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25)화 (25/85)

25

‘설마.’

선율이 띄운 정지 화면을 본 순간 유신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직 까만 화면에 뿌연 노이즈뿐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보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유신은 반사적으로 기철을 바라보았다.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며 빙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유신은 확신했다.

‘그 영상이 맞구나.’

8년 전 단 한 번 스치듯 본 영상이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과 분노는 유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니까.

“그럼 영상 보시겠습니다.”

선율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유신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저 영상이 왜 저기에 있는 건지, 선율이 왜 제 손으로 그걸 튼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신은 숨도 쉬지 못한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부스럭부스럭 어둠을 헤치는 카메라 앵글. 살짝 헐떡이는 숨소리와 정제되지 않은 노이즈.

8년 전 보았던 그 화면과 똑같았다. 처음으로 몰카의 백업본이 등장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기철이 정말 그걸 가지고 있을 줄은.

유신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더듬더듬 제 목을 더듬었다. 들이켠 숨을 뱉을 수가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걸 지키기 위해 그동안 아등바등해 온 제 세월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만.”

탁!

유신은 황급히 노트북을 덮었다.

계산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인 몸이 본능대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 영상이 쭉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단 몇 초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씨익.

파랗게 질린 유신의 안색을 보고 기철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봤냐? 봤지?’

유신은 장갑이 와락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조 이사님? 아니, 갑자기 왜……!”

난데없이 중단된 영상에 방성범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아한 시선이 한곳으로 쏟아졌다. 유신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에 안 듭니다.”

콱 억눌린 음성이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네? 아직 다 보지도 않으셨는데요?”

“도입부부터 엉망입니다.”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미 회의는 중단되었고 애써 자료를 준비한 선율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문 모르는 주희는 제 탓인가 싶어 울상이 되었고 상대편 팀원들의 안면은 희희낙락했다.

“이사님, 뭐 하시는 겁니까?”

선율이 굳은 얼굴로 노트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유신은 노트북을 덮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영상의 뒷부분에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혹시라도 기철이 무슨 장난을 해 놓은 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다시 영상을 재생할 수가 없었다. 그게 기철의 농간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암전이 되어 버린 머리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뱉어 냈다.

“광고의 이미지는 초반 3초면 끝이에요. 2팀이 준비한 영상은 3초 동안 아무런 임팩트도 주지 못했습니다. 뒤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전혀.”

“이사님, 그래도 준비한 영상은 끝까지 보시는 게…….”

“보고 싶지 않다고.”

끝까지 만류하는 선율을 그가 노려보았다. 악다문 입술에서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샜다.

“예, 그럼…… 최종 비딩 결과는 1팀의 승리로 결정하시겠습니까?”

“나중에 합시다.”

성범의 물음에 유신은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자리에 남은 팀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 * *

“하아.”

유신은 비상계단에 걸터앉아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아까부터 명치에 꽉 막혀 있던 호흡이 신음처럼 터졌다. 고장 난 것처럼 펄떡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그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김기철 이 개새끼.”

회의실에서 영상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기는 것 같았다. 빙글거리는 기철의 눈빛을 마주했을 땐 정말이지 한달음에 달려가 목덜미를 틀어쥐고 싶었다.

기철이 어떻게 그 영상을 발표 자료에 잘라 붙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의도만큼은 분명했다.

그건 경고였다. 한선율 영상이 아직 내 손에 있다고. 그러니 알아서 기라고.

‘생각이란 걸 해. 조유신.’

유신은 착잡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영상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설마설마했던 우려가, 선율을 곁에 두고서도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이유가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기철이 찍은 영상은 1분 정도의 몰카였다. 가을 MT 장소였던 대성리의 한 숲속 펜션. 마당 너머 주차해 두었던 차에서 카메라를 꺼낸 순간부터 술에 취해 완전히 뻗어 버린 여학우의 방까지 이어지던 우거진 길. 술에 취해 헉헉대는 기철의 숨소리와 마구 흔들리던 앵글, 그리고 그 끝엔 선율의 몸이 있었다.

감방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영상 원본을 건네받았으나 유신은 차마 그 영상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기철이 유신의 눈앞에 당당히 그것을 까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엿 한번 먹어 보라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어. 김기철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한국으로 돌아오길 결심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김기철 같은 버러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선마저 벗어던져야 했다.

띠링.

손에 꽉 쥐고 있는 휴대폰으로 동영상 하나가 전송되었다. 땀에 젖은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던 유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밍 한번 죽여주네.”

그의 입가에 비로소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 * *

“아오, 배야. 갑자기 배가 왜 이렇게 아파?”

기철이 인상을 쓰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양 팀장이 발표를 시작한 때부터 부글거리던 속이 나중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끓었다. 마침 미팅이 일찍 끝난 덕에 그는 추한 꼴 보이지 않고 화장실로 직행할 수 있었다.

