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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23)화 (23/85)

23

선율은 이제 기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젠틀한 얼굴을 하고 감쪽같이 자신을 속여 왔다.

[김기철이랑 결혼하지 마. 상상 이상으로 나쁜 새끼야. 선배에게 상처만 줄 거라고.]

예전에 유신이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순진한 얼굴에 가려진 본심을 왜 지금껏 보지 못했는지. 저런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던 지난 시간이 미치도록 후회됐다.

기철은 굳어 버린 선율의 얼굴을 보고 이죽거렸다.

“그래, 한선율 네 짐작이 맞아. 황준기 그렇게 만든 거 조유신 아니고 나야. 그런데 쟤가 왜 나 대신 감방에 갔을까? 말해 줘?”

“아가리 닫아. 여는 순간 죽여 버릴 거야.”

유신이 선율의 앞을 가로막으며 으르렁댔다.

“야야, 흥분하지 마. 아직 입도 벙긋 안 했는데?”

“입 안 닥쳐?”

“선율아, 잘 들어.”

기철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선율은 지금 이 순간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진실이 눈앞에 있는데 기철의 입에서 나올 말이 끔찍이도 두려웠다.

“조유신이 나 대신 감방 가면서 뭘 하나 받아 갔거든. 그게 뭐냐면…….”

“이 개새끼가 진짜.”

퍽!

기철이 입을 떼자마자 유신이 주먹을 휘둘렀다.

턱을 가격당한 기철의 입에서 팍 핏물이 튀었다. 기철은 저항하지도 않은 채 선율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봤냐? 조유신 발광하는 거.’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선율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퍽, 퍽!

유신이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는 그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광분하자 기철의 하얀 얼굴은 금세 피떡이 되었다.

“조유신 그만둬!”

선율은 급한 대로 유신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나 그의 거친 몸놀림에 떠밀려 오히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읏!”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신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으나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선율의 옷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유신의 눈동자가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선배 괜찮아?”

바닥에 뻗어 있는 기철을 내버려 두고 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선율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는데 등 뒤에서 키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이야.”

유신의 몸이 굳었다.

“이 새끼 우리 엄마한테 돈 받았어.”

키득키득. 낮은 조소가 피 묻은 입술 사이로 흘렀다.

“크큭, 선율이 너도 봤지? 얼마나 뒤가 구리면 말만 꺼내도 지랄 발광을 하냐. 돈 몇 푼에 대신 감방 들어간 게 그렇게 쪽팔려? 왜, 그렇게 적은 돈은 아니었는데.”

유신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기철이 피로 범벅이 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 할 테면 해 봐. 몰카 영상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한선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철의 도발에 유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살인 욕구가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정말이야?”

충격을 받은 선율이 더듬더듬 물었다.

“아니지? 정말 돈 받고 대신 감방 간 거 아니잖아. 김기철이 거짓말한 거라고 말해!”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설마하니 이유가 그런 것일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선배…….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유신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쪽에선 기철이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굳어 버린 유신의 눈을 쳐다본 그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어쩔래? 한선율 지킬래, 네 자존심 지킬래?’

유신은 눈을 감았다.

‘엿 같네, 진짜.’

또다시 원점이다.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많았지만 그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였다. 한선율. 그녀를 위해서 수없이 패배했던 과거가 또 한 번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 쪽팔리게 하네, 진짜.”

짙은 속눈썹이 내리깔린 얼굴이 산 사람 같지 않게 창백했다. 반듯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린 순간 선율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김기철 말이 맞아.”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는 짐승의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돈 받고 대신 감방 갔다, 왜.”

그의 입술과 가슴이 서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싸우다가 일어난 사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저쪽에선 그게 내가 되길 원했어.”

김기철이 네 몸을 찍은 동영상을 풀어 버리겠다고 했어. 내가 경찰에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 네 영상이 업로드될 거라고.

“돈 주더라. 아주 많이.”

모든 걸 뒤집어쓰는 대가로 네 몸이 찍힌 동영상 원본을 받았어.

“쪽팔려서 말 못 한 거야.”

너를 지키려고.

“돈 받았다고 말하면 쪽팔리니까.”

