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24)화 (24/85)

24

다음 날, 기철은 수척해진 얼굴로 회사에 나타났다.

어제 있었던 소란 때문인지 로비에서 사무실까지 올라오는 길에 마주친 모든 사람이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두 명 이상 모인 사람들만 보면 제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누군가 씩 웃기만 해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로 힘들어하던 선율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내가 내 무덤을 팠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 괜히 선율과 사귀었다고 소문을 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개쓰레기라서 차였다, 예비 시모 갑질이 보통이 아니었다더라, 사내 연애 뽀록낸 것도 김 팀장 자작극이었다던데?’

어제 유신이 단 몇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 버린 탓에 저만 피해를 보았다. 모든 게 사실이라 달리 변명할 수도 없어서 기철은 그저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긴 하루가 끝나고 대다수의 직원이 퇴근했다. 모레 있을 최종 PT를 준비하느라 선율은 아직 자리에 남아 있었다. 빌딩 조명이 소등되고, 마지막으로 주희가 사무실을 나서는 시간까지 기다리던 기철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다가섰다.

“한 팀장,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자료 마지막 부분을 검토하느라 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있던 선율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할 얘기 있으면 사내 메신저로 하시죠. 보다시피 매우 바빠서.”

“잠깐이면 돼.”

“싫습니다.”

기철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선율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선율은 가시 돋친 손길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왜 이래요?”

“잠깐 대화 좀 하자고. 이제 나랑 얘기 안 할 거야?”

“메신저로 하세요.”

“사적인 거야.”

“그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고요.”

“정말 너무하네. 사과든 변명이든 기회를 줘야 할 거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야. 조유신이 덥석 돈을 받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기철은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이건 숫제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아무리 제가 잘못을 했기로서니 그래도 사귄 정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매몰찰 수가 있나.

선율이 끝까지 알은체하지 않자 기철이 포기하고 돌아섰다. 모욕감을 느낀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진짜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소리 나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의 자리에서는 파티션으로 가려진 선율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별 같잖지도 않은 게 여왕이라도 된 듯 구네.’

그가 가방을 열어 까만 선을 꺼냈다. 휴대폰에 잭을 연결하고 모니터를 켜는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스쳤다.

밝아진 모니터 화면으로 휴대폰에서 송출된 영상이 맺혔다. 8년 전 술에 취해 잠든 선율의 몸을 더듬던 바로 그 영상이었다. 어두운 화면이 지나가고 이윽고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찹쌀떡 같은 피부를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르는 장면을 보며 기철은 오른손을 바지 안으로 가져갔다.

‘네가 아무리 뻗대 봤자 내 밑에 깔린 신세라고. 알아?’

화면 속 선율과 눈앞의 선율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철은 낄낄댔다. 저를 벌레 취급하며 상대도 해 주지 않는 선율에 비해 영상 속 그녀는 얼마나 음전한가.

영상 속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하나씩 점령해 가며 기철은 쾌감에 휩싸였다. 묘한 우월감에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씨부럴, 존나 아깝네. 이 좋은 걸 풀어야 한다니.’

기철은 영상을 노려보며 끝없이 손을 움직였다.

이 은밀한 유희도 오늘이 끝이었다.

영상에 담긴 선율을 독식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 * *

최종 PT 당일.

1차 PT 때 컨펌받은 기획안을 바탕으로 제작한 광고 영상 초안을 공개하는 날이었다.

주희로부터 최종 자료를 전송받아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선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희 씨, 잠깐 이리 와 봐요. 영상 도입부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아, 그거요.”

주희가 초콜릿을 우걱우걱하며 다가왔다.

“도입부에 임팩트가 좀 없는 것 같다고 제작팀에서 수정을 했더라고요. 자료 보셨죠? 1인칭 시점으로 어두운 밤길을 지나가는 장면인데 요새 게임 광고에서 많이 써먹는 기법이거든요.”

