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20)화 (20/85)

20

“씨발, 존나 복잡하게 됐네.”

집으로 돌아온 기철이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켰다.

8년간 꼭꼭 숨겨 온 비밀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려 들썩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선율의 눈동자에 어린 혐오감에 기철은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다 조유신 그 새끼 때문이잖아. 빌어먹을.”

사라진 김에 그냥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말지. 갑자기 왜 돌아와서 들쑤시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유신이 돌아오자마자 틀어져 버린 선율과의 관계는 그의 비틀린 소유욕을 자꾸만 자극했다.

‘분위기 보니 영상에 대해선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그의 입가가 음험하게 비틀렸다.

‘내가 이걸 확 터트려 버리면 어쩌려고 너 그렇게 건방지게 구냐.’

기철은 남은 와인을 벌컥벌컥 털어 넣고 일어섰다.

오랫동안 금고에 묵혀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낼 타이밍이었다.

* * *

선율은 제가 마치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모두가 짜고 자신을 속이는 느낌. 주위를 둘러싼 모두가 광대였고 저는 눈을 가린 머저리였다.

진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들리는 것만 듣고, 보이는 것만 믿었다. 그 결과 백치가 되어 버린 그녀는 제 손으로 깊은 수렁을 팠다. 누굴 미워하고 멀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러나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곧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신과 기철이 모두 입을 다문 상황이었고 유신의 어머니도 자세한 정황은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냥 포기할까?’

어차피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알아서 뭐 하게.

그런 생각이 치밀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너 아직 조유신 좋아하잖아. 걔한테 돌아가고 싶어서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는 거잖아!’

동문회장에서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지난 8년간 그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음을.

기철의 프러포즈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음을.

그래서 그녀는 이미 지나 버린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꼬여 버린 과거의 매듭을 풀지 않고서는 그의 곁에 서도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선율은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민서야 난데. 자꾸 부탁만 해서 미안해. 혹시 황준기 소식 알아?”

―준기 소식 아는 애 아무도 없을걸? 그 사건 이후로 학교도 때려치우고 완전히 잠수했잖아.

“성환이가 발이 넓으니 혹시 알까 했지.”

―물어보기는 할게. 그런데 아마 모를 거야.

민서가 조금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잠을 깨워 미안하다며 선율이 전화를 끊었다.

‘당시 술자리에 있었던 세 사람 중에 유일하게 남은 한 사람.’

두 명이 입을 닫았으니 이제 남은 건 황준기 한 사람뿐이었다.

반드시 황준기를 찾아내 그날 있었던 진실을 듣고야 말겠다고 선율은 결심했다.

* * *

유신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몇 번의 등장만으로 바이디오에서도 스타가 된 그는, 회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도 직원들의 입에 연신 오르내렸다.

여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유신에 대한 얘기를 했고 남직원들은 질투와 선망이 반반 섞인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았다.

오늘도 화장실에서는 유신에 대한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조유신 이사님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들었어요?”

마침 가장 안쪽 칸에 들어가 있던 선율의 귀가 쫑긋해졌다.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요. 조유신 이사님 외모 못지않게 능력이 출중하시더라고요. 4년 전부터 베링거에서 출시된 자동차는 다 조유신 이사님 작품이래요!”

“정말요?”

“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십 대 초반에 베링거 입사해서 4년 만에 디자인 총괄 자리에 올랐대요. 수상 이력도 장난 아니던데요? 국제자동차페스티벌에서 Grand Prize of Design 상도 수상하셨대요, 글쎄!”

여직원들의 수다에 선율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간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못했던 그의 과거가 어이없게도 화장실에서 풀리고 있었다. 여직원들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천재네요, 완전. 우린 왜 몰랐지?”

“디자이너명이 따로 있더라고요. 근데 그게 좀 웃겨요.”

“뭔데요?”

“맥파이요.”

“맥파이?”

“까치라는 뜻이래요. 너무 언밸런스하지 않아요? 조유신 이사님 완전 고급스러운 이미진데!”

여직원 하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한 명은 깊게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어휴, 맥파이고 뭐고 그림의 떡이네요. 내 남자였으면 좋겠다.”

“맞죠. 저도요.”

“한번 꼬셔 봐?”

“도전?”

까르르 웃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선율은 그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화장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아……. 조유신 진짜.’

맥파이는 그녀가 지어 준 별명이었다.

8년 전 햇살이 예쁘던 어느 가을날.

화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꿈을 키워 가던 때가 있었다.

