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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흣…….”
유신은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듯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미치게 좋았다. 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유신아……. 흐읍!”
선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을 몰아쉬었다.
메마른 입술이 빨려 들어가듯 그의 입 안으로 삼켜지고 붉은 살덩이가 뽑힐 듯 휘저어졌다. 치열을 고루 훑어 내리는 감촉은 소름이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숨이 턱 막힌 그녀가 살짝 가슴을 밀어냈으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밀어낼수록 더욱 깊숙이 숨결이 파고들었다.
“하아…….”
유신은 선율의 뒤통수를 잡은 채 격하게 키스했다. 립스틱이 닦여 나가고 눈물이 텁텁하게 섞였다. 입 안을 파고드는 그의 호흡이 선율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예전보다 훨씬 깊어진 입맞춤은 훨씬 어른다웠다. 이성이 휘발될 정도로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저를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그에게 선율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작게 헐떡이는 그녀의 호흡에, 그의 입술이 유려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나도 안 변했어, 선배 입술.”
그토록 맛보고 싶었던, 애가 달아 녹아 버릴 것 같던 그녀의 입술이 저를 향해 열린 순간 유신은 자제할 수가 없었다. 지난 8년간의 고된 세월이 키스 한 번에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강렬하고 짜릿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밀어붙이는 힘에 의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선율을 더욱 몰아붙이는 사이 그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계정 폭파 완료했습니다.>
* * *
일레 파스타.
저녁 시간이면 늘 사람이 붐비는 이곳은 기철의 집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파스타 집이었다.
맛집 탐방을 좋아하는 선율을 위해 기철이 직접 알아본 곳이었고 그녀에게 고백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른 저녁, 선율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기철은 기쁘면서도 의아했다. 제 치부가 낱낱이 밝혀진 상황에 선율이 왜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걸까? 설마 다시 만나자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억하심정에 얼굴에 물이라도 뿌리려는 걸까?
그렇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회사에서도 내내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던 선율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 자체가 퍽 고무적인 일이라 이참에 기철은 어떻게든 선율을 붙잡아 볼 생각이었다.
기철이 선율을 마음에 담은 지 벌써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신입생 OT 때 처음 본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고 술기운을 빌려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인 게 1학년 때만 세 번이었다.
그는 선율이 자신을 왜 받아 주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훈훈한 외모와 더할 나위 없는 집안, 똑똑한 머리에 젠틀한 매너까지. 여자가 좋아하는 모든 조건은 다 갖췄는데 어떻게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지?
실제로 유신이 입학하기 전까지 기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명실공히 미대 톱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연거푸 선율에게 까여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입은 그는 선율과 유신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자 눈이 돌았다.
‘설마 조유신도 선율이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둘이 사귀기라도 하면 난 뭐가 되는 거야?’
가뜩이나 유신이 입학한 후 여학생들의 관심이 뚝 떨어졌는데 만에 하나 선율까지 빼앗기게 되면 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질지 눈에 훤했다. 그는 선율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제가 점찍었으니 제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삐뚤어진 욕심은 기껏 숨겨 왔던 음습한 욕망에 부채질을 했다. 가을 MT 날, 깊은 잠에 빠져든 여학우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면서 그가 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한선율은 내 거야. 조유신이랑 사귈 테면 사귀어 보라지. 이걸 보고도 멀쩡히 곁을 지켜 줄 남자가 있을 줄 알아?’
그녀의 몸을 더듬고 세세하게 영상에 담는 동안 죄의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이 좋은 걸 자신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까부터 전화도 안 받고.”
선율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내내 고민하던 기철이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벌써 약속 시간이 50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전화를 했는데 받지도 않고 그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그렇지,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는 건 무슨 경우야?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 아주.”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흘렀다.
언제까지 안 오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기다리던 그의 인내가 마침내 바닥이 났다. 잔뜩 열불이 난 그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어? 이거 왜 이래?”
그런데 휴대폰이 켜지지 않았다.
기철은 까맣게 꺼져 버린 액정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며 다시 부팅을 시도했다. 옆면의 버튼을 몇 초간 세게 누르니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배터리 나간 것도 아닌데 별일이네.”
그가 구시렁대며 메인 화면을 열었다. 그러곤 이내 아연해지고 말았다.
“뭐야, 이거.”
휴대폰은 초기화가 된 듯 깨끗했다. 자잘하게 깔려 있던 앱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연락처 역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깜짝 놀란 그가 이것저것 만져 보았으나 휴대폰은 계속 먹통이었다. 갤러리 비밀 폴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흔적에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작동되던 휴대폰이 왜……?’
