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21)화 (21/85)

21

선율은 오기로 그의 팔을 쳐 냈다. 그러자 유신이 거세게 선율의 어깨를 안아 왔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철벽처럼 단단한 그의 팔에, 세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선율의 움직임이 차차 잦아들었다.

“진짜 짜증 나, 조유신.”

“알아.”

“너 정말 싫다고!”

“그것도 알아.”

그의 품은 마법처럼 선율을 무너트렸다.

겹겹이 꼬인 매듭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들은 그의 품 안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따뜻했다.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 했다. 꽁꽁 얼어 있던 가슴이 녹아내린 것처럼 쉴 새 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선율은 꾹꾹 참아 냈다.

“미안해, 선배.”

빗속에서 유신은 한참이나 선율을 껴안고 서 있었다.

“다 내 잘못인 거 같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애틋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이 거셌다.

그러나 아프도록 쏟아지는 비를 대신 맞아 주는 그가 있어 선율은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 * *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비를 오래 맞아 그런지 온몸이 무거웠고 몇 번의 알람에도 눈꺼풀이 뜨이지 않았다.

“아……. 출근하기 정말 싫다.”

선율은 이불로 제 몸을 폭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몸살기가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휴가라도 쓰고 온종일 이불 안에서 뒹굴고 싶었다.

‘어제 어떻게 들어왔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찬 바닥에 뒹굴고 있던 우산, 어깨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의 체취.

선연히 각인된 이미지는 오로지 유신뿐이었다. 이불을 덮은 채 눈을 끔뻑이던 선율은 이내 잔상을 털어 내며 일어났다.

회사에 가 보니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바이디오 사무실은 신생 광고 회사답게 대체로 자율적인 분위기였으나 평소엔 탕비실에서 수다를 떨다가도 9시가 넘어가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출근 시각이 훌쩍 지났는데도 삼삼오오 모여 귀엣말을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제 모습을 힐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선율은 이상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런 눈빛, 저런 태도. 익숙했다.

8년 전, 유신이 하루아침에 증발한 다음 날 저를 바라보던 동기들의 시선이 딱 저랬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선율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주희에게 물었다. 파티션 안쪽에 고개를 묻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주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팀장님, 오셨어요?”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뭐 큰일이라도 터졌어?”

“그게요……. 잠시 나와 보세요, 팀장님.”

주희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따라가며 선율은 내내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팀장님, 그거 정말 사실이에요?”

비상계단 문을 열고 들어간 주희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그거라고 하면 내가 못 알아듣잖아. 뭘 말하는 거야?”

“김기철 팀장님이랑 사귄다는 얘기요!”

“……뭐?”

쿵.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지금 다들 그 얘기로 난리예요. 팀장 둘이 감쪽같이 속이고 사내 연애했다고요!”

“……그게 저렇게 도끼눈 뜨고 수군거릴 일이야?”

“상대가 어지간해야죠! 김기철 팀장님이잖아요!”

걔가 왜.

반문하려던 선율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김기철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한주그룹 외동아들이라는 게 문제인 거구나.

“저번에 회사로 한주그룹 사모님 찾아오셨잖아요. 막 회의실에서 깽판 치고. 그때 일로 뒷말이 많았었나 봐요. 팀장님이 사귄다는 남자가 한주그룹 사모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게 누군지 다들 궁금해했는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된 모양이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선율이 감은 눈을 떴다. 그녀의 잇새로 조소가 흘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시기가 참 공교롭네.”

“네?”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런 건 없어. 이건 누군가가 고의로 흘린 소문이야.”

“대체 누가요?”

정작 사귈 땐 철통같이 지켜지던 비밀이 헤어지자마자 탄로 났다. 굳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김기철, 이렇게까지 하겠단 거야?’

헤어진 마당에 이런 소문을 낸 의도야 뻔했다. 그는 유신과 선율이 다시 붙어먹을 가망성을 애초에 차단하려는 거다.

‘그 새끼 다시 만나려거든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도 감당해 봐.’

치졸하고 음습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과거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소문의 배후가 선명해지네.’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화가 났다.

선율은 싸늘한 얼굴로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갔다.

* * *

“어우야, 곧 한주그룹 사모님 되실 분한테 내가 너무 무례했네. 김 팀장이 한주그룹 회장님 외동아들이란 것도 놀랍지만 한 팀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어, 하하!”

양 팀장이 두 손을 비비며 깐족댔다. 특별할 것 없는 회사 생활에 ‘사내 연애’란 빅뉴스가 터졌으니 흥미로울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선율을 둘러싼 가십에 관심이 많은 그였다. 선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재밌으세요?”

“으응? 아니, 재미있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그러지! 바로 옆에서 일하던 두 사람이 사귄다는데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였는지, 허허. 사내 연애하면 보통 티가 나기 마련인데 말이야.”

