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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34)화 (3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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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제안에 선율이 눈을 크게 떴다.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유신이 짧게 웃었다.

“누가 잡아먹는대요? 정 불안하면 같이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런 거지.”

그쪽도 불안한 건 매한가지인데.

선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만 있어도 온종일 긴장감을 주는 남자와 함께 산다니, 말도 안 돼.

“이건 같이 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정신적인 문제를 몸으로 극복할 건 아니잖아.”

“몸으로 극복한다라. 그거 되게 음란하고 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것 봐! 무슨 말을 해도 그런 쪽으로 받아들이잖아! 동거인이 생긴다고 해서 불안함이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였어!”

“발끈하는 것 좀 봐.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선배는 화낼 때가 제일 귀엽다니까.”

유신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선율은 곱게 눈을 흘기며 그의 옆구리를 팍 찔렀다. 이러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넌 장난기가 많았고 난 아주 사소한 장난에도 열과 성을 다해 발끈했었지.

“아무튼 잘 생각해 봐요. 마음 바뀌면 언제든 얘기하고.”

“그럴 일 없어.”

“생각은 좀 하고 대답해요.”

“했어. 아주 깊게.”

뭐가 그리 웃긴지 유신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렇게 웃어 본 게 무려 8년 만이라는 걸.

* * *

기철의 퇴사일이었다.

계속 선율의 곁에 얼쩡거렸다간 좋은 꼴 못 볼 거라는 유신의 협박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표를 쓴 그는 송별회도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팀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퇴사하셔도 종종 연락해도 돼요?”

박 주임이 서운한 눈초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남몰래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걸 아는 기철은 마지막까지 젠틀한 모습을 가장하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럼요. 일하다가 막히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요.”

관대한 반응에 용기를 얻은 박 주임이 짐을 싸는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사는 갑자기 왜 그만두시는 거예요? 한선율 팀장님 때문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소문이 쫙 돌았거든요. 김 팀장님이 한 팀장님한테 차여서…… 아, 죄송해요. 한 팀장님과 헤어져서 상심이 크셨다고요.”

기철은 속으로 이가 바득 갈렸다. 그러나 겉으론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상냥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사적인 일로 공적인 결정을 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요.”

“맞아요! 팀장님이 그러실 리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려고요.”

“아버지 회사면…… 한주그룹이요? 우와, 대박.”

기철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도 나이가 있으시니 이제 저도 그룹 물려받을 준비해야죠.”

“우와……. 그럼 곧 회장님 되시는 거예요?”

“그렇게 서두르진 않을 거예요. 기본부터 차근차근 후계자 코스를 밟아 갈 예정이거든요.”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기철이 김한주 회장의 외동아들이란 게 새삼 실감이 난 탓이다.

사내에 쫙 퍼진 스캔들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어쨌건 그가 김한주 회장의 아들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이렇게 갑작스레 퇴사를 한다 해도 걱정할 거 하나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럼 전 짐을 좀 더 싸야겠어요. 박 주임, 작별 인사는 이쯤 하고 일 보세요.”

“네…….”

박 주임이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기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곤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름 몇 년을 일한 직장이라 싸도 싸도 계속 짐이 나왔다. 커다란 박스를 몇 개나 옮기고도 아직 서랍을 다 빼지 못한 까닭에 기철은 속에서부터 한숨이 나왔다.

‘확 다 버리고 가 버릴까?’

그때 그의 눈에 묘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책상 깊숙한 곳, 그러니까 의자 아래 다리를 넣는 쪽에 떼다 만 테이프가 몇 장 붙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

기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허리를 숙였다.

테이프는 총 네 군데 붙어 있었는데 명백히 무언가를 붙였다가 뗀 자국이었다. 이 책상은 기철이 입사한 때 처음 들여온 것이었고 다른 사람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곳에 테이프를 붙일 일은 더욱 없었다.

“여기에 대체 뭐가 붙어 있었던 거야?”

홀로 중얼거리던 기철의 등골이 문득 서늘해졌다.

[내가 준비한 다른 한 가지 선물은 퇴사하는 날 알게 될 겁니다.]

화장실 앞에서 싸늘하게 경고했던 유신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이게?’

기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황급히 의자에 앉아 본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젠장! 카메라였어!’

자리에 앉아 보니 더욱 확실했다.

테이프가 붙어 있는 위치는 정확히 몸의 정중앙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조유신 개새끼. 대체 어디까지 할 생각인 거야!’

조유신이 준비한 다른 한 가지 선물의 의미를 깨달은 기철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게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빌어먹을, 설마 그것도 찍힌 건가?’

얼마 전 선율을 보며 혼자 자위했던 일이 떠올랐다.

기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깨끗이 떼어 버릴 수 있었던 테이프를 일부러 남긴 것마저 그의 계산 중 일부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 * *

유신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에 복수와 주희가 모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문제의 영상도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한주그룹을 공격할 차례인가요?”

