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주말이었다.
보통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회사에 나가는 편이었지만 오늘 선율은 일부러 알람을 맞추지 않았다.
유신과 밤을 보낸 이후로 몸이 좋지 않았다. 그가 거칠게 다룬 것도 문제였지만 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는지 근육통이 심했다. 어제 사 둔 진통제 한 알을 먹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그날 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었을까.’
이사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어미를 잃은 짐승처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작은 자극에도 발톱을 세우며 누구라도 건드리면 반드시 상처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그에게 붙잡혀 제 모든 걸 넘겨주었던 그 밤, 비명을 삼킨 건 선율뿐만이 아니었다. 아프다고, 나 정말 죽을 것 같다고 그는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왜 그런 건지 물어보지 못했어.’
하긴, 미팅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느긋할 것 같은 평소와 달리 평정심을 잃은 모습이었다. 선율이 동영상을 재생하자마자 노트북을 부숴 버릴 것처럼 닫아 버리던 그는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보였다.
“됐어. 그딴 자식 뭐가 궁금하다고.”
그가 너무 미운데 자꾸만 궁금해진다.
초안 영상을 왜 끝까지 보지도 않고 치워 버렸는지, 그 밤에 널 두렵게 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상처를 내가 준 건지.
어쩌면 선율이 화가 나는 건 그 숱한 궁금증 중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는 그가 미워서일지도 모른다.
“때려치워, 때려치워. 어차피 프로젝트 끝나면 다시 볼 일도 없는 놈인데 무슨 상관이야.”
선율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입맛이 없어 빵이나 사 먹어야겠다 생각한 그녀가 슬리퍼를 꿰고 집을 막 나섰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음? 민서네?”
얼마 전에 그녀에게 황준기의 소식에 대해 물어봤었다. 혹시 새로운 소식이 있나 싶어 선율은 얼른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율이니? 나야, 민서.
수화기 너머 민서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직감한 선율이 얼른 문을 닫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선율아……. 네가 알아봐 달라고 한 거 있잖아. 황준기 말이야.
“응. 준기랑 연락 닿는 애 있대? 준기 지금 어디에 있대?”
―그게…… 어디에 있는지 듣긴 들었는데.
민서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몇 초가 너무도 길게 느껴진 선율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떼려 할 때 민서가 말했다.
―죽었대.
“응?”
―황준기가 죽었다고.
선율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금 제가 들은 말이 확 와 닿지가 않아서 멍하니 입술만 벌리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민서의 말이 흘러들었다.
―네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성환이한테 얘기를 했었거든. 그래서 성환이가 몇 주 동안 좀 알아보고 다녔었나 봐.
“그랬구나…….”
―그런데 좀처럼 준기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원래 사회 나가면 다들 소식이 끊기곤 하잖아. 준기는 졸업하기도 전에 자퇴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 명쯤은 알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정말 아무도 모른다더라고.
그러던 중 어찌어찌 그의 여동생과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그녀가 들려준 말은 충격적이었다. 황준기가 2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
선율의 가슴이 쿵쿵 진동했다. 단순히 알고 지내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놀란 것이라고 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심장이 뛰었다. 나쁜 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황준기는 왜 죽은 거래?”
―그건 나도 몰라.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더래.
“응……. 그렇구나.”
―그런데 좀 이상해, 선율아.
민서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성환이가 알아보고 다닌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김기철한테 연락이 왔다는 거야.
“……기철이가?”
―응. 황준기를 왜 찾느냐고 물어봤다던데?
선율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친구가 제법 많이 다쳤거든요. 숯불에 얼굴이 반 넘게 타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친구를 그렇게 만든 건 내 아들이 아니라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아들입니다.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은 내 아들이 아니라 김한주 회장의 아들, 김기철이에요!]
울부짖던 상미의 목소리가 귓가를 왱왱 울렸다.
기철이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황준기가 ‘조금’ 다쳤다는 것도, 나에 대한 추문을 퍼트린 게 조유신이란 것도.
심지어 그는 황준기가 죽었다는 것마저 알고 있었다.
그래 놓고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그 입술로 프러포즈를 했다.
‘끔찍해.’
그제야 선율은 제가 만나 온 남자가 괴물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유신이 무엇을 상대하기 위해 그토록 독해져야 했는지도.