미팅 룸과 같은 층에는 화장실이 두 개 있었다. 처음 간 곳에 ‘청소 중’이란 팻말이 놓여 있는 걸 보고 기철은 쌍욕을 하며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그곳은 열려 있었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세 개의 칸 중 열려 있는 한 곳으로 향했다.

바지춤을 내리자마자 그토록 그를 괴롭힌 것들이 물처럼 쏟아졌다. 적막한 화장실 안에 온갖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종종 폭죽도 터졌다. 한참이나 용을 쓴 끝에 그가 수척해진 얼굴로 화장실을 나섰다.

“아이씨, 배 아파 뒤지겠네. 조유신 그 새끼 내 커피에 약이라도 탄 거 아니야?”

“맞아.”

“악, 깜짝이야!”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보인 훤칠한 인영에 기철이 기겁을 했다. 그는 가까스로 벨트를 추스르며 유신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뭘 그렇게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독약도 아닌데.”

유신이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아귀 안에 ‘싹비워’라고 적힌 관장약이 들려 있었다. 사색이 되었던 기철이 그제야 코웃음을 쳤다.

“왜 이래, 조유신. 아까 그 동영상 보고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그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빈정댔다.

“설사약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복수치곤 너무 치졸하지 않냐?”

“복수라고 누가 그래.”

유신은 싸늘하게 뇌까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

“국제 정치상의 원리 중 이런 게 있지. Balance of Power. 국가 간에 힘의 분포가 균등한 상태.”

그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순간 기철은 와락 소름이 끼쳤다.

“무, 무슨 개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즉, 네 쪽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내 손에도 핵무기를 쥐겠다는 뜻이야. 언제든지 터트릴 수 있도록.”

팡.

유신이 입술을 오므렸다 단번에 터트렸다. 밀착되었던 입술이 벌어지며 비눗방울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야 딴짓을 못하겠지?”

회의실에서 하얗게 질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에 기철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게다가 저것.

“더러워 죽겠네. 대체 뭘 잘못 처먹은 거야?”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낯설지가 않다. 푸드덕푸드덕, 팡, 푸드덕.

“그, 그거 뭐야? 이리 내!”

기철은 미간을 좁히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유신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필사적인 그의 노력은 유신에게 가로막혔다.

기철이 손을 뻗은 순간 그의 멱살을 낚아채 팔꿈치로 목덜미를 찍어 누른 유신이 그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으르렁댔다.

“찍혀 보니 기분이 어때?”

“이, 이 미친 새끼야! 그걸 어디다 쓰려고……!”

“글쎄. 인터넷에 확 뿌리기엔 너무 더럽고 돈도 안 될 것 같은데. 삼시 세끼 밥시간마다 전송해 줄까? 아님, 훗날 네 결혼식장에서 틀어 줘?”

“으윽.”

유신이 누른 팔에 힘을 주자 기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숨이 막힌 그가 캑캑대며 발버둥 쳤다.

“네, 네가 그딴 거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가 한선율 동영상 못 풀 거 같아? 어, 어차피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온 거 나인지 알 게 뭐야!”

“이거 하나만 있을 것 같습니까?”

“뭐?”

마침 미팅 룸에서 방성범 부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우르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신은 천천히 팔에 힘을 풀었다.

“사직서 제출해.”

그러곤 기철의 어깨를 털어 주는 척하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준비한 다른 한 가지 선물은 퇴사하는 날 알게 될 겁니다.”

비틀.

기철은 현기증을 참지 못하고 벽을 짚었다.

망할 놈의 설사병이 또다시 배 속에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 * *

베링거 모터스 한국 지사.

모두가 퇴근한 후 텅 빈 집무실에 유신은 홀로 앉아 있었다.

통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언제나처럼 반짝였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도 부지런히 달리는 차들은 그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숨 가쁘게 느껴졌다.

유신은 투명한 잔에 따른 위스키를 입술로 가져가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살짝 흐린 하늘을 물들인 달빛이 오늘따라 서글펐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알코올의 기운을 느끼며 그가 고개를 젖혔다.

‘하루가 징글징글하게 길다.’

언젠가부터 술 없이 잠드는 게 힘들었다.

베링거 모터스의 비밀 병기가 되어 육여 년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디자인만 뽑아내고 살았다. 창작의 고통은 제 영혼을 갈아 내는 것과 같아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 세상에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갔다.

성공해야 했다. 힘이 있어야 제 인생을 다시 일으킬 수 있으니까. 힘이 있어야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힘이 있어야…… 그녀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른 채 디자인에 몰두했다. 입사 6년 만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당당히 이사 명함을 갖게 된 날, 그는 반짝이는 명함을 손에 쥐고 한참을 울었다.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유신이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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