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32)화 (32/85)

32

하늘이 도왔다는 건 이런 걸 뜻하는 걸까.

바닥에 널브러진 USB와 외장 하드를 보는 순간 유신의 눈이 번쩍했다.

“김기철 집에서 가지고 나온 거예요?”

“응. 혹시 몰라 노트북도 들고 나왔어.”

“잘했어요.”

유신은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느새 눈물이 멈춘 선율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경황이 없어 싹 다 들고 나오긴 했는데 저걸로 정말 이 엿 같은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걸까. 해킹이며 계정 폭파며 항상 영화에서만 듣는 말이 유신의 입에서 나오자 현실감이 없었다.

“조유신입니다. 작업 시작하세요.”

유신은 간단한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상대는 곧장 알아듣고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장의사라고 불리는 해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몰카범으로 수감됐던 문형주가 알선해 준 사람이었는데 정반대의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알고 지낸 건지는 유신도 알지 못했다.

[이 일은 타이밍이 생명입니다. 노트북, 휴대폰, 외장 하드, 웹 하드를 비롯해서 사용자가 쓰고 있는 모든 장치를 한 번에 폭파해야 해요. 생각해 보십쇼. USB 하나라도 빠트리잖아? 그럼 다른 거 다 지워 봤자 소용없어요. USB에 저장된 영상을 다시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이게 생명력이 그렇게 끈질기다고.]

그래서 유신은 오래도록,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김기철의 휴대폰을 해킹해 연동된 계정 모두를 초기화하고 휴대폰을 동기화시키는 것. 동시에 기철이 가진 외장 메모리를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

완벽한 계획이었다. 단 하나만 제외하면 말이다.

주희를 시켜 기철의 휴대폰에 해킹 코드를 심는 것은 이틀 전에 성공했는데 외장 메모리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

‘외장 메모리가 살아 있으면 계정을 폭파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는데 이걸 어쩐다.’

사실 유신은 기철의 집에 몰래 침입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비밀 금고를 보았고 그 안에 메모리가 들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끝내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가 없어 지금껏 계획을 미뤄 온 참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순간, 의외의 계기로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선율 덕분이었다.

“죽으란 법은 없네요.”

전화를 끊은 유신이 잘근잘근 손톱을 씹고 있는 선율의 손목을 부드럽게 끌어 내렸다.

“불안해하지 마요. 이제 다 됐어.”

그의 장담에도 선율은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얼룩진 눈가를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뭐가 다 됐다는 건지 설명해 줘.”

“그럴게요.”

유신은 지금껏 숨겨 왔던 모든 걸 털어놓았다.

감방에서 문형주를 만난 것, 복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 맥파이란 이름의 디자이너로 살아온 것, 디지털 장의사를 고용해 지난 8년간 혹시나 선율의 동영상이 올라오지 않는지 감시한 것, 주희와의 만남, 그리고 기철의 손에서 영상을 없애기 위해 최근까지 작업한 일들까지도.

선율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고백을 들었다.

역동적이다 못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울렁거리는 세월이었다. 평탄하던 그의 인생이 왜 그렇게 변한 건지 선율은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때문에.

오로지 나를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해?”

고맙고,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세상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줄 수 있을까. 부모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고작 몇 달 사귄 사이였다. 누군가에겐 풋풋하게 기억될 풋사랑. 또 누군가에겐 기억조차 안 나는 추억거리로 남겨질 법한 짧은 인연이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랬어.

그냥 잊고 돌아서서 네 인생을 살았어야지! 그랬다면…… 그랬다면 내가 널 망칠 일은 없었을 텐데. 네가 그토록 힘든 길을 걸어오는 동안 널 원망하고 미워하기만 했던 나는 대체 어떡하라고.

“내가 뭐라고. 겨우 스무 살에 잠깐 만난 여자가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네 인생을 바친 건데! 너 바보야? 그렇게 계산이 안 돼?”

“그러는 선배는 왜 그렇게까지 했는데.”

울먹이는 선율의 어깨를 유신이 감싸 쥐었다.

“나 감방에 있을 때 공모전 수상 연기시켜 준 거 선배잖아.”

“그건 아까우니까……!”

“죽도록 미운 놈 수상 취소되는 게 왜 아까운데.”

“…….”

선율은 말없이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신이 학교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후 선율은 죽은 듯이 조용히 학교생활을 했다. ‘연하남 킬러’란 꼬리표만 붙이고 사라진 그가 너무 미웠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마저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었다. 혹시나 불이 켜져 있을까 싶어 그의 집 앞엘 몇 번이나 찾아갔는지.

수북이 쌓여 있는 우편 용지를 보며 그의 부재를 실감하던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먼지 쌓인 우편물 사이에 삐죽 나와 있는 서류 봉투 하나를 보았다. <세계자동차디자인협회>에서 발송한 우편이었다.

