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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31)화 (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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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을 불러낸 후 선율은 그와 약속한 장소가 아닌 그의 집으로 향했다.

기철을 불러내 진위를 물어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답해 주지도 않을 거고,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에게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으니까.

대뜸 어디냐고 물으면 혹시라도 의심을 살까 싶어 자연스럽게 그를 불러냈다. 일부러 집과 거리가 있는 곳을 약속 장소로 정했으니 만약 선율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금방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강남 한복판의 주상 복합 오피스텔.

선율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현관 앞에 섰다.

기철과 사귈 때 두어 번 와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기철이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선율은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연도와 생일을 조합한 숫자였다.

띡. 디리리링.

딱히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는지 현관이 쉽게 열렸다.

선율은 인기척을 죽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기철의 오피스텔은 방 두 개에 커다란 응접실이 있는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그의 비밀 금고가 안방 침실에 있었다는 걸 떠올린 선율은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 놓고 안방으로 향했다.

‘있다!’

금고는 처음 본 그때처럼 침대 옆에 붙어 있었다. TV에서 흔히 보는 네모난 철제 금고였다. 최근까지 여러 번 열고 닫았는지 비밀번호를 누르는 패드엔 지문이 묻어 있었고 위쪽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만약 기철이 영상과 관련된 무언가를 숨겼다면 여기에 두었을 가망성이 제일 큰데, 안타깝게도 선율은 비밀번호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차분히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숫자를 조합해 보았다.

‘생년월일? 전화번호 끝자리? 아니면…… 1111이나 0000같이 단순한 번호일까?’

눈에 힘을 주고 들여다보니 지문이 묻어 있는 숫자는 총 네 개였다.

2, 3, 4, 5.

우선 선율은 보이는 숫자를 차례대로 눌러 보았다. 그러나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선율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때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은 기철이었다.

“응, 나야.”

―나 조금 전에 도착했어. 언제 와?

선율은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게 노력하며 여상하게 대꾸했다.

“가고 있어. 차가 조금 막히네.”

대충 둘러댔더니 다행히 기철은 믿는 눈치였다. 웨이팅이 있어 기다리고 있다며 천천히 오라는 그의 말소리 주변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렸다. 항상 사람이 많은 가게인 걸 감안하면 그가 도착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금방 갈게. 조금 기다려 줘.”

선율은 그를 안심시키곤 전화를 끊었다.

‘후우, 십년감수했네.’

혹시나 그의 집에 무단 침입했다는 걸 들켰을까 봐 잔뜩 긴장했던 선율의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났다.

조급함을 느낀 선율은 네 가지 숫자를 이리저리 조합해 찍어 보았다. 그러나 금고의 문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어쩌지?

아마도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오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으면 기철은 수상하게 생각할 테고 어쩌면 집에 들어온 순간 선율이 들어왔었다는 걸 알아챌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반드시 오늘 끝내야만 했다.

‘2, 3, 4, 5로 조합할 수 있는 숫자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눌러 볼 수도 없고.’

선율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식혔다.

‘보통 비밀번호를 만들 때 아무 의미 없는 숫자를 쓰는 경우는 별로 없어. 자신에게 의미가 없는 숫자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특히 김기철은 이 금고를 보물 상자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으니 아무렇게나 숫자를 조합하지는 않았을 거야.’

기철이 금고를 만들면서 떠올렸을 어떠한 숫자.

선율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 금고는 아주 음란하고 음습한 그의 탐욕이 집결된 것이었다. 그것을 만들며 기철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문득 선율의 뇌리로 기철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오늘도 안 돼? 나 진짜 오래 기다렸잖아. 응? 응?]

술에 조금 취한 밤 그는 참 많이도 보챘었다.

[한선율 몸매 진짜 미친 거 같아. 35, 24 완전 꿈같은 사이즈잖아. 이렇게 달아오르게 해 놓고 못 하게 하면 어떡해. 응? 응?]

설마.

선율의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조금씩 떨리는 손가락 끝이 키패드를 눌렀다.

3, 5, 2, 4.

디리링.

금고가 열리는 순간 선율은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열린 금고 안은 텅텅 비어 있다시피 단출했다. 두 칸으로 나뉜 위쪽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래쪽 칸에는 네모난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선율이 상자를 꺼내 들었을 때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기철이었다.

‘나쁜 새끼.’

