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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22)화 (22/85)

22

선율은 그야말로 살갗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떻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지. 기철의 음험한 민낯을 눈앞에서 목도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기철과 이별을 결심한 건 마음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숱한 거짓말, 포악스러운 그의 어머니, 여러 이유를 다 떠나서 그저 그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유신을 마음에 담아서가 아니었다. 조유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고 해도 선율은 기철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군거리는 직원들의 눈빛에 선율의 안색이 파리하게 식어 버렸다. 누가 봐도 이건 선율이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예요?”

선율이 당황하자 기철이 다 이긴 싸움인 양 빙글거렸다.

“왜. 사람들 앞에서 우리 엄마 얘기 떠들어 댈 땐 괜찮고 조유신 얘기는 안 돼?”

“나가서 얘기해.”

“여기서 말해. 너희 둘이 예전에 사귄 사이였다고. 죽고 못 살던 전 남친 돌아와서 나에 대한 마음이 팍 식어 버렸다고!”

기어코 기철의 입을 통해 ‘전 남친’이란 소리가 나와 버렸다. 술렁이는 주변의 반응에 기철은 더욱 의기양양했다. 선율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유신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그거 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팔짱을 낀 채 재밌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자연스럽게 등판했다.

주머니에 꽂은 손은 턱없이 여유로웠고 걸음은 느긋했다. 그가 걸어오는 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홍해처럼 쫙 갈라졌다.

“그거 사실입니까? 선율 선배가 나한테 관심 있다는 거.”

유신이 뚜벅뚜벅 걸어와 기철을 바라보고 섰다. 기철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185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유신과 마주 보자 시선이 자연스레 들렸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철은 굴욕감을 느꼈다.

“조유신 뭐 하는 거야. 끼어들지 마.”

“기철 선배가 재밌는 얘길 하잖아. 놔둬 봐요.”

선율이 황급히 말리려 했으나 유신은 요지부동이었다. 삼각형으로 마주 보고 선 세 사람의 묘한 분위기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선배? 지금 조유신 이사가 김기철 팀장을 선배라고 부른 거 맞지?”

웅성거림이 커졌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기철이 어깨를 쭉 펴며 유신을 노려보았다.

“너 잘 왔다. 야, 까놓고 얘기해서 선율이랑 나 헤어진 거 솔직히 너 때문이잖아. 남친 있는 애 흔드는 거 재밌디?”

“선배가 나한테 흔들렸다고 하던가요? 그런 거면 영광인데.”

유신이 태연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한텐 죽어도 안 받아 준다고 했거든요. 김기철이나 너나 똑같은 쓰레기들이라고.”

“쓰, 쓰레기?”

“아, 꺼지라고 정강이도 한번 걷어차였는데.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거 보니 선배 정강이는 멀쩡한가 보네.”

기철의 안면 근육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 이게 아닌데.’

헤어진 마당에 선율과의 교제 소문을 퍼트린 건 선율의 발목을 묶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사내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고, 제아무리 조유신이 옆에서 껄떡대도 쉽게 여지를 줄 수 없을 테니까. 학창 시절 더러운 추문에 깊은 상처를 받아 본 선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정면 돌파를 택한 유신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틀어졌다. 그의 몇 마디 말로 둘은 쓰레기가 되고 하나는 철벽녀가 되었다. 선율을 바라보는 여직원들의 눈빛에 언뜻 부러움이 스치자 기철은 더욱 초조해졌다.

“베링거 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코딱지만 한 광고 회사에 의뢰했을 때부터 알아봤지. 너 처음부터 한선율 꼬시려고 작정한 거지? 그럴 거면 경쟁 PT는 왜 붙였냐? 안 그래요?”

그가 동의를 구하듯 양 팀장을 바라보았다. 멍청히 쳐다보고 있던 양 팀장이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건 그렇죠. 쎄빠지게 준비해 봤자 어차피 한 팀장한테 줄 거 아닙니까?”

유신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양 팀장님.”

“예? 예.”

“한선율 팀장이 대표실 앞에서 날 마주쳤을 때 보인 반응, 기억합니까?”

“예…….”

“쥐 잡듯이 잡는 거 봤죠? 스토커냐고, 꺼지라고, 미친놈이라고.”

“그건…… 봤죠.”

“그럼 한 팀장은 내가 여기 오는 것조차 몰랐다는 거 알 테고.”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지그시 양 팀장을 내려다보았다. 유들유들하던 시선이 순식간에 고압적으로 변했다.

“내 권한으로 광고 내리꽂는 거, 어려울 거 같습니까?”

“아, 아뇨. 그렇진 않죠.”