“맞아요, 티 하나도 안 났을 거예요. 헤어졌거든요.”

“어? 그, 그래?”

관심 없는 척 기웃거리던 시선들이 확 모여들었다. 양 팀장은 눈치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왜 헤어졌는데? 아, 이런 건 사생활이라 물으면 안 되나? 오해하지 마. 한 팀장도 알잖아. 내가 호기심이 워낙 왕성한 사람이란 거, 하하!”

선율은 서류를 탁탁 정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때 회의실로 들이닥쳤던 여자분 기억하시죠.”

“응? 어어.”

“제 뺨 후려친 것도 보셨고요.”

“으응, 봤지.”

“그럼 왜 헤어졌는지도 아시겠네요?”

“아…….”

양 팀장이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주그룹 사모님. 그분 보통 아니긴 했지. 그래서 헤어진 거야? 집안 반대로?”

“굳이 궁금해하시니 수많은 이유 중 하나 정도 말씀드린 거예요. 궁금증 해소됐으면 더는 뒤에서 입방아 찧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입방아는 무슨! 우리가 뭐 남인가? 한솥밥 먹는 식구끼리 경사가 났다니까 다들 기뻐서 그런 거지. 집안 반대로 헤어졌을 줄은……. 아, 알았어, 알았다고!”

선율이 눈에 힘을 딱 주고 째려보자 양 팀장이 꼬리를 말고 깨갱했다.

그때 파티션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철이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한 팀장,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요?”

선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요.”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꼭 우리 엄마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헤어진 마당에 이런 소문 나는 거 나라고 편한 줄 압니까? 뒷말 안 나오게 하고 싶으면 한 팀장도 입을 조심해야지.”

선율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따위 소문을 흘려 놓고 자기 혼자만 깨끗하고 싶다 이건가?

탁!

그녀는 정리하던 서류를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정말 불쾌한 거 맞아요?”

“무슨 뜻이에요?”

“정말 불쾌한 거면 애초에 소문을 내질 말았어야죠.”

“한 팀장, 지금 나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피차 불쾌하고 싶지 않으면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해 봐요, 어디.”

두 사람의 공기가 팽팽하게 맞섰다.

아침부터 웬 구경거린가 싶어 직원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선율은 직장에서 사적인 일을 언급하는 게 제 살 깎아 먹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피할 수도 없었지만 기철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소문이라면 지긋지긋했으니까. 제 선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직장 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제 뒤를 따라다닐 걸 알고 있었다.

‘김기철이 판 구덩이에서 헤어날 방법은 단 하나뿐이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문의 근원지를 밝혀내면 돼.’

단단히 마음을 먹은 선율이 양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양 팀장님, 그 소문 어디서 들으셨어요?”

얼빠진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던 양 팀장이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나? 나는 아까 도동묵 대리한테 들었는데.”

“도 대리님은 누구한테 들으셨는데요?”

“나는 탕비실에서 박 주임이 얘기하길래 팀장님한테 전한 것뿐이야. 헤어진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그럼 박 주임은요?”

“그게, 저는…….”

박 주임은 주근깨가 많은 서른 살 여자였다. 선율의 추궁에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한곳을 지목하기 직전에 기철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만해! 이런 식으로 전 직원을 탐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얼마나 급했는지 기철은 깍듯이 하던 존댓말조차 잊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선율이 냉소를 지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8년이나 누굴 좀 오해했거든요.”

“난 한 팀장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가서 얘기합시다. 사적인 얘기를 회사에서 할 필요는 없잖아.”

“사적인 얘기를 먼저 흘린 건 너지, 김기철.”

“뭐, 김기철? 진짜 해 보자는 거야?”

“목소리 높이지 마. 난 박 주임 대답만 들으면 되니까.”

“말하지 마요, 박 주임!”

가운데 낀 박 주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당당히 선 채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선율을 보며 기철의 미간이 얄궂게 구겨졌다. 그는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음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거 예상이랑은 너무 다른데.’

8년 전 교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때 선율은 숨고 피하기 바빴다.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 푹 숙이고 땅바닥만 보고 걷던 그녀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가녀리기만 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선율은 더 이상 그가 아는 것처럼 나약하지 않았다. 소문의 배후를 기필코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기철은 불안함을 느꼈다.

‘어떡하지?’

때마침 그의 눈에 좋은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유리문에 한쪽 어깨를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는 유신을 본 기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죽으란 법은 없네. 저 새끼가 쓸모 있는 때도 있다니.’

기철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가다듬고 불쌍한 표정을 자아냈다.

“내가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한 팀장 정말 너무하네요.”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선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죠?”

“한 팀장이랑 나, 엄마 때문에 헤어진 거 아니잖아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날 모욕할 수 있어요?”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 저기에 있잖아요.”

그의 손가락 끝에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유신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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