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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악스럽게 선율의 허리를 휘감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이 상황을 빨리 끝내 주길 바라겠지만 헛된 기대 따윈 집어치워요. 난 밑지는 거래는 안 하는 놈이니까.”
“읏!”
그가 힘을 주자 선율의 몸이 밀렸다.
책상을 짚고 엎어진 그녀의 뺨으로 차디찬 철제의 감촉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선율의 얼굴이 책상을 스쳤다. 선율은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울지 마, 한선율. 네가 원한 거야.’
애초에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유신을 만나면 그저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애써 준비한 자료를 보지도 않은 건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건 이사실에 들어선 순간 알았다. 핏발이 잔뜩 서 짐승처럼 번뜩이는 유신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대로 뒤돌아 달아나는 편이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율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준비한 발표인데! 고작 저 하나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심양면 그녀를 도왔던 주희와 2팀 팀원들의 앞날이 걸린 문제였다. 이번 광고는 바이디오에서 올해 수주한 광고 중 가장 큰 계약이었고 그렇기에 전 직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양 팀장이 로비까지 해 가며 제작팀 최고의 실력자를 영입한 것도 이해가 됐다.
선율은 그런 프로젝트의 최종 PT에서 자신이 준비한 자료가 1초 컷 당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일그러진 유신의 눈매가 기철에게 닿아 사납게 번뜩이는 순간 묘한 예감이 뒷골을 스쳤다.
‘이것도 나 때문인 건가?’
억울했다. 답답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잘못인 걸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네가 잘못인 걸까.
난 너를 이해하려 노력했어. 몇 번이나 물었고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래, 단 한 번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는데.”
선율은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책상에 눌린 얼굴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배.”
조금의 배려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이던 유신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등 뒤에 바짝 밀착된 그의 몸에서 용암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선율의 등 위에 제 가슴을 겹친 채 느릿하게 장갑을 벗었다. 그의 맨손이 선율의 얼굴 바로 옆 책상을 짚었다.
“…….”
그의 손등에 난 화상 흉터를 보는 순간 선율은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 징그럽다거나 흉측해서가 아니었다. 반 뼘가량의 그 상처가 마치 유신의 지난 세월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손이 아니라 그의 심장인 것 같아서.
“선배는 아무 잘못 없어.”
“읏…….”
“하지만 선배가 없었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이 손의 상처도, 그리고 내 어머니가 그 빌어먹을 한주그룹 앞에서 2년이나 1인 시위를 한 일도.
유신은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책상에 상체가 엎어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선율을 보니 가슴이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쾌감이 드는 자신이 짐승 같았다. 그녀를 한껏 채우는 순간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미치게 역겨웠다.
나는, 선배.
당신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너를 원망해. 너 역시 피해자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화가 나. 모든 순간을 선택한 건 나였는데…… 다 감당할 자신이 있었는데.
오늘같이 벽에 부딪힐 때면 자꾸만 과거를 돌이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네가 어떻게 되든, 그냥 도망쳤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나는.
그냥 네가 알아주면 좋겠어.
내가 아팠다고, 고통스러웠다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어차피 내게 원하는 건 광고뿐이잖아. 안 그래?”
대답이 없는 그녀가 미워서 유신은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낸다.
“그럼 닥치고 받아들여. 선배가 원하는 거, 줄 테니까.”
유신이 끈적하게 선율의 귓바퀴를 핥았다. 책상에 닿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돌려 혀뿌리를 뽑아 버릴 것처럼 거칠게 키스했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깨물고,연거푸 몰아붙였다.
증오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사랑했다.
그래서 기꺼이 상처를 입히고, 저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 나락을 뒹군다.
갈라지는 통증에 선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제 몸을 탐해서 그런 거라면 좀 나았을까. 그러나 끝없이 들이닥치는 그에게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분풀이를 하듯 몰아치고 또 몰아칠 뿐이었다.
“윽!”
선율은 하얗게 질린 손으로 책상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유신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랑 같이 뒹구는 거 좋아했었잖아. 어때, 지금도 그래?”
잔인한 말로 속을 휘젓고.
“되게 쉽네. 겨우 이 정도로.”
거친 손길로 몸을 헤집는다.
유신은 선율의 엉덩이를 붙잡은 채 무의미한 몸짓을 이어갔다. 그의 분노 앞에서 선율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울지 않으려고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끝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선율이 스커트를 내리며 유신을 노려보았다.
“받았으면 똑바로 처리해.”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흉포함 앞에서 그녀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이번에도 먹튀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대답은 없었다.
피로한 안색으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유신의 뒷모습을 한번 바라본 선율이 비틀비틀 이사실을 나섰다.
* * *
어제 그가 들이닥친 모든 곳이 홧홧했다.
선율은 그의 흔적이 새겨진 몸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빨갛게 부은 입술과 생채기가 난 목덜미.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이토록 초라할 수 없었다.
“최악이다, 한선율. 진짜 갈 데까지 갔네.”
쓰라렸다. 피부의 상처보다 마음이 더.
