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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호텔 룸 창가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테이블 위엔 기철에 관련된 자료와 한주그룹에 대한 정보가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김기철. 그리고 김한주.”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저절로 어금니가 악물렸다. 그의 머릿속은 지난 8년간 수십, 수백 번 시뮬레이션했던 계획으로 가득했다. 김한주 부자를 몰락시키고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유신은 하루가 30시간인 것처럼 살아왔다.
“참 지독한 악연이지. 그러고 보면.”
대학 시절 기철과 몇 달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같은 농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보니 일주일에 서너 번은 얼굴을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포지션이 겹쳐 더욱 대할 일이 많았다.
기철은 겉보기엔 다정다감하고 배려 있는 성격이었다. 남자다운 성격의 유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먼저 다가온 것도 그였고 매번 술자리를 제안한 것도 그였다. 유신 역시 처음엔 그가 싫지 않았다. 그 호감도 얼마 가지 않았지만.
유신이 기철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건 1학기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당시 기철은 같은 대학교 통계학과에 다니던 여학생과 잠시 썸을 탔는데, 미팅에서 만난 그녀는 세 번의 만남 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납득할 수 없었던 기철은 과방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때 그가 본 것은 그녀가 어떤 남학생과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걸레 같은 년이 감히 날 엿 먹여?]
기철은 분개했다. 미팅 끝나고 세 번 만났으면 사귀자는 뜻 아니냐며 이건 명백히 양다리라고 화를 냈다. 술에 취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뱉어 대던 기철의 모습을 본 건 유신이 유일했다.
그리고 며칠 후 통계학과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여학생이 사실은 술집에 다닌다는 유의 지저분한 소문이었다. 결국 여학생은 남자 친구와 이별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접한 날 기철은 친구들에게 거하게 술을 샀다.
유신은 기철을 의심했다. 그 소문 혹시 선배가 낸 거냐고 조심스레 묻는 그에게 기철을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뭘? 자업자득이지.]
그 화살이 선율을 향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때 기철을 끊어 내지 못한 게 이토록 질척거리는 늪이 될 줄은 몰랐다.
“유, 유신아. 적당히 하고 좀 쉬어. 그 또라이 새끼 잡는 것도 좋고 내 보, 복수를 해 주는 것도 좋다만…… 몸부터 챙겨야지.”
다이닝 룸에서 과일을 내오는 사람은 바로 복수였다.
모든 걸 체념하고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 유일하게 유신을 바로 일으켜 준 사람.
암담한 감방 생활 중에서도 그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아무것도 없이 사회에 내팽개쳐진 그를 거둬 주고 친형제처럼 돌봐 준 사람이었다. 유신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복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형 복수해 준대요? 내 복수 하려고 그러지.”
“거, 거기 있는 한주그룹 지분율이나 치우고 말해. 그, 그럼 믿어 줄게.”
복수가 포크에 사과를 찍어 억지로 유신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얼마나 읽고 분석을 했는지 너덜너덜해진 자료를 보는 그의 마음이 찡했다.
김기철의 부친이자 한주그룹 회장, 김한주는 복수에게 산업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감방으로 내쫓은 장본인이었다. 그 일로 복수는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연구 기술을 빼앗겼고 무려 4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감방에서 만났다. 그리고 복수를 결심했다.
“김한주 그, 그 인간은 사람 목숨 알기를 체스 판 위의 말보다 가볍게 여기는 놈이야. 지, 지금 우리가 하, 하는 일을 절대 들켜선 안 돼. 네 쪽에서 꾸, 꿈틀하는 걸 알면 당장 밟아 죽이려고 할 거다.”
유신은 위스키로 입술을 적시며 대꾸했다.
“우리 형은 베링거 모터스 상무님인데요. 뭐 꿇릴 거 있나?”
복수는 순간적으로 코끝이 찡해졌다.
우리 형,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뭉클한지.
“꾸, 꿇릴 거 없지! 이 자식,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지킨다. 그, 그러니까 형 믿고 맘껏 나대도 돼!”
말해 놓고 쑥스러워진 복수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그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현관 벨이 울렸다. 10시 정각을 가리키는 분침을 바라보며 복수가 혀를 내둘렀다.
“칼이네, 칼.”
유신이 낮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열어 준 문틈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오빠, 저 왔어요. 복수 아저씨는 도착했어요?”
“어. 들어와.”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가린 채였다. 그 모습이 익숙한 듯 유신과 복수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회의 시작할까요.”
모두가 자리한 후 유신이 입을 열었다.
“이제 사전 작업은 거의 끝났습니다. 김기철 영상 확보했고 퇴사 확인도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세 사람은 김기철과 김한주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을 무너트리겠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뭉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물론 유신과 복수의 인연은 그보다 더 깊고 길었지만.
“기, 김기철이 퇴사하고 나면 보나 마나 하, 한주그룹으로 기어들어 가겠지?”
