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는 어머니에게 죄인이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다그치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연성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네방네 떡을 돌렸던 어머니는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중퇴하던 날 퍼석하게 마른 손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퍽, 퍽,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도 않아서 그제야 어머니가 많이 늙으셨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머니 복상미.
그녀는 올해 쉰둘이었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교편을 잡고 수학을 가르친 그녀는 집안에서도 엄격한 부모였다. 여자 혼자 키운 자식 소리 듣게 하지 않으려 바쁜 와중에도 항상 깨끗한 옷을 다려 입혔고 그가 말썽이라도 치는 날엔 매를 들기도 했다.
벌겋게 부어오른 유신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홀로 숨죽여 울면서도 아들에겐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는 강인한 어머니.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덩그러니 남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슈퍼우먼.
그런 어머니가 한주그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건 2년 전에 알게 됐다. 미국에서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그림만 그리던 시절이었다.
[어머니, 왜.]
차마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전화를 걸었을 때 어머니는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네가 한 짓이 아니잖니.]
어리석은 아들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했다. 그날 황준기를 떠민 진범이 기철이라는 것도, 그에게 동영상 원본을 받는 대가로 대신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것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황준기에게 연락이 왔었어. 그날 자기를 떠민 게 네가 아니라 김기철이었다고, 늦게 말씀드려 죄송하다더라.]
아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경찰에 잡혀간 후 어머니가 황준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었다는 것도, 제발 합의를 해 달라 매일같이 그의 집 앞을 찾아갔다는 것도,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 * *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요?”
전화를 받는 유신의 손아귀가 하얗게 질렸다.
―네. 한주그룹 앞에서 실신하셨는데 다행히 지금은 의식을 찾으신 상태이고요. 수액 맞고 가시라고 했는데 그냥 퇴원하겠다고 강경하게 말씀하셔서 보호자에게 연락부터 드리겠다고 했어요.
전화를 건 사람은 한주그룹 근처의 병원 간호사였다.
“거기가 정확히 어딥니까. 제가 지금 가겠습니…….”
―올 거 없어.
“어머니?”
난데없이 들려온 상미의 음성에 유신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날이 좀 추워져서 그런 모양이야. 바로 집에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끊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정말 괜찮은 건 맞는지 하나도 묻지 못했는데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하얗게 깜빡이는 액정은 딱 단절된 모자 사이 같았다. 수화기 너머에 이제 어머니가 없다는 게 사무치게 와 닿았다. 유신은 전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출소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했을 때 상미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신이 고의로 황준기를 밀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인생을 갈아 바쳐 키운 아들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깊이 실망했다.
아마도 그래서였겠지만, 대뜸 미국으로 가겠다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넉 달 전 귀국한 유신이 찾아갔을 때 상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 순간 유신은 제가 어머니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돈 보내라고 했니? 이 매정한 놈아……. 철딱서니 없는 자식아! 왜 이제야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머니는 철인이 아니었다. 슈퍼우먼도 아니었다.
그저 아들이 바르게 자라기만을 원했던 평범한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간 유신이 미국에서 보내 준 돈을 꼬박 모아 그의 명의로 집까지 사 두었다는 어머니는 유신이 돌아온 후로도 1인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 그냥 믿어 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그녀는.
[넌 네 할 일을 해. 난 내가 할 일을 할 테니.]
늘 그렇듯 강인한 의지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런 어머니가 쓰러졌다.
나 때문에. 빌어먹을 나란 놈 때문에.
“으아아아아아아!”
유신은 그대로 책상을 쓸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내 주변의 모두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걸 알았더라면 좀 다른 선택을 했을까?
교감 승진을 앞두고 있던 어머니가 불명예퇴직을 하게 된 것도, 할머니의 치매가 악화된 것도……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깔고 앉은 것이 제 가족인 것만 같았다. 그들의 인생은 제 무릎에 짓눌려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 나 하나만 고통받으면 될 줄 알았다고.’
미국에서 가족의 소식을 전해 들을 때면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선율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녀를 사랑한 저 자신이.
왜 하필 너였을까.
