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35)화 (35/85)

35

피 튀기는 경쟁 PT의 최종 승리자가 결정되었다.

“양 팀장, 그리고 한 팀장. 마지막까지 수고했어요. 최종 PT는 조유신 이사님의 특별 배려로 직원 투표로 결정을 했습니다. 어디 보자……. 투표수가 제법 차이가 나네요.”

방성범 부장이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엔 수십 개에 달하는 투표용지가 차곡차곡 개표되어 있었다.

“1팀의 캐치프레이즈인 ‘가장 조용한 질주’가 열두 표, 2팀의 캐치프레이즈인 ‘신차가 아니다. 신무기다.’가 육십칠 표를 받았네요.”

“헉!”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표 차이에 양 팀장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상 그와 한 팀이었던 팀원들의 표를 제외하면 열 표도 채 받지 못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2팀의 광고가 최종적으로 선정되게 되었습니다. 2팀은 제작팀과 긴밀히 협조해 최고의 광고를 제작해 주시고요. 조유신 이사님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고객의 니즈에 120퍼센트 부응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주기를 당부드립니다.”

됐다!

선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 기뻐 앞구르기로 회의실을 한 바퀴 돌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책상 아래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보며 유신이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직원들로 하여금 직접 광고를 선정하게 한 건 선율을 위한 배려였다. 얼마 전 기철과 유신이 한판 붙은 일로 사내에 그녀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조유신 이사가 공정하게 광고를 뽑겠다고 했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되겠냐. 두고 봐라. 경쟁이고 나발이고 틀림없이 한 팀장 의견이 뽑힐 거다.’

만약 선율이 최종 승자로 낙점되게 되면 실력이 어쨌건 간에 백으로 뽑힌 거라고 수군댈 게 뻔했다. 해서 유신은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도록 최종 PT의 결과를 공개 투표에 붙였다.

약 30초 분량의 영상을 보고 전 직원이 직접 투표를 한 결과 선율의 작품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했다. 유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합니다, 한선율 팀장님.”

선율은 그가 내민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의 광고로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하죠.”

적잖이 실망한 양 팀장과 그의 팀원들이 우르르 회의실을 나가 버리고 방성범 부장과 유신도 따로 할 얘기가 있는 듯 나란히 나서자, 넓은 회의실에 남은 건 선율과 주희뿐이었다.

“…….”

“…….”

평소 같으면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을 그녀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준기의 동생인 걸 알고 나니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제 과거를 다 알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일 년을 넘게 곁에 머물렀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아, 어색하다, 어색해.’

어색한 건 주희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프로젝터와 노트북 선을 정리하며 그녀는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말을 걸어? 말아?’

그때였다.

코앞으로 선율의 손바닥이 쑥 들어왔다.

주희가 고개를 들자 양손을 크게 펼친 선율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이파이브 하자고요?”

끄덕끄덕.

조금 부끄러운지 양 뺨이 빨개진 선율의 모습에 주희는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아, 뭐예요, 팀장님! 지금 하이파이브 가지고 되겠어요?”

짝! 짝! 짜악!

주희는 선율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세 번 부딪쳤다. 그러곤 선율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팀장님. 나하고 하이파이브 해 줘서.”

“주희 씨.”

“나 미웠을 텐데…… 하이파이브도 해 주고…… 히잉.”

“내가 주희 씨를 어떻게 미워해요. 왜 미워해.”

주희는 순간적으로 와락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먼저 말을 걸어 준 선율이 고마웠다. 제 사정이야 어쨌든 따지고 보면 일 년을 넘게 속여 온 거 아닌가. 그럼에도 저를 밀어내지 않아 줘서, 기쁨을 나눠 줘서 고마웠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어요.”

“……팀장님도요.”

둘은 말없이 서로를 보듬어 주었다. 주희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선율의 어깨를 뜨겁게 적셨다.

* * *

잠시 후.

제작팀에 자료를 전달한다며 주희가 먼저 나가고 선율이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자리가 깨끗이 정리된 걸 확인하고 회의실을 소등하고 나오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 비상계단 문이 쓱 열리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엄마얏!”

어둠 속에서 뻗어진 손이 선율을 끌어당겼다. 부지불식간에 끌려간 선율이 작게 비명을 질렀으나 상대는 그녀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런 데 숨어서 뭐 하냐고 항변하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이 그녀를 막았다.

익숙한 향기. 뺨에 닿은 가죽 장갑의 감촉.

놀란 가슴에 안도가 찾아오기도 전에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깊게 베어 문 유신의 입술이 한없이 달콤하게 선율의 안을 침범했다.