선율은 이번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자를 열어 보니 각종 USB와 외장 하드가 열 개도 넘게 들어 있었다. 선율은 처참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 안에 금덩이나 현금 뭉치가 들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별로 값어치 나가지도 않는 이런 물건을 굳이 금고 안에 넣어 둔 이유야 빤했다. 중요한 거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거거나. 어쩌면 둘 다겠지.

그토록 아니길 바랐었는데 금고 안의 USB를 보는 순간 실낱같은 바람이 무참히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선율은 상자를 통째로 들고 일어났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사이 기철에게서는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기철의 집을 둘러본 선율이 응접실에 놓여 있는 그의 노트북을 갈무리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어느새 피 맛이 느껴졌다.

* * *

영상은 어둠 속에서 시작되었다. 펜션 바깥에 주차해 놓은 차에서 소형 카메라를 꺼낸 기철이 바깥 담장을 빙 돌아 안채로 들어선다. 바깥 담장 쪽에는 커다란 나무가 무수히 심겨 있는데 어둠 속에서 살짝살짝 나뭇잎이 시야를 가려 마치 수풀을 헤치는 느낌이었다.

사냥을 앞둔 사람처럼 여유를 부리며 마당을 가로지른 그가 곧장 여학생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향한다. 시각은 새벽 두 시.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모두 뻗어 버린 밤이었다.

구석에서 자고 있는 선율의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손을 뻗는다. 선율의 블라우스가 천천히 말려 올라가고 옷 대신 찬 공기가 그녀의 살갗에 내려앉는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와중에 선율이 잠깐 뒤척이자 기철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다.

선율이 다시 깊은 잠에 빠지자 그가 다시 마수를 뻗는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하얀 곡선의 윤곽은 더욱 또렷하다. 기철은 화면을 클로즈업해 선율의 얼굴을 담는다. 날씬하게 뻗은 목과 쇄골, 그리고 점점 아래로.

키득키득.

영상 속에서 숨죽여 웃는 기철의 음성이 들렸다.

“으흡……!”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을 보며 선율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해도 감당할 수준의 충격이 아니었다. 영상 안에서 그녀는 값싼 밀랍 인형처럼 유린당하고 있었다. 기철의 손가락 끝이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흑, 으윽!”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김기철 너는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해.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소리 없는 비명이 가슴에 차올랐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에 선율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신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런 영상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내가 어떻게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겠어. 언제 이게 세상에 풀릴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고개를 들고 걸어 다닐 수가 있겠어!

딱 죽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다가선 선율은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쾅쾅쾅!

누군가 선율의 자취방 현관을 거칠게 두드렸다.

기철일까? 집에 도착해 금고의 물건이 사라진 걸 알고 여길 온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 없었다. 선율은 머리를 감싼 채 문 앞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쾅쾅!

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한 노크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거센 소음에 섞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그 한마디를 듣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나예요. 문 열어 봐요.”

아무리 참아도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난 알고 있었는지 몰라.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너라는 걸.

어쩌면 기다렸는지도 몰라. 아니, 기다렸어.

유신아, 나는 너를 기다렸어.

선율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었다. 인사도 없이 들어선 그가 다급히 선율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봤어?”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유신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선율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달려왔는지 와이셔츠가 조금 축축했다.

“봤어……. 나 다 봐 버렸어.”

그의 품에 안긴 채 선율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유신은 그녀의 등을 더욱 세게 당겨 안았다. 세상 풍파 같은 건 모조리 비껴 나가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듯 강인한 품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주희에게서 선율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녀의 집으로 튀어 온 유신이었다. 왜 그걸 얘기했냐고 책망할 겨를도 없었다. 선율이라면 주희가 준 힌트를 알아챘을 거고, 아마도 가만히 있지는 못했을 거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김기철 퇴사 처리도 끝났고 계정 해킹도 준비됐어. 그 새끼가 따로 꼬불쳐 둔 외장 하드만 태워 없애면 그딴 건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수 있어.”

“외장…… 하드?”

“집 안 어딘가 숨겨 놨을 거예요. 그것만 찾으면 돼.”

선율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바닥에 널브러진 네모난 상자로 향했다.

상자에 들어 있던 USB는 총 아홉 개. 외장 하드는 하나.

떨리는 손이 바닥을 가리켰다.

“나 그거 가지고 나온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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