왜 하필 너를 사랑해서 이런 엿 같은 상황을 겪어야 해. 그냥 처음부터 경찰에 사실을 말할 걸 그랬나.
뭐든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같잖은 자신감이 모든 걸 망쳤다.
‘아냐. 그랬다면 영상이 먼저 풀렸을 거야.’
‘무슨 상관이야! 이제 그녀는 나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살 텐데.’
그 안의 진심들이 살벌하게 다툴 때면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새카맣게 썩었다. 검은 물이 되어 발목부터 차오를 때면 자다가도 익사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유신은 주먹에 피가 배일 정도로 책상을 내리쳤다.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았다.
지난 세월은 견뎌 낸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낸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쾅!
그때 이사실 문이 열렸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유신은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기를. 제발.
“이번 결과 납득 못하겠어. 다시 생각해 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유신은 속에서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붉어진 얼굴을 보니 어디선가 술 한잔하고 온 모양이었다.
“나가요. 선배랑 노닥거릴 기분 아니니까.”
“나라고 기분 좋아서 온 줄 알아?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만든 자료, 너 고작 1초밖에 안 봤어. 뒤에 뭐가 나오는지 알긴 해? 우리가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라 버릴 수가 있어!”
“나가라고.”
“광고 콘셉트에 대해 만족했었잖아. 스크립트도 다 검토한 거잖아. 다 OK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 이런 게 갑질이라고, 알아?”
“선배, 좀!”
유신이 와락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만하고 나가라고.”
……제발.
그러나 선율은 지금 유신의 가슴에 치민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불과 몇 시간 전 유신이 까 버린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 그거 준비하느라 2주간 밤새웠어. 네가 고작 1초 보고 잘라 버린 그거, 나랑 주희 씨가 밤잠을 갈아 바쳐 만든 거라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해?”
“그딴 거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한 건 너지, 한선율.”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모르면서, 내가 널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하는지 모르면서 넌 또 나를 원망해.
네게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나 자신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해명할 수 없는 내 처지가 참 개 같다.
지극히도 모순이다. 너를 지키려면 네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우리 걸로 선택해 달라고 떼쓰는 거 아니야. 우리가 만든 자료, 끝까지 보기만 해 달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아무것도.”
유신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마. 필요 없으니까.”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유신은 등을 돌려 버렸다.
선율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지금 유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았더라면 이따위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것도 필요 없어?”
스르륵.
그녀의 어깨에서 코트가 떨어졌다.
불 꺼진 통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 유신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선배, 제발.’
제발 그냥 내버려 달라는 내 부탁을 너는 이렇게 쉽게 흔든다.
허리를 감아 오는 그녀의 손길에 온갖 감정이 물밀듯 범람했다.
“미쳤습니까?”
“왜, 너 좋아하는 거잖아.”
몸으로 로비라도 하겠다는 건가.
“못 본 새 못된 버릇이 생겼네요, 선배.”
“원래 클리셰가 잘 먹히는 법이니까.”
선율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한 번 줄게. 이거 원해서 나한테 접근한 거 아니야?”
그녀는 유신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어제 김기철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나머지 정신이 회까닥한 것 같다고.
이번 프로젝트는 기획팀인 선율과 제작팀인 기철이 함께 준비한 것이었다. 제게 모욕감을 준 두 사람이 미운 나머지 프로젝트를 보지도 않고 깐 거라고 생각하니 선율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선율이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엄한 데 분풀이하는 모양인데, 한 번 줄 테니까 깨끗하게 먹고 떨어져. 네가 1초 보고 끊어 버린 그 영상, 나한테는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 거야. 네가, 읏!”
유신은 거칠게 선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만 남은 굴곡 있는 몸매가 그의 책상 위로 엎어졌다. 유신은 그녀의 팔을 뒤로 잡은 채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러면 내가 거절할 줄 아나 본데, 천만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오해를 유신은 풀어 주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스커트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좋아요. 기회 다시 주죠.”
매너는 기대도 하지 말라는 듯 그가 흉포해진 하체를 곧바로 붙여 왔다.
“서로 간절한 걸 교환하는 게 거래의 기본이니까.”
준비도 되지 않은 선율의 몸을 그가 거칠게 휘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