어제 유신을 도발한 건 반쯤은 오기였다. 설마하니 정말 거기서 자신을 안을 줄은 몰랐다.
[못 본 새 못된 버릇이 생겼네요, 선배.]
그는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실력이 안 되니 몸으로 로비나 하는 여자로 생각했을까. 묵은 욕구를 배출하기 위한 값싼 도구로 치부했을까.
‘적어도 여왕처럼 대접해 주진 않은 건 확실하지.’
선율이 자조하며 쓰게 웃었다.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진 과거에 한없이 다정했던 그가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던.
행여 아플세라 몇 번이고 괜찮으냐고 물어봐 주던. 다음 날 아침엔 피로 회복제와 약한 진통제를 사다가 나란히 머리맡에 놓아주던.
너무나 따뜻했던 그 손이 거칠게 제 안을 휘젓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좋지도, 싫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무로 만든 인형처럼 무감각했고 멍한 눈은 벽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끝나기를 원했지만 이대로 계속되어도 괜찮았고,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의 손길이 닿을 땐 괜히 눈물이 났다.
그 감정이 뭔지 이제 선율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제 마주했던 유신의 상처 입은 눈동자만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양 팀장은 아침부터 희희낙락했다.
“역시 조 이사는 남다르네. 남자야, 남자! 좋아하는 여자라고 편들지도 않고, 그렇게 공명정대하고 일 처리 깔끔한 사람 처음 봤다니까?”
어제 최종 PT가 끝난 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유신은 비딩의 최종 승자를 가리지 않고 자리를 떴지만, 회의에 들어갔던 모든 이가 1팀의 승리를 점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팀장은 좀 아쉽겠어. 열심히 준비했는데 까 보지도 못하고 1초 만에 찍.”
커피를 내리고 있는 선율을 보며 양 팀장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선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까지 유신에게선 따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제 그런 짓을 해 놓고 입을 싹 닦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결과를 뒤엎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마. 이번에 우리 쪽 기획안이 워낙 좋아서 그렇지 한 팀장 실력도 나쁘진 않으니까. 오케이?”
양 팀장이 선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선율은 인상을 쓰면서 그에게서 멀찍이 물러섰다. 처자식도 있는 분이 왜 이렇게 스킨십이 잦은지, 하여간 말버릇이며 손버릇이며 좋은 게 하나도 없다.
그때 양 팀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이쿠, 우리 CD님한테 전화가 왔네. 아마 최종 PT 결과를 알려 주시려나 본데 한 팀장도 같이 들을래?”
양 팀장이 전화를 수신해 스피커 모드로 돌렸다. ‘실력으로’ 선율을 꺾었다는 걸 팀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예, CD님! 저 양 팀장입니다.”
―어어, 양 팀장. 어제 비딩 결과가 나왔는데 말이지.
어쩐지 방성범 부장의 목소리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불안해진 양 팀장이 눈알을 굴리는데 성범이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최종 PT를 다시 한번 해야 할 것 같아.
“예에?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제 조 이사님이 저희 쪽 의견으로 픽한 거 아니었어요?”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좀 의외네. 조 이사가 1팀 안건을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사실이야. 어제 받은 자료 그대로 윗선에 올렸다고 하더라고.
“그런데요?”
―윗선에서 까였다나 봐.
“예에?”
양 팀장의 눈이 붕어처럼 커졌다.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결과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젠 분명 저희 팀 의견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사실 조 이사가 최종적으로 결과 발표를 한 건 아니잖아. 조 이사 딴에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나 보지.
“아무리 그래도……!”
―이 주일 후에 다시 PT 날짜 잡혔어. 그렇게 알고 잘 준비하도록 해.
희비가 교차했다.
득의양양하던 양 팀장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선율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조유신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네.’
그는 결과를 뒤집지 않았다. 다만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선율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결과를 뒤바꾼 게 선율의 입장에서도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정정당당한 승부의 결과였다면 군말 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2주간 준비한 결과물을 단 1초밖에 보여 주지 못했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로비라는 걸 했다. 그러곤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쨌든 승부는 원점.
양 팀장에겐 미안하지만 선율은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다.
“팀장님, 이번엔 제대로 한번 붙어 보죠.”
선율이 양 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양 팀장은 선율의 손을 잡지 않은 채 따져 물었다.
“한 팀장! 한 팀장이 혹시 조 이사 움직인 거 아니야?”
“방금 전까지 본인 입으로 그러셨잖아요. 그렇게 공명정대하고 일 처리 깔끔하게 하는 사람 또 없다고.”
“그거야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의 일이지!”
“윗선에서 잘랐다는데 별수 있나요. 직급이 높다 뿐이지 조유신 이사도 일개 회사원일 뿐인데 까라면 까야죠.”
선율은 뻗은 손을 머쓱하게 되돌리며 돌아섰다.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못한 양 팀장이 뒤에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난 인정 못 해! 네가 손쓴 거 맞지? 한 팀장! 야, 한선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