“사적인 목적으로 의뢰한 거였다면 애초에 경쟁 PT 같은 건 붙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다. 양 팀장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한 팀장에게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그냥 2팀에서 제작해 달라고 말씀만 하셨으면 될 일이죠. 압니다. 이사님이 매우 공정하고 공적인 분인 거.”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유신이 기철을 돌아보았다. 썩은 호박처럼 변한 얼굴로 어금니만 씹어 대는 그에게 유신이 씩 치아를 드러냈다.

“공과 사는 구분 좀 합시다, 김기철 팀장님.”

상체를 조금 기울인 그가 기철의 귓바퀴에 속삭였다.

“차일 만했으니 차이지.”

“…….”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기철은 똥 씹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웅성거리는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갈고 닦은 단두대에 올라간 게 결국엔 제 머리가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고마워.”

인적이 드문 야외 주차장 공터.

선율이 발끝을 보며 말했다.

“네 덕분에 살았다. 눈치껏 잘 받아 줘서. 그런 식으로 널 이용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그에게 고맙다는 얘길 하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훨씬 어렵고 낯설어서 한참을 망설인 끝에 혼잣말하듯 뱉어 낸 말. 유신은 하늘을 쳐다보며 픽 웃었다.

“자기 걸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

“내키는 대로 써요. 어차피 선배 거니까.”

선율이 대답이 없자 그가 눈치를 봤다.

“이렇게 말하면 좀 느끼한가?”

“어, 많이 질린다.”

이번엔 선율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유신에게 고마웠다. 때 아닌 폭로전에 그를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선율은 전 남친과 바람나 기철을 버렸다는 추문을 피해 갈 수 없었을 거다. 그토록 피하고 싶던 소문의 덫에 걸려 또다시 허덕일 테고, 수군거림을 이기지 못 하고 사표를 썼을지도 모른다.

한데 유신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그는 사냥감을 쫓는 포수처럼 분위기를 단박에 제 것으로 만들었다. 기철을 흠집 냈고, 선율을 보호했고, 베링거 이사로서 자신의 권위까지 지켜 냈다.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한 기철이 오후 반차를 쓰고 내뺀 것만 봐도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했다.

“너 연기 잘하더라. 하마터면 너랑 짜고 치는 고스톱인 줄 나조차도 착각할 뻔했잖아.”

“연기? 나 연기한 거 하나도 없는데.”

유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8년 짝사랑한 것도 맞고, 선배한테 쓰레기 취급받는 것도 맞고. 여기 어디에 거짓이 있다는 거예요?”

“8년이라고 하지 마. 공백이 너무 길잖아.”

“나한텐 공백 없었어.”

“…….”

“8년 동안, 단 하루도.”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선율은 확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감싸며 고집스레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날, 잘 들어갔니?”

재회한 이후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도 조금 민망해 선율은 괜히 구둣발로 바닥만 툭툭 찼다.

“옷이 다 젖어서 차 시트가 엉망이 됐어요. 세탁비 엄청 깨질 것 같은데 청구해도 되나.”

“내가 우산을 뺏기를 했니, 집에 찾아오라고 시키길 했니? 네 발로 찾아와 놓고 누구한테 덤터기를 씌워.”

“세탁비 안 줄 거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 주든지.”

“조유신.”

선율은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시선을 들었다.

“나 솔직히 아직 네가 불편해. 네가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기철이 대신 감방에 들어간 것도 알고, 네 손으로 황준기를 다치게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걸 해명하지 않았잖아.”

유신의 입술이 다시 자물쇠처럼 잠기는 순간 잔잔했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끝까지 얘기 안 해 줄 거지?”

유신은 말없이 빤히 선율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이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선율은 한없이 깊은 바다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득하고, 서늘했다. 주변 모두가 잠잠해져 오롯이 그만 보였다.

“그게 뭐가 중요해.”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너와 나 사이는 끝없는 평행선만 달릴 테니까.”

유신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비틀었다.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선배.”

속을 까서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내가 지금 이러는 건 다 선배를 위한 거라고.

“내가 해야 할 얘기는 다 했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내 심정이 어떤지 당신은 모르잖아.

심장이 짓물러 터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줘, 선배.

그 영상이 세상에서 완벽히 지워지고 나면. 그래서 어떤 것도 당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다 말해 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지금은 모른 척해 줘.

그러나 가슴이 답답한 건 선율도 마찬가지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기에 저토록 꽁꽁 싸매고 있는 걸까.

그럴수록 내가 얼마나 불안해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정말 다 했어?”

유신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래, 다 했어.”

“사람 바보 만드는 거 참 쉽네.”

그녀의 음성에 날이 섰다.

그대로 돌아서는 선율의 손목을 유신이 애타는 마음으로 붙잡았다.

“선배, 잠깐만.”

끼이익―

그때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은색 세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그 새끼가 왜 아무 말 못하는지 말해 줄까?”

차 문을 열고 내린 건 기철이었다.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가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그가 야비한 미소를 띤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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