유심 고장인가 싶어 휴대폰을 열어 본 그는 유심칩 옆에 나란히 꽂혀 있는 낯선 물체를 발견했다. 메모리 카드 비슷하게 생긴 네모난 칩은 그가 난생처음 본 물건이었다.
“이게 뭐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칩을 바라보던 기철의 뇌리로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거 설마……?”
멀쩡한 휴대폰이 갑자기 초기화되는 일이 어디 흔한가. 누군가 고의로 제 휴대폰에 이런 짓을 한 게 아니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철은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가 비밀 금고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응접실에 놓아두었던 노트북 역시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이런 씹, 조유신 개 같은 새끼! 네놈 짓이지? 죽여 버릴 거야, 으아아아아악!”
* * *
누군가에겐 악몽이, 다른 누군가에겐 안락이 찾아온 밤.
기철의 계정을 완전히 폭파했다는 보고를 받고서 유신은 USB와 외장 하드를 활활 불태워 버렸다. 다행히 집주인 부부는 집을 비운 상태였고 마당이 있어 처리하기 좋았다. 활활 치솟아 오른 불꽃에 유신은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말끔히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만에 하나 기철이 몰래 꼬불쳐 둔 게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문형주 말로는 몰카범은 혹시 모를 발각에 대비해 자료를 한곳에 모아 두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기철의 경우는 비밀 금고였다. 그곳이 털린 이상 아마도 선율의 영상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신은 기절하듯 잠든 선율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긴장이 풀린 선율은 금세 곯아떨어졌는데 온종일 받은 충격이 컸는지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황주희가 준기 형 동생이란 걸 알게 된 데다 김기철의 만행까지 알아 버렸으니.’
유신은 깨끗한 수건에 찬물을 적셔 선율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동그란 이마와 보드라운 콧날, 살짝 열이 오른 뺨을 차례로 거쳐 간 물수건이 입술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 유신에게 헤집어진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안쓰러운 와중에 또다시 욕정이 밀려왔다. 저 입술에 다시 키스하고 싶다. 맑게 고인 샘을 한껏 들이켜고 단물을 빨고 싶었다.
‘와……. 조유신 완전 쓰레기네.’
앓아누운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먹는다는 게 괜히 미안했다. 그러나 유신의 손가락은 어느새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 안 갔어?”
인기척을 느낀 선율이 졸린 눈을 깜빡였다.
“선배가 아픈데 내가 어딜 가요.”
유신은 손을 뗄 생각을 하지도 않은 채 부드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선율 역시 그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그래, 옆에 있어 주라.”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득한 분위기 속에서 유신이 비스듬히 그녀의 옆에 팔을 괴고 누웠다. 한 손은 여전히 선율의 입술에 닿은 상태였다.
“나 좀 누워도 되죠? 허리가 아프네.”
“떨어져서 누워. 혹시 감기면 어떡해.”
“감기면 벌써 옮았겠죠. 키스를 몇 시간이나 했는데.”
선율의 뺨이 한결 더 붉은빛을 띠었다. 유신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이런 상상 매일 했어요. 선배 옆에 누워서 별거 아닌 대화를 하면서 웃는 상상.”
“영상은…… 확실히 없어진 거야?”
“아직 걱정돼요?”
“좀 불안하네.”
“내가 이럴까 봐 선배한테 말 안 하려고 했던 거야. 나랑 같이 감방 썼던 문형주 있죠? 그놈이 그러던데, 몰카는 바퀴벌레랑 똑같다고.”
바퀴벌레 소리에 선율이 진저리를 쳤다.
“눈앞에 보이는 걸 못 잡고 놓치면 내내 찝찝하잖아. 언제 어디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더 끔찍한 건 뭔지 알아요?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면 어딘가에서 알을 까고 있다는 거죠.”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더 불안해지는데?”
“근데 선배는 걱정 안 해도 돼요. 다행히 그 영상은 유출된 적이 없으니까. 김기철이 쥐고 있는 것만 없애면 되는 거였어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위로가 안 된다. 그래도 곁에 유신이 있으니 조금 안심이 되긴 했다.
“너한테 그런 말까지 한 걸 보면 문형주란 사람은 그래도 반성했나 보네.”
“아뇨. 절대.”
유신이 단언했다.
“그 말 하면서 ‘어떻게 알을 까야 안전한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데?”
선율은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한 대 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썩을 놈. 세상에 정신병자가 왜 이리 많은지.
유신은 아직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그녀가 안타깝기만 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그녀를 보듬어 안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불안해하지 마요. 가슴 아프다, 진짜.”
가슴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해 주었다. 단단한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선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츰 괜찮아질 거야. 오늘은 너무 놀라서 그래.”
“선배.”
“응?”
선율이 고개를 들었다. 품 안에서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신이 말했다.
“나랑 같이 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