유신은 신입생이던 1학년 여름, 세계 유수의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쟁쟁한 디자이너가 대거 참석한 공모전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그것도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학생이 대상을 휩쓸었다는 것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 충분했다.

주변에선 그를 천재라고 치켜세웠고, 연성대학교 정문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선율 역시 그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우편물 안엔 이번 달 말까지 수상을 확정하지 않으면 수상이 취소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구속 수사를 받고 있던 유신은 당연히 연락에 답을 할 수 없었기에 협회에서 보낸 우편이 매번 반송되었던 것이다.

우편물을 집으로 가져와 하루를 꼬박 고민하던 선율은 다음 날 직접 우편을 발송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당장 수상은 어려우니 조금만 연기를 해 주시면 안 되겠냐고.

연기처럼 사라진 유신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날리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혹시라도 나중에 그가 돌아왔을 때 억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직 그런 생각뿐이었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 그냥 우편물 하나 보낸 것뿐이잖아.”

“그 대단치도 않은 일을 해 준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어.”

“…….”

“내 미래까지 걱정해 준 사람, 선배뿐이었다고.”

유신의 눈동자가 짙은 그리움으로 일렁였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

부드럽게 선율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을 이었다.

“치매 걸린 우리 할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말동무해 드린 것도 알아.”

“……할머니가 얘기했어?”

“가끔 정신 돌아왔을 때 그런 얘기 하시더라. 딸이 얼굴이 피었다고. 당신이 잘 먹여서 그런가 보다고.”

할머니 얘기에 선율의 눈매가 금세 촉촉해졌다.

유신의 할머니는 팔순이 훌쩍 넘은 치매 노인이었다. 일찍이 아들을 앞서 보내고 며느리, 즉 유신의 모친과 함께 살던 그녀는 치매가 악화되면서 요양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모친 상미는 평일엔 학교 일을 하고 주말엔 시어머니 간병을 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 유신은 할머니를 무척 애틋하게 여겼다.

유신과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틈날 때마다 요양 병원을 찾아가 할머니를 돌본다는 걸 알게 된 선율은 조별 과제가 끝나 조금 한가해진 어느 날 유신을 졸라 요양 병원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어이구, 우리 유경이 왔어?]

할머니는 덥석 선율의 손을 붙잡으며 볼에 뽀뽀를 해 댔다.

열 살도 되지 않아 굶어 죽었다던 고모 이름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거야?

놀란 유신은 급히 선율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선율은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생긋 웃으며 할머니를 껴안았다.

[응, 엄마.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오십 년 전으로 기억이 퇴보했다. 그런 할머니에게 가장 애틋한 존재가 고모였다. 선율은 자신을 딸이라고 착각하며 연신 볼을 비벼 대는 할머니에게 기꺼이 딸이 되어 주었고, 할머니는 어릴 때 많이 못 먹였던 한을 풀 듯 냉장고에서 빵이며 과일이며 죄다 꺼내 선율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유신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한없이 부족한, 농도 짙은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였다. 그건 선율을 사랑하게 된 수많은 계기 중 하나였으며 유신의 뇌리에 가장 깊숙이 각인된 장면이기도 했다.

그 후 선율은 일주일에 한 번씩 유신이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따라나섰다. 할머니가 너무 많이 먹이는 바람에 꼭 사육당하는 것 같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살이 통통하게 오른 선율의 뺨은 유신이 본 무엇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거길 왜 갔어요? 나 미웠다면서. 그럼 나와 연관된 곳엔 발길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 유신이 깊은 눈동자로 선율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보고 싶어서 갔다, 왜.”

조금 쑥스러워진 선율은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너는 미웠지만 할머니는 좋았으니까.”

“내 소식 듣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

“……아닌데?”

“퍽이나.”

정곡을 찔린 선율이 입을 다물었다.

유신의 집 앞을 찾아간 것도, 꾸준히 할머니 병문안을 갔던 것도 그곳에 가면 혹시나 바람처럼 증발해 버린 유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치매 때문에 유신이 사라졌다는 것도 몰랐지만.

“선배가 왜 그랬는지 알아요.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붉어진 선율의 뺨 위를 커다란 손이 어루만졌다.

“왜 하필 선배와 얽혀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원망하면서도 사랑했어.”

매일 밤 들끓었던 마음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미워하면서도 지켜 주고 싶었고.”

곁에 두고서도 전하지 못했던 마음이.

“그리웠어.”

그토록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이제야 흘러나온다.

선율의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미치게 억울했다. 8년 내내 삽질만 한 것 같았다. 그를 미워했던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나 역시 그랬는데.

나도 네가…… 너무도 그리웠는데.

“미안해.”

마음에 꽉 찬 수많은 말 중에 선율은 제일 먼저 그 말을 했다. 유신은 부드럽게 웃으며 선율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미안하면 갚죠?”

“갚을게.”

“내가 원하는 걸로 갚아요.”

눈빛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얽혔다.

그녀의 턱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스르르 끌려온 선율의 입술이 거칠게 헤집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