“화면이 너무 뜨지 않아? 흔들림도 심하고 노이즈도 있어서 원 버전이랑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아직 초안이라 그 부분은 나중에 수정해도 될 것 같다고 하네요. 그래도 신박하지 않아요? 홀로 새카만 밤길을 지나가다가 숲 한가운데서 샛노란 눈동자를 딱 마주친다! 풀 피겨 샷으로 수풀에서 길게 몸을 일으키는 새카만 흑표범, 곧바로 프레임 아웃 해서 도로를 질주하는 슈퍼 스터드로 등장하는 거죠.”

주희가 꿈을 꾸는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그녀는 카피라이터지만 광고 프로젝트 특성상 제작팀과 늘 함께 움직이다 보니 영상 제작에도 관심이 많았다. 최종 PT를 앞두고 1팀과 2팀이 각각의 제작팀과 함께 움직였는데, 선율과 주희가 함께 제작한 스토리보드를 제작팀이 간략히 영상화한 버전을 주희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모양이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은데, 음.”

솔직히 선율은 바뀐 버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고작 3초 정도 삽입된 부분이지만 앞부분의 영상이 조화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만든 영상에 비해 화질도 떨어지고 아마추어가 찍은 연습 영상을 갖다 붙인 것 같았다.

“에이……. 팀장님 표정 보니 별로인가 본데요. 영 거슬리면 처음 버전으로 가도 상관은 없어요! 제작팀에 다시 수정 요청할까요?”

주희가 얼른 다녀오겠다는 듯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잠시 고민한 선율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지금 바꾸기엔 시간이 촉박하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녀가 USB를 갈무리했다. 고작 초안이니 언제든 수정 가능한 부분이고 1차 PT 때 광고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니 스토리보드에 힘을 주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주 나쁘지는 않아. 제작팀이 생각한 의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걸로 가자.”

“정말요?”

“응.”

귀찮은 일을 덜게 된 주희가 반색했다.

‘다행이네. 발표 앞두고 또 수정하려니 눈앞이 깜깜했는데.’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두 시간 전, 선율에게 제출할 최종 자료를 분주하게 점검하고 있을 때 제작팀 박 주임이 찾아왔다.

[주희 씨, 어젯밤에 보낸 광고 초안 확인하셨죠? 거기에 수정 사항이 있어서요.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박 주임이 수정한 영상을 보여 주며 말했다.

[도입부를 좀 바꿔 봤거든요. 요새 카카올게임즈에서 히트 친 광고 있죠? 초주검이 되어 비틀비틀 걷던 전사가 광휘의 검으로 다시 일어나는 장면.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초반에 화면이 많이 흔들리는 게 오히려 몰입도를 높여 주는 거죠. 임팩트 있잖아요.]

꽤 흡인력 있는 도입부에 주희가 집중하며 영상을 감상했다.

[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한 팀장님께 최종 컨펌받고 다시 말씀드려도 되죠?]

[그럼요.]

[메일로 바로 보내 주세요.]

그때 박 주임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기철 팀장님 말대로 붙여 놓으니 꽤 괜찮기는 하네. 그런데 팀장님은 왜 자기 아이디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평소엔 생색내기 좋아하시는 분이 별일이네.’

영문도 모른 채 기철에게 이용당한 박 주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돌아 웃는 기철의 음흉한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오후 4시.

미팅이 시작되었다.

광고주인 유신을 필두로 좌측에 양 팀장을 비롯한 1팀이, 우측에 선율과 기철, 주희를 비롯한 2팀이 자리했다.

유신은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어깨에 걸친 코듀로이 코트도, 손에 낀 가죽 장갑도, 살짝 오만한 듯한 인상도 똑같았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턱짓하자 밖에서 그의 수행 비서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1팀과 2팀, 각각 다섯 명의 팀원 앞에 빠짐없이 커피를 놓아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마시면서 합시다.”

