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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30)화 (30/85)

30

“나는 그때 심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어요. 어릴 때부터 안 좋았던 판막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얇아졌거든요. 돈이 필요했죠.”

황준기는 동생을 수술시킬 돈을 모으기 위해 남들 다 놀 때 과외를 대여섯 개씩 뛰었다. 그러나 심하게 다친 얼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었어요.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거든요, 저희 남매.”

그제야 선율은 주희가 매번 다이어트를 시도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심장이 안 좋아 운동을 할 수가 없어서 음식을 줄여야 한다나 뭐라나. 그땐 그저 핑계인 줄로만 알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그래서…… 그래서 거짓 증언을 했던 거예요.”

지금 멀쩡히 뛰고 있는 주희의 심장을 위해 황준기는 유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유신 오빠가 김기철 대신 감방에 들어간 일로 오빠는 많이 괴로워했어요.”

유신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준기는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학교도 자퇴한 채 칩거하던 그가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2년 전 상미에게 자신이 아는 진실을 털어놓는 편지를 보내고 자살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망가져 버린 얼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회복 불가능한 제 인생 때문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유신을 생각했다. 미안했다고, 그리고 용서하라고.

“제가 유신 오빠를 처음 만난 건 장례식장에서였어요.”

주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준기의 장례식을 떠올리는 그녀의 눈가는 저도 모르는 새 축축해졌다.

조문객도 없는 늦은 새벽.

넋을 놓고 준기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던 주희는 홀로 빈소를 찾은 유신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준기가 그렇게 얘기했던 그 남자였다. 죽기 하루 전날 적어 내려간 유서에 몇 번이나 적혀 있던 그 남자.

검은 양복을 입고 우두커니 준기의 영정 앞에 선 그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진 순간 주희는 그에게 매달렸다.

[오빠를 죽음으로 내몬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준기가 고통받은 만큼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다고, 죽어도 좋으니 기철에게 복수하게 해 달라고.

이 일에 누군가를 더 끼워 넣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유신이 거절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몰랐어요. 유신인 나한테 한 번도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어서.”

“얘기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예요.”

“유신이도 똑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유신 오빠 미워하지 마요. 당신은 그럴 자격 없어.”

주희가 쏘아붙이듯 얘기했다. 묘하게 힐난하는 어조였다.

선율은 조금 화가 났다. 왜 다들 나한테 쉬쉬하면서 화를 내는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속 시원히 얘기나 해 주든지, 넌 알 것 없다고 입을 꾹 다물면서 왜 화를 내는 건데. 내가 잘못했어? 그럼 뭘 잘못한 건지 얘기를 해 달란 말이야!

“어차피 주희 씨도 말해 주지 않을 거죠.”

선율이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김기철은 조유신이 돈을 받고 대신 감방을 간 거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난 그 말 안 믿어.”

“…….”

“주희 씨는 알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얘기해 줘요. 그게 뭐든.”

주희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유신이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선율을 좋아하고, 그녀가 분명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술 없인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는 유신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주희는 늘 가슴이 아팠다.

답답할 정도로 우직한 그의 사랑은 그 자신에게는 늘 독이었다. 홀로 감내하고 버티는 사이 선율은 기철의 연인이 되어 있었고 유신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은 더욱 늘었다.

“감당할 자신 있어요?”

평소의 발랄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진 주희가 물었다.

“난 유신 오빠와 달라요. 한 팀장님이 당사자인 만큼 알 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될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정 듣고 싶다면 알려 줄게요.”

선율은 덜컥 두려워졌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다.

“감당……할게요. 그게 내가 짊어질 몫이라면.”

주희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했다. 그러곤 뱉은 숨과 동시에 말했다.

“최종 PT 앞두고 제작팀에서 마지막으로 끼워 넣은 영상 있죠?”

이 와중에 최종 PT 얘기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무서운 예감이 뒷골을 스쳤다. 선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답이 있어요.”

“그게 왜…….”

“박 주임이 수정한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김기철이 한 짓이더라고요.”

영상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었던 유신의 얼굴,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1초 만에 노트북을 닫아 버렸던 일.

뇌리에 차례로 스치는 장면이 선율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쿵쿵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간신히 버티는 선율을 향해 주희가 말했다.

“그거 김기철이 일부러 넣은 영상이에요. 그걸 생각하면 답을 알 수 있을 거예요.”