기철이 손에 쥐고 있던 폭탄을 제거하자마자 세 사람의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특히 주희는 두 사람보다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저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오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썩을 놈의 집구석을 무너트려야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먼저 김한주를 끌어내야 해.”

유신이 톡톡 자료를 두드리며 눈을 빛냈다.

“너도 알다시피 김한주는 복수 형님이 수십 년간 연구한 모터 기술을 빼돌렸어. 그러곤 산업 스파이 누명을 씌워 철창신세를 지게 했지.”

장복수는 전기 자동차에 들어가는 PM 모터에 한평생을 바친 연구원이었다. 한주그룹이 국내 최대의 자동차 그룹 휘하의 계열사였을 때부터 이십 년을 넘게 연구에 매진했고 한국에서 전기 자동차 시장이 열리지 않았을 때부터 꿋꿋하게 외길을 걸어왔다.

세월이 지나 전 세계의 흐름이 가솔린 차량에서 전기 차로 바뀌었을 때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나노 결정립 PM 모터 개발 기술로 당당히 국내 최고의 연구진이 된 그는 김한주 회장이 모회사에서 분리되어 한주그룹을 차렸을 때 당당히 상무 이사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성공과 시련은 함께 찾아왔다. 새로운 기술로 막 사업화를 시작하기 전 복수는 자신이 개발한 모터의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다.

“전기 차의 경우 고출력이 필요한 경우 온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에 최고 속도로 달렸을 때 5분 이내까지만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팅된 게 대부분이야. 최고 속도로 30분가량을 달리면 배터리가 방전되어 버리지.”

“그렇군요.”

“복수 형이 연구 중이던 전기 차는 당시 최고 속도가 300킬로가 나왔지.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어. 하지만 최고 속도를 넘기게 되면 심각한 엔진 과열 현상이 발생하는 걸 발견했어.”

“최고 속도로 5분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데요?”

“펑.”

유신이 입술을 모았다 터트렸다.

“터져 버리는 거지.”

복수와 김한주 회장이 얽힌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주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결함이네요.”

“형은 당장 사업화를 중단하자고 주장했지만 김한주의 의견은 달랐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전기 차 개발 기술로 정부로부터 천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지원금을 따낸 상태였거든.”

“아무리 그래도 사람 생명이 걸린 문젠데 사업화를 강행했다고요?”

“최고 속도 유지 시간을 5분 미만으로 세팅만 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김한주 회장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한국에 아우토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300킬로에 가까운 최고 속도로 5분 이상을 달릴 수 있는 도로 자체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일단 결함이 발견된 이상 복수는 묵과할 수 없었다. 사업화를 앞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결국 김한주는 복수를 내쫓는 걸 선택했다. 복수가 이십 년을 바쳐 이룩한 연구 성과 역시 강탈당하고 말았다.

“한주그룹은 스스로 몰락할 거야. 그러나 그 책임을 김한주 회장에게 직접 묻기 위해서는 그가 차체의 결함을 알고서도 사업화를 강행했다는 증거가 필요해.”

“아……. 어렵네. 김한주 회장이 호락호락 걸려들까요? 막상 불러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베링거와 싸움을 붙일 생각이야.”

“어떻게요?”

“이걸로.”

유신이 태블릿을 꺼내 그림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건 한눈에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차체의 디자인이었다.

늘씬하게 빠진 유선형 모델에 날개처럼 위로 열리는 네 개의 도어, 낮은 차체에 비해 웅장할 정도로 커다란 휠, 그리고 날카로운 짐승의 눈매처럼 좌우로 길쭉한 헤드라이트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포스였다.

“이번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할 베링거의 다음 시즌 모델이야. 디자인 등록 완료했고 샘플도 나온 상태지. 이걸 김기철에게 넘길 거야.”

주희는 입을 헤 벌린 채 중얼거렸다.

“와……. 진짜 탐이 안 날 수가 없겠는데요. 그런데 이걸 김기철에게 넘긴다고요? 왜…… 아, 설마?”

스스로 답을 찾아낸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김기철이 디자인을 훔쳤다고 뒤집어씌우려고요?”

“빙고.”

유신이 씩 미소를 지었다. 주희는 그의 대담한 낚시질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김기철이 넘어올까요?”

“김기철은 김한주 회장의 눈 밖에 난 아들이야. 어떻게든 성과를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 이 좋은 먹이를 놓칠 리가 없어.”

“이 디자인으로 두 기업 간에 싸움이 붙으면 김한주 회장이 움직일 수밖에 없겠군요.”

“의심을 사지 않게 전달할 방법을 구상 중이야.”

주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내가 할게요.”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유신이 단번에 거절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복수 역시 그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면서도 주희는 마음이 조급했다.

‘그림 한 장 달랑 전달하는 게 뭐 그리 위험하다고 그래? 김기철과 안면이 있는 내가 하는 게 최선이지.’

유신과 복수가 따로 대화를 나누는 걸 힐끔거리던 주희가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냈다.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을 몰래 찍은 그녀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대화에 합류했다.

다행히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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