너만은 다치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

선율의 동공이 충격을 받은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유신의 고통보다 더하지는 않았다. 심장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죽을 것 같았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옆에서 기철이 깐족댔다.

“저 새끼 돈에 환장한 놈이라니까. 그 돈 받고 감방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튄 거 아니야. 부모고 뭐고 다 버리고.”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한선율이 못 믿겠다는데?”

기철의 입가가 잔인하도록 날카롭게 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주먹 쥔 유신의 팔을 툭 건들며 그가 속삭였다.

“확실히 마무리해. 새끼야.”

유신은 신물이 나는 얼굴로 선율을 바라보았다.

“순진했던 시절에 만났다고 뭔가 대단한 환상이라도 품고 있나 본데, 선배.”

또다시 개새끼가 되어야 하는 내 심정을 너는 몰랐으면 좋겠다.

“나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고고한 인간 아니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 줘.

“돈 몇 푼에 흔들리는 그런 인간 맞고.”

너를 지키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생각보다 더 나쁜 놈이야.”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거리낌 없이 해야 하니까.

세 사람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목적을 이룬 기철이 쌩하니 떠나 버리고 선율이 비틀비틀 회사로 돌아갔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유신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 * *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냥 경찰에 진실을 말했어야 했나? 그럼 경찰에서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을까.

때론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시작이 달랐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나 유신의 상상 속에서 ‘다른 시작’의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다. 경찰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기철은 동영상을 풀었고, 한번 업로드된 영상은 자가 복제를 하는 그림자처럼 수도 없이 자라나 선율의 삶을 짓밟았다.

‘방법이 없었어, 선배.’

애초에 나한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고.

‘영상’에 대한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는 제 각오가 주제넘은 것이 아닌가 수없이 고민하면서도 결국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몰카 범죄를 당한 여성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지는지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방 동료였던 문형주는 틈만 나면 몰카로 제가 유포했던 여자들 얘기를 하곤 했다. 내가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그깟 영상 하나 찍었다고 감방에 들어온 게 말이나 되냐며 투덜거리던 그가 하루는 그런 얘기를 했었다.

[나 같은 놈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야? 이 짓을 20년이나 해 온 새끼도 멀쩡히 밖을 활보하고 다니는데 나만 잡혔잖아, 젠장! 하필이면 내가 찍은 여대생 하나가 옥상에서 투신하는 바람에.]

재수가 없었다며 낄낄거리는 그가 인간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야, 근데 5층에서 떨어져도 죽냐? 나 이번에 처음 알았잖아. 우리 집이 5층인데 별로 높지도 않거든?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떨어졌다고 머리가 깨지냐. 구급차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던데? 하여간 걔는 운도 지지리도 없다니까. 그러니까 나 같은 놈한테 당했겠지만, 낄낄.]

몰카나 찍는 놈에게 도덕성이나 윤리 의식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망쳐 버린 피해자의 삶을 그런 식으로 조롱하는 것은 정말 상식 이하였다.

지루한 감방 생활에 문형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촬영한 여자 얘기를 했었다. 그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한 명이었지만 인생이 망가져 버린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이 생겨 학교나 직장을 그만두고 칩거하는 케이스가 제일 많았는데 문형주는 그조차도 조롱의 소재로 삼았다.

[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거 하나 찍혔다고 뭘 그렇게 유난들을 떨어 대? 얼굴 팔린 게 대수야? 모자 쓰고 다니면 되잖아! 정 쪽팔리면 얼굴이나 싹 뜯어고치든지!]

그를 보며 유신은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몰카 범죄로 인생이 망가진 ‘재수 없는 누군가’가 선율이 아닐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나를 경멸해도 상관없고 돈에 미친 놈이라 비웃어도 괜찮았다.

당신만 무사하다면.

“하아…….”

호텔로 돌아온 유신은 씻지도 않고 위스키부터 땄다.

하도 속을 끓여 그런지 가슴이 새카맣게 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쓰린 얼굴로 연거푸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 독한 술을 거의 반이나 비웠는데 빌어먹을 정신은 멀쩡하기만 하다.

“후회 안 해, 난.”

자신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되뇌며 유신은 위스키 병을 통째로 들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던 선율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아서.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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