조용한 비상계단에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가득했다. 홀린 듯 입을 벌렸던 선율은 그의 키스가 점점 대범해지자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유신은 선율의 팔을 잡은 채로 비스듬히 시선을 꺾었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그의 입술이 위험하리만치 섹시했다.

“발정 났나 봐요. 미팅 내내 선배 입술만 봤어.”

돌려 말하지도 않는다. 눈빛으로, 목소리로, 들끓는 심장의 박동으로 그는 말하고 있었다.

너를 원한다고.

도발적인 그의 눈빛에 선율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랑 나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회사에서 이런 짓 할 사이는 더더욱 아니거든?”

“그럼 우리 사이가 뭔데요.”

그녀가 멀어진 만큼 유신이 다가섰다.

“가족 아니고 친구 아니고 사제지간 아니고.”

그가 립스틱이 번진 선율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좋으면 키스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꿀꺽.

선율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듣고 보니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다. 열 살짜리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끼리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키스뿐이야?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율은 덜컥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8년 사이 하릴없이 패어 버린 고랑은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깊었다. 그를 좋아한 만큼 상처가 컸기에 내내 원망하고 미워했었는데. 그 복잡한 감정이 실 끊어지듯 툭 끊어지지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해.”

유신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난 8년이나 참았어요.”

“너한테 남다른 감정이 있는 거 사실이야. 인정해.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가 없어. 너만 보면 자꾸 미안한 생각부터 드는데…….”

“미안하면 갚으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그는 선율을 내려다보며 당당히 요구했다.

“갚아요. 이자 쳐서.”

“날강도야?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란 소리야?”

“준다면 마다하지는 않을게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지난 8년간 그에게 빚진 것을 갚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갚을 수나 있을까. 나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탄 그의 인생을 무슨 수로 갚겠어.

“선배가 원하는 거리라는 거 나 지킬 자신 없어요. 아니, 못 지켜.”

유신은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선율의 아랫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재주껏 피해 봐요. 집념과 끈기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보여 줄 테니까.”

하아.

그제야 숨이 트인 선율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것치곤 그 방면으론 참을성이 되게 없는 것 같다.”

톡 쏘아붙이는 말에 유신이 씩 미소를 지었다.

“알면 좀 받아 주든지.”

또다시 입술을 훔치러 다가오는 그를 피해 선율이 얼른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불리할 땐 도망치는 게 상책이야.

문이 닫히는 순간 잠깐 돌아본 선율의 눈에 유신의 입 모양이 보였다.

‘오늘 잘했어요.’

그제야 선율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 * *

본격적인 광고 제작이 시작되었다.

선율과 주희가 기획한 광고를 찍기 위해 제작팀의 윤정서 PD와 김학렬 촬영 감독이 합류했다.

모터쇼까지 남은 날짜는 약 사십여 일.

기한이 촉박한 만큼 밤낮없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선율은 거의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다. 주말 출근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얼굴 볼 시간도 없네.’

유신은 그 점이 무척 안타까웠다.

광고주로서 볼 명목을 만들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가뜩이나 바쁜 그녀를 오라 가라 할 수가 없었다. 광고 제작 시 발생하는 트러블이나 요청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직접 보고하라고 했지만 촬영이 막 시작된 단계라 보고랄 것도 없었고.

그러니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유신은 선율의 집 앞에서 두 시간 넘게 죽치는 중이었다.

“빨리 와라, 선배.”

그가 중얼거리며 시트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막상 그녀를 만난다 해도 길어야 십 분쯤 얘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최근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던 데다 갑자기 일이 몰아치는 바람에 그녀가 무척 피곤해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사이에 가뜩이나 살도 없는 뺨이 말라붙은 걸 보며 유신은 괜히 그녀에게 광고를 맡겼다고 후회했다.

“보고 싶어 죽겠네.”

유신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긴 기다림에 비해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매일 반복되는 기다림의 시간이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적어도 선율은 그를 내치지 않았고, 짧게나마 얼굴을 보며 웃어 주기도 했으니까.

8년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는 껌이지.

유신은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하기만 했다. 그의 옆에는 선율에게 줄 따뜻한 허브티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진즉에 온기가 사라진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새 걸로 다시 사 올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저 밑에서 오르막을 올라오는 인영이 보였다.

선율인가 싶어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유신의 눈빛이 살벌하게 굳은 건 그때였다.

“저 새끼가 여길 왜 와.”

티 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타난 것은 바로 기철이었다.

유신은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헤드라이트를 끄고 조용히 차를 뒤로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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