠깐 해석되지 않아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그 자식이 내 집엔 왜?”

“가서 물어볼래요?”

선율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집을 올려다보았다. 집 안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유신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자세한 건 가면서 얘기하죠. 괜히 마주쳤다간 내가 사고 칠 거 같아요.”

선율은 그제야 유신의 눈동자가 펄펄 끓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지금 부단히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말했다.

“그래, 호텔로 가.”

나도 지금 그 자식 마주치면 죽여 버릴 것 같거든.

* * *

유신이 묵고 있는 루미르 호텔은 72층짜리 초호화 호텔이었다.

그중 그가 묵고 있는 곳은 장기 투숙객을 위한 펜트하우스였다. 베링거에서 한국 지사로 그를 파견하면서 제공한 곳인데 그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엔 기간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와……. 돈이 좋기는 좋네.’

선율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속으로 감탄했다.

대리석이 쫙 깔린 바닥에, 높이 솟은 천장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 통창 바깥으로 보이는 야경과 야외 수영장까지. 정말이지 혼자 지내기엔 아까울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광고 촬영 현장을 다니다 보면 보통의 사람들이 TV에서나 보는 곳들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이곳은 선율이 보았던 어떤 집보다 고급스러웠다.

“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차 안에서 대충 기철이 하려는 짓을 전해 들은 선율이 치를 떨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집에 들어가 씻고, 옷을 벗고, 잠을 청했을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들어요.”

유신이 와인 셀러에서 와인과 잔 두 개를 꺼내 왔다.

“클러치의 크기로 미루어 보아 큰 카메라는 아닐 거예요. 상식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설치하려면 초소형 카메라에 가깝다고 봐야죠.”

“그렇겠지.”

“알아보니 초소형 카메라의 경우 배터리의 크기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연속 촬영을 할 경우 이삼일 안에 배터리가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몰카 주제에 전기를 연결할 수도 없을 테고, 선배 집에 계속 두었다간 언제 발각될지 모르니 위험 부담이 너무 크죠. 난 김기철이 이삼일 후에 반드시 찾으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선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네.”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예요. 지금 들어가 봤자 아무것도 찍힌 게 없으면 어떻게든 발뺌할 게 뻔하니까.”

“네 말은 김기철이 카메라를 회수하러 오는 타이밍을 노리자는 거네?”

“빙고.”

선율은 조금 놀란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 와중에 그런 생각까지 할 수가 있지?’

보통 사람 같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 몸싸움을 벌였을 거다. 그러나 유신은 당장이라도 엎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끈질기게 참아 내고 한 수 뒤를 내다보았다. 생각으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쉽게 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참 치밀한 남자라는 걸 선율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런데 선배,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그 자식이 선배 집엔 어떻게 들어간 겁니까?”

“!”

유신이 따라 준 와인을 막 한 모금 머금었던 선율은 하마터면 입에 든 것을 뿜을 뻔했다.

“비밀번호 알려 줬어요?”

선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철과 사귄 지 4개월쯤 지났을 때였나. 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 준 적이 있었다. 맘껏 드나들라고 그런 것은 아니고, 회사 야유회를 가는 길에 선율이 챙기기로 한 물건을 잊은 바람에 오후에 출발한 기철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 후로 비밀번호를 바꾼다는 걸 깜빡했다.

“그래서 비밀번호 알려 준 거야. 우리 집에서 자거나 그러진 않았어.”

“…….”

“집주인 아주머니랑 우리 아빠랑 개인적으로 통화하는 사이거든? 집 안에 남자 들였다가 아빠 귀에 무슨 소리 들어갈 줄 알고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

선율은 변명하듯 그 일을 주절거렸다. 그러나 의심쩍은 유신의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날 일을 세세하게 설명하던 선율은 문득 이 상황이 좀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내가 이걸 왜 변명하고 있는 거지?’

막말로 애인도 아니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데 전 남친이랑 동거를 했다 한들 무슨 죄가 된다고 이렇게 대역 죄인 취급을 하느냔 말이다.

선율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아, 됐어. 믿거나 말거나 네 마음대로 생각해!”

톡 쏘아붙인 그녀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물을 적시자마자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이 없잖아? 어떡해!’

온종일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엔 찝찝하고 달랑 타월만 두르고 나갈 수도 없고.

머리며 몸이며 이미 물이 흥건한데 이걸 어쩌나.

입었던 옷을 다시 주워 입을 생각을 하니 샤워를 하면서도 찜찜해서 선율은 얼른 수전을 잠그고 나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 욕실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옷가지가 들어왔다. 펴 보니 여자 옷이었다. 깨끗하게 다림질된 아이보리색 홈드레스를 보며 선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나 입으라고 가져다 놓은 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지척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맞아요.”

선율은 화들짝 놀라 옷으로 몸을 가린 채 얼른 욕실 문을 닫았다.

“너 왜 거기 있어? 좀 멀리 떨어져!”

“옷 두고 나가려는 중이었어요.”

참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이러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 같잖아?

과민 반응을 해 버린 선율은 벌게진 얼굴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홈드레스만 있는 줄 알았는데 펴 보니 깔 맞춤한 속옷까지 예쁘게 놓여 있었다.

‘사이즈도 딱이네.’

새것처럼 빳빳한 속옷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홈드레스까지 걸친 그녀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유신도 어느새 씻고 나온 듯 소파에 앉아 있는 얼굴이 촉촉했다.

“사이즈 맞아요?”

“응, 대충.”

“다행이네.”

유신의 시선이 흐르듯 선율의 몸매를 훑었다.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홈드레스가 선율의 늘씬한 곡선을 아찔하게 드러냈다.

‘저게 저렇게 섹시한 옷이었나.’

펼쳐 놓았을 땐 그냥 펑퍼짐한 원피스인 줄 알았는데 선율이 걸치니 그리스 여신상의 드레스처럼 아름다웠다.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유신에 무척 쑥스러워진 선율이 아무 말이나 뱉었다.

“너야말로 집 안에 여자 옷은 왜 있는 건데?”

유신은 그윽한 눈빛으로 선율을 응시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거든요.”

그의 시선은 깊고 짙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유신은 앉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선율은 그가 제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날……?”

“선배가 내 집에서 씻고.”

“…….”

“나랑 같이 자는 날.”

그의 눈빛이 뜨거웠다.

온몸이 타들어 갈 것처럼.

당황한 선율의 목덜미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누가 너랑 같이 잔대? 방이 다섯 개는 될 것 같구먼, 무슨!”

“어쨌든 절반은 성공했네요. 내 집에서 씻긴 했잖아.”

그의 입꼬리가 유려하게 말려 올라갔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유신이 턱을 조금 들어 나른한 눈으로 선율을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 아래 짙은 눈썹이 그린 듯이 또렷했다.

“나랑 잘래요?”

쿨럭쿨럭!

선율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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