“십중팔구는 그럴 겁니다. 모친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닦달하는데 언제까지 밖으로만 나돌 수는 없을 테니까요.”
“두, 두 사람이 한데 모이면 우리 쪽에서 치기 쉬워지겠네.”
“그러려고 김기철을 퇴사시킨 겁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여인이 물었다.
“왜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거예요? 어차피 목표는 한주그룹이잖아요. 그냥 확 자빠뜨리면 안 되나?”
후드로 꽁꽁 싸맨 여자의 입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앳되고 명랑한 편이었다. 유신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주그룹이 당수 한 대 날리면 억 하고 자빠지는 곳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나름 재계 300위권의 큰 기업이야. 역풍 맞지 않으려면 신중히 움직여야 해.”
유신이 침착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한선율이 안전해졌다고 판단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여인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김기철 어차피 영상 못 터트릴 거예요. 그거 터트린 순간 자기가 화장실에서 변 보는 장면이 인터넷에 쫙 퍼질 텐데 잃을 것도 많은 사람이 그런 도박을 하겠어요?”
“물론 잃을 게 많은 지금은 그런 도박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도도독. 도도독.
유신의 손가락이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우리 계획대로 한주그룹이 무너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더 잃을 것도 없게 된 김기철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이제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유신은 조급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서둘러서 좋을 거 없어.”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데요.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나오는 놈 비위 맞춰 주느라 그 좋던 입맛도 사라지게 생겼다고요. 그런데 서두르지 말라고? 어떻게 그래요!”
“보다 확실하게 목줄을 틀어쥘 준비를 하잔 거야.”
“난 그냥 확 저질렀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바로 황준기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김기철로 인해 얼굴이 반쯤 불에 타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오빠의 복수를 위해 그녀는 유신과 손을 잡았다. 유신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얘기나 해 봐요.”
“김기철의 영상을 촬영해 둔 것은 최소한의 억지 효과일 뿐이야. 한주그룹을 치기 전에 우선 김기철이 가진 영상부터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해.”
“어떻게요?”
“해킹.”
화장실 몰카로 감방에 들어왔던 문형주는 꽤 유용한 정보를 많이 넘겨주었다. 판매 목적으로 불법 영상을 촬영하는 이들과 달리 본인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영상을 수집하는 이들은 유포보다는 보관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혹시 모를 유실을 방지하고자 USB, 웹사이트 계정, 클라우드 등의 저장 장치에 고루 보관해 놓는 게 그자들의 특징이라고 했다. 때문에 동영상을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 버리고 싶다면 동시에 세 개의 루트를 모두 노려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김기철의 휴대폰이 필요했다.
“그 일은 너한테 맡길게. 할 수 있겠어?”
“어차피 준비는 오빠가 다 해 줄 거잖아요. 짜 둔 시나리오나 얘기해 봐요.”
여인이 유신을 재촉했다.
유신은 상체를 기울여 그녀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언뜻 보기엔 공부를 가르쳐 주는 다정한 오빠 같았다.
“알아들었어?”
유신은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선글라스 안쪽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네, 확실히 알아들었어요. 기회를 한번 만들어 볼게요.”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마.”
“무슨 실수?”
“최종 PT 발표 자료, 마지막으로 손본 거 너라며.”
“그건……!”
여인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유신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경솔했어. 갑자기 자료가 수정됐으면 그 정도는 의심했어야지.”
“김기철이 준 영상인지는 몰랐어요! 박 주임이 만든 건 줄 알았다고요.”
“박 주임 김기철 밑에 있는 사람인 거 몰라?”
“아니, 내가 아이큐 180은 돼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예상하느냐고요. 그리고 사람 하나 안 나오는 3초짜리 화면을 보고 ‘아, 이게 한 팀장이 찍힌 그 영상이구나.’ 그런 걸 어떻게 캐치해요? 그냥 주니까 주나 보다 했죠.”
“주희야.”
유신의 추궁에 여인이 버럭 화를 내며 선글라스를 벗어 던졌다.
놀랍게도 후드 안으로 보이는 얼굴은 주희였다.
바이디오의 카피라이터이자 선율이 가장 아끼는 후배, 황주희.
오빠 황준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신과 손을 잡고 지금껏 1년이 넘도록 기철의 곁을 빙빙 돌며 그를 감시해 온 이 팀의 마지막 멤버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지만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일부러 그런 거였으면 넌 이 자리에 없었겠지.”
“…….”
주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빠, 한 팀장님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요. 그래도 나한테는 준기 오빠의 복수가 우선이에요. 동영상 문제 해결되고 나면 그때부턴 나도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알겠죠?”
유신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어차피 한배를 탄 사이였다.
누구 하나가 내리기 전엔 결코 끝나지 않을 항해.
유신을 향한 주희의 서운한 눈초리를 보며 복수가 애써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