* * *

선율은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혼이 빠져 있었는지, 집에 도착하고 보니 준기의 묘소에 놓아주려고 샀던 국화가 그대로 손에 들려 있었다.

‘김기철이 일부러 집어넣은 영상에 답이 있다.’

선율은 주희가 준 힌트를 생각하며 정신없이 자료를 뒤졌다. 최종 PT에서 사용한 영상 파일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선율은 곧바로 영상을 재생했다.

최종 PT 파일에 들어간 도입부 영상은 3초 남짓한 짤막한 영상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찍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카메라가 어둑한 숲길을 헤치는 장면이었다.

선율은 몇 번이고 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걸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이유가 뭐지? 나한테 보여 주려고 한 건가? 하지만 난 이 영상이 뭔지 모르는데?’

선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김기철이 이 영상을 튼 순간 조유신이 반응했어. 즉, 김기철은 조유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 영상을 쓴 거다.’

그렇다면 유신과 기철이 이 영상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어떻게든 자신이 엮여 있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

설마 나를 찍은 영상인가? 아냐, 그럴 리가. 설마…… 아냐. 절대로.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했다. 선율은 핏발 선 눈으로 영상을 확대했다. 그러고 보니 수풀 사이로 건물의 옆면 같은 것이 슬쩍 보였다. 화면을 정지해서 다시 확대해 보니 어딘지 낯이 익은 건물이었다.

“4학년 가을 MT.”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기억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그래. 그날은 졸업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같은 층 화실을 쓰는 동기들이 MT를 떠난 날이었다. 총 스무 명쯤 됐던가. 그중 여학생은 선율과 민서를 포함해 네 명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들이 보통 그렇듯 졸업 여행을 빙자한 술 여행이었다. 원래 선율은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불참할 예정이었는데 여학생이 너무 없어 썰렁하다며 민서가 하도 애원한 탓에 MT 가기 바로 전날 아르바이트를 취소하고 참석을 결정하게 되었다.

MT 장소에 도착해 각자 준비하고 있는 졸업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눈 후론 처음부터 끝까지 술만 마셨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수적 우위를 점한 남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 얼마나 마셨던지 열두 시도 되기 전에 뻗어서 방으로 들어간 기억이 난다. 그나마 선율은 마지막까지 잘 버틴 편이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초저녁에 뻗어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암전이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 버린 모양인데.

“아!”

기억을 더듬던 선율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묘하게 흐트러진 옷이 떠올랐다. 그날 선율은 티셔츠 위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단추가 두 개밖에 잠겨 있지 않았다. 그마저도 하나씩 밀려 잠겨 있어서, 술에 취해 그랬겠거니 그냥 넘겼던 기억이 났다.

설마 김기철 네가.

한번 의심을 시작하니 모든 게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선율은 자신이 떠올린 가정이 지극히 나쁜 상상으로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김기철이 영상을 찍은 거야……. 그날 자고 있던 나를, 내 몸을 영상으로 남긴 거라고!’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떤 영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옷이 흐트러져 있던 걸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그날 기철은 선율의 옷을 벗겼다. 그러곤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선율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 있다면 손톱으로 얼굴을 긁어 버렸을 만큼 분노가 차올랐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자 나머지는 저절로 딱딱 맞아떨어졌다. 기철이 유신을 무엇으로 협박한 건지, 유신은 왜 떠난 건지, 그리고 회의 때 왜 그렇게 격분한 모습을 보였던 건지.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나를 위해 그런 거였어. 내가 미워했던 그 모든 행동이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선율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참을 앉아 있는데 불현듯 예전에 기철의 오피스텔에서 봤던 금고가 떠올랐다. ‘여기 뭐 들어 있어?’ 하고 물었을 때 그가 뭐라고 그랬더라.

[내 보물들이야. 너한테도 절대 못 보여 줘.]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전리품을 자랑하듯 묘하게 우쭐거리던 기철의 얼굴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만약 그때 찍은 영상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그곳에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율은 고장 난 것처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애써도 침착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울 때도, 화를 낼 때도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선율이 휴대폰을 들었다.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 7시에 자주 보던 파스타 집에서 만났으면 해.>

몇 번을 지웠다 썼다 반복한 메시지에 기철이 곧장 답을 해 왔다.

<그래. 나갈게. ‘일레 파스타’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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