* * *
황준기의 묘소는 포천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선율은 작은 국화 꽃다발을 손에 들고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초겨울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 쓸쓸하고 차가웠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선율은 유신을 떠올렸다.
‘황준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조유신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거라고, 선율은 생각했다.
지난 8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그날 사건의 당사자였다. 기철이 알고 있다면 유신 역시 알고 있을 거라고 보아야 했다.
‘많이 힘들었겠네.’
유신은 네 살이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황준기와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같은 농구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화실도 바로 옆 화실을 썼다. 같은 산업 디자인 전공자이기도 해서 황준기가 유신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했다.
[넌 황준기 어디가 그렇게 좋아? 많고 많은 동기들 놔두고 맨날 걔랑만 붙어 다니잖아.]
[준기 형 멋있잖아요. 남자답고 운동도 잘하고.]
[멋있긴 개뿔, 완전 불곰 같은 스타일 아니야? 너 은근히 애늙은이 취향이네. 파릇파릇한 동기들 팽개치고 다 늙은 선배들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동기들은 재미없어.]
그러면서 유신은 나른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선율의 허리를 감아 왔다.
[그리고 쫓아다니긴 누가 쫓아다녀요. 지금도 딱 붙어 있는 게 누군데.]
햇살이 찬란한 화실에서 나누었던 달콤한 입맞춤이 떠올랐다. 가슴이 뭉근해지는 그때의 기억을 곱씹던 선율은 어느새 묘소가 있는 산 중턱에 이르렀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부는 묘소엔 몇 개의 봉분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한 봉분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서 있었다.
“주희 씨?”
선율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주희가 맞았다.
“주희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
인기척에 돌아본 주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 역시 이곳에서의 만남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팀장님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러는 주희 씨는?”
“다음 주가 우리 오빠 생일이라서…….”
엉겁결에 대답한 주희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랬군요.”
선율은 씁쓸한 얼굴로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무심결에 묘비석에 쓰인 글자를 읽은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준기……?”
주희가 서 있던 곳이 바로 황준기의 묘소였다. 선율은 너무 놀라 주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황준기……. 황주희? 설마 주희 씨가 준기 동생이에요?”
“놀라셨죠. 저도 이렇게 밝히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유신 오빠한테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유신이랑도 아는 사이예요?”
“그럼 제가 어떻게 바이디오에 입사했겠어요. 전공자도 아닌데.”
선율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어떤 포인트에 놀라야 하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주희가 황준기의 동생이라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그녀가 예전부터 유신과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조유신 너는 얼마나 날 놀라게 할 생각인 걸까.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이제는 그의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기철에 대한 복수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움직여 온 그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주희 씨 입사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꿈에도 몰랐어요.”
“그럴 거예요. 티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으니까요.”
“바이디오에 왜 입사한 거예요?”
“팀장님한테 복수하려고요.”
히끅, 딸꾹질이 나왔다.
“아 물론 팀장님 말고요. 김기철 팀장이요.”
주희는 그렇게 말하곤 시선을 돌려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회한과 슬픔에 선율은 가슴이 무척 아팠다. 스물여섯.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고스란히 와 닿았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말없이 묘비를 응시하던 선율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준기는…… 왜 죽은 거예요?”
주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획한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우리 셋 외에는 아무도 이 일에 대해 알아선 안 된다고 거듭 말하던 유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 선율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숨긴다 해도 어차피 조만간 알게 될 것이었다.
“우리 오빠 그렇게 만든 사람이 김기철이란 건 알고 있죠?”
“네.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어요. 한심하죠.”
“우리 오빠는 그놈 때문에 자살했어요.”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두 귀로 직접 들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율은 가빠지는 숨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채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어째서…….”
“우리 오빠는 유신 오빠를 정말 아꼈어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데도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들어서 나도 알고 있었죠. 그렇게 아끼는 동생을 제 손으로 감방에 집어넣었으니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어요?”
이어진 얘기는 놀라웠다.
사고가 나던 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황준기는 거의 만취한 상태였다. 속이 메슥거려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돌아온 사이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황준기는 황급히 두 사람을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기철은 황소 같은 힘으로 그를 밀쳐 버렸다.
숯 더미 위를 덮고 있던 불판은 기철의 휴대폰을 처박으면서 이미 치워지고 없었고, 균형을 잃은 준기는 곧바로 숯불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오빠는 자신을 다치게 한 게 김기철이라고 증언하려 했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주희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