팀원들은 반색하며 커피에 빨대를 꽂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팀원들 취향에 딱 맞춘 음료 세팅이었다. 오후엔 진하게 마시는 선율을 위해 아메리카노 투 샷, 달달한 걸 좋아하는 주희에게 바닐라 라테, 기철에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준비되었다.

제 취향까지 정확히 고려한 주문에 기철이 힐끗 유신을 바라보았다. 유신은 기철을 향해 입꼬리를 살짝 당겨 웃었다.

‘재수 없는 새끼.’

기철은 픽 코웃음 치며 빨대로 음료를 쭉 한번 빨았다.

발표 차례는 1팀부터였다.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나선 양 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먼저 그는 1팀이 선정한 테마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마친 후 스토리보드를 화면에 띄웠다. ‘가장 조용한 질주’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웅장하고 세련미 넘치는 구성이었다. 각각의 화면엔 세세한 콘티가 곁들여 있어 영상을 보기 전인데도 머릿속으로 쫙 화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선율은 1팀에서 제작한 스토리보드를 꼼꼼히 살펴보고 제 발표에서 추가할 부분을 체크했다.

“마지막으로 초안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양 팀장이 자신만만하게 영상을 재생했다.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운 30초가량의 영상은 블랙 앤 골드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고급스러움을 뿜어냈다. 특이한 건, BGM이 없었다. 회의실을 가득 채운 적막에 양 팀장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보셨다시피 저희 광고엔 BGM이 없습니다. 대신 슈퍼 스터드의 엔진음이 들어갔죠.”

그가 볼륨을 높이자 미세한 엔진음이 들려왔다. 시끄럽다기보단 부드러웠고, 기계음임에도 불구하고 거슬리지 않았다.

“가장 조용한 질주, 라는 모토에 가장 걸맞은 BGM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란 법석한 광고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오히려 시선을 끌게 될 겁니다. 소음 사이의 공백이 순간적인 몰입도를 높여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영상에 선율은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양 팀장이 짬밥을 허투루 먹은 게 아니네.’

1차 PT에서 2팀에게 패배한 까닭에 테마를 크게 손보거나 아예 바꿔 버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양 팀장은 처음 내건 주제를 밀고 나가는 걸 선택한 것이다. 바이디오에서 가장 실력 있는 제작자가 1팀에 합류한 덕에 그의 뚝심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러면 굉장히 찜찜해지는데.’

1차 비딩에서 호응을 얻었던 게 2차에서 뒤집히는 결과는 허다했다. 유신의 얼굴을 보니 제법 흥미가 동한 표정이라 더욱 초조했다. 선율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팀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선율은 양 팀장과 마찬가지로 스토리보드를 먼저 화면에 띄웠다.

“2팀의 캐치프레이즈는 ‘이건 신차가 아니다. 신무기다.’입니다. 슈퍼 스터드의 남성미와 야성성을 강조했죠. 첫 화면은 비틀거리는 카메라가 어둠 속을 헤치는 장면입니다. 좌우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보이죠. 뭔가에 쫓기는 사람이 헉헉거리며 숲속을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제작팀에서 발표 직전 삽입한 부분을 설명하곤 선율이 말을 이었다.

“철저히 1인칭 시각으로 찍은 다큐의 도입부로 시선을 끌어 준 후 수풀 한가운데서 샛노란 짐승의 눈동자를 마주칩니다. 블랙과 옐로우의 대비로 강렬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합니다. 그런 후 프레임 아웃.”

포인터를 누르자 도로를 질주하는 슈퍼 스터드의 위용이 당당히 드러났다. 조용함을 강조한 1팀과 정반대로 스피디함을 강조한 구성이었다.

“이번 광고 콘셉트가 ‘신무기’인 만큼 과감한 화면 구성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무언가에 쫓기다가 앞에서 탁 라이트가 켜지는 거죠. 숲길에서 번뜩이는 표범의 눈동자를 맞닥뜨린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율이 초안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스크린에 뜬 정지 화면을 보고 유신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 걸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영상 보시겠습니다.”

선율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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