[유신아, 넌 나중에 꿈을 이루면 뭘 할 거야? 자동차 디자이너 되고 싶다고 했잖아.]

[꿈을 이루면 이루는 거지. 이룬 후에도 뭘 해야 해요?]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 그런 거 있잖아. 네 이름을 딴 자동차를 출시한다든가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고 싶다든가. 아, 할머니 계시니까 할머니 모시고 근사한 데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거.]

[음.]

잠시 미간을 모으고 고민한 유신이 내놓은 대답은 선율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난 선배한테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동차를 선물하고 싶어요.]

[오, 완전 좋은데. 세상에서 하나뿐인 차면 손잡이나 백미러 같은 데 막 시그니처 같은 것도 찍혀 있나?]

[선배가 원하면 뭐든 하죠.]

[음……. 그럼 네 디자이너명은 내가 지어 줘야겠네.]

선율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휴대폰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녀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너 나중에 디자이너로 성공하면 맥파이라고 해!]

[무슨 뜻인데요.]

[까치.]

[!]

[까치까치 조까치. 네 별명이잖아.]

선율이 깔깔대며 놀렸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이어 뜨거운 숨이 노도처럼 밀려들었고,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화실에서 둘은 세상이 끝날 것처럼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니.’

네가 맥파이란 이름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을 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의 키스도, 우리의 약속도, 좋았던 추억마저도.

한편에 억지로 쑤셔 박았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날 그와 나누었던 얘기와 뜨거웠던 입맞춤.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한 번에 떠올라 선율을 잠식했다.

그리웠다. 그때의 네가. 그날의 우리가.

화장실에 우두커니 앉은 선율은 한참이나 문을 열고 나서지 못했다.

* * *

퇴근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선율이 습관적으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과거 유신이 고백할 때 선물한 목걸이였다. 가느다란 은줄에 조그만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U자 모양으로 누운 가느다란 초승달 위에 작은 별이 박힌 목걸이였다.

그걸 선물하며 유신이 뭐라고 그랬더라.

‘낮이고 밤이고 선배 생각만 나서 샀어요.’ 그랬던가.

그때 우리 참 예뻤었는데.

낮에 시작된 열병은 밤이 되도록 식지 않았다. 자꾸만 거세어지는 유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선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짜증 나, 정말.’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버스 앞으로 나서는 선율의 정수리로 투둑,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청승맞게 비까지 내리네.”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선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 앞 정류소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제법 굵어진 빗줄기에 선율은 서류 가방을 머리에 받치고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중 나올 사람도 없고 근처에 우산 파는 데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에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며 잘 다려 입은 정장 치마가 순식간에 젖었다.

홀딱 젖은 그녀를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가 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선율은 민망한 얼굴로 까딱 묵례를 하곤 얼른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구두 안에도 비가 들어갔는지 젖은 스타킹이 쩍쩍 구두에 달라붙었다. 눈에 자꾸 빗방울이 들어가 나중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그때 까만 구둣발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운 순간 정수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뚝 그쳤다. 타닥타닥, 우산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갇힌 공기 속에 익숙한 체향이 가득했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앞에 선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집 어떻게 알았어.”

대답을 들으려고 질문한 건 아니었다. 선율은 제 앞을 가로막은 유신을 밀치고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선배.”

정수리에 퍼부어지던 빗줄기가 다시 한번 멈췄다.

“비켜. 나 들어갈 거야.”

온종일 너만 생각한 내 입술이 또 무슨 말을 뱉어 버릴지 몰라. 그러니까 잡지 마.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립고, 화가 나고, 또 두려웠다. 어느 정도 진실을 알게 된 후론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무서운 과거를 나만 모르고 살았다는 게 버겁도록 무거웠다.

네가 짊어진 무게가 나 때문인 것 같은데 네게선 아무 말을 들을 수 없어.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알 수가 없잖아. 그 긴 세월 나를 바보로 만들고 너는…….

너는 얼마나 힘들었니.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우산 가지고 가요.”

유신이 검은 우산을 손에 쥐여 주었다.

선율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었다. 유신의 어깨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필요 없어. 누가 우산 필요하대?”

선율은 기껏 쥐여 준 우산을 팽개쳤다. 유신은 버려진 우산을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선율은 시선을 떨군 채 침묵했다. 뒤집힌 우산 안쪽으로 서서히 빗물이 차올랐다. 그건 꼭 제 눈과 같았다. 비라도 내려서 다행이다.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

“울지 마, 선배.”

“누가 운대?”

“안 울면 다행이고.”

커다란 손바닥이 뺨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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