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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19)화 (19/85)

19

퇴근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정류장에 내려 타박타박 오르막을 걷는 선율의 발걸음엔 힘이 없었다.

유신이 돌아온 후 모든 게 엉망이었다. 머릿속은 유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과거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바닥을 보며 기계처럼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앞에 커다란 꽃다발이 불쑥 내밀린 건 그때였다.

“선율아. 이제 퇴근하는 거야?”

집 앞에서 기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율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왔어?”

“미안해, 선율아. 내가 다 잘못했어.”

“…….”

“꽃다발로 퉁 치려는 거 아니야. 나 진짜 반성 많이 했다고 말하려고 온 거야. 선율아, 나 다시 만나 주면 안 될까?”

선율은 그의 꽃다발을 받지 않았다.

“나 어제 한주그룹 앞에 다녀왔어.”

“!”

“조유신 교도소 갔다 온 거, 너 알고 있었니?”

기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선율은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난 전혀 몰랐어!”

“황준기를 다치게 만든 사람이 조유신이 아니라 너라더라.”

“그 아줌마가 헛소리하는 거야. 딱 봐도 정신 나간 여자잖아! 아들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 환자라고!”

“내가 만난 사람이 조유신 엄마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선율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조유신 엄마가 한주그룹 앞에서 2년이나 1인 시위를 했다는 거 정말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

기철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질문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줌마가 주장하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야. 정말 사실이었으면 벌써 기사가 나가고도 남았겠지!”

“협박했니?”

“무슨 협박!”

“너 대신 감옥에 들어가게 하려고 조유신 협박했어? 대체 어떤 협박을 하면 먹힐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기철은 꿋꿋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대한민국 경찰이 그렇게 허술한지 알아? 죄를 지었으니 감방을 간 거고 걔가 범인이니까 징역을 산 거야!”

“그럼 지금까지 왜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어? 조유신 자퇴하고 다들 근황 궁금해할 때 한 번도 입을 연 적 없었잖아.”

“내가 조유신 얘길 왜 해야 하는데! 게다가 좋은 일도 아니고 감방 간 건데 굳이 떠벌릴 필요 있어?”

“말이 앞뒤가 안 맞네.”

선율이 냉랭하게 코웃음 쳤다.

“너 조유신 싫어하잖아. 그럼 더 떠들었어야지. 조유신 깎아내릴 절호의 기회인데.”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암전이 된 머릿속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술만 벙긋거리는 기철의 모습은 선율에게 묘한 확신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머릿속을 맴돌던 나머지 퍼즐 하나를 던져 보기로 했다.

“그 소문도 네가 낸 거지?”

“무슨 소문?”

“한선율이 조유신한테 따먹혔다는 얘기.”

기철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가 떠듬떠듬 대꾸했다.

“야, 그건 조유신이 지 입으로 발설한 거잖아! 생각해 봐. 그때 너희 둘이 사귀는 거 아무도 몰랐는데 너희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술자리에서 조유신에게 들은 얘기를 엮어서 네가 꾸며 낸 거잖아. 그날 입은 속옷 색깔부터, 가슴 모양이 어떻다느니, 심지어 잠자리 기술이 형편없었다는 것까지도.”

생각해 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은 추론이었다.

기철은 그날의 싸움을 오롯이 유신의 탓으로 몰았었다. 유신이 술자리에서 하룻밤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주먹다짐을 했다고. 그걸 말리려다가 황준기가 ‘조금’ 다쳤고 조유신은 아마 쪽팔려서 숨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해 보면 선율이 아는 모든 것은 기철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었다.

“다 알고 온 거니까 굳이 발뺌하지 마.”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서, 선율아!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왜 그런 소문을 내겠어.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뻔뻔하게 뱉은 말과는 달리 그의 손바닥은 어느새 축축해지고 있었다.

‘선율이가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지? 조유신이랑 따로 만나기라도 한 건가?’

심장이 발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한선율 너 정말 너무한다. 왜 자꾸 날 의심하는 건데?”

“지금껏 네 말만 믿었어. 그런데 네가 한 말 중에 진실이 있기는 할까.”

“…….”

“이젠 모르겠어.”

선율은 식은 보리차 같은 눈으로 기철을 스쳐 지나갔다.

“야, 한선율!”

기철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슨 말을 듣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난 떳떳해. 너에 대한 추잡한 소문을 낸 것도 조유신이고 황준기를 다치게 한 것도 그 자식이야. 난 널 지켜 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물증도 없으면서 이렇게 사람 의심하는 법이 어디 있어!”

기철은 끝까지 발뺌했다. 선율은 몹시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물증 없어. 그런데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나에 대한 소문만큼은 조유신이 낸 게 아니라는 거.”

“선율아…….”

“나 그날 나무토막처럼 누워만 있지 않았거든.”

“!”

“걔가 아주 사람 미치게 하더라.”

입을 벌린 기철을 노려보며 선율이 또박또박 뱉었다.

“아주 끝내 줬어.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서 싸늘한 바람이 일었다.

또각또각 사라지는 선율의 뒷모습을 보며 기철은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깨물었다.

* * *

8년 전.

그날 선율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건 기철이었다. 선율을 오래도록 짝사랑해 온 기철은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심심찮게 그녀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의 젊은 남자들이 모일 때마다 여자 얘기를 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제라면 셋 모두 형편없이 술에 취했다는 것이다.

[야, 조유신. 너 요새 한선율이랑 친하냐?]

평소 유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기철은 술기운이 올라오자 슬슬 유신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화실에서 둘이 있는 거 종종 본 것 같은데.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유신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선배 스토컵니까? 우리 반 화실 맨 끝 방이라 선배 화실에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스토커는 개뿔. 야, 너 상처 입을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잘 들어. 나 어제 한선율 따먹었다.]

기철이 새끼손가락을 까딱대며 킬킬거렸다.

유신의 미간이 순식간에 굳었다.

[……뭡니까, 그 말.]

[이 새끼 눈빛 봐라. 너 잘하면 선배 한 대 치겠다?]

[똑바로 말해요. 제대로 말 못 할 거면 집어치우고.]

[크큭, 이 새끼 맹랑하네. 야, 이 형님이 조언 하나 할게. 한선율은 건드리지 마라. 내가 침 잔뜩 발라 놨어.]

유신은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개새끼도 아니고 침은 무슨.]

그러나 버럭버럭하며 주먹이라도 날릴 줄 알았던 기철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진짠데.]

[그만 일어나죠.]

기철이 너무 취했다고 생각한 유신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준기도 구토를 한 번 해야겠다며 화장실에 간 덕에 어차피 자리는 파장 분위기였다. 그때 기철이 유신의 손목을 턱 잡았다.

[뻥 아니라니까? 진짜 보여 줘?]

기철의 휴대폰에선 어두침침한 화면을 배경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무척 어두운 화면이었으나 잠든 선율의 얼굴과 나신은 적나라했다. 달빛으로 환해진 나신 위를 뱀처럼 오가는 손바닥이 느릿하게 보였다. 짙은 음영을 따라 손가락이 움직이는 광경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생생했다.

[어제라고 했습니까?]

[내가 졸라 침 발라 놨다는 거 이제 믿냐?]

[어제가 확실하냐고!]

살벌한 물음에 기철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MT 때 여학우 방에 몰래 들어가 찍었다곤 얘기할 수 없었으니까.

당시 유신이 선율과 사귀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기에 당당히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어제 종일 선율과 시간을 보낸 유신의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정도로 구린 거짓말이었다.

[어제 같은 소리 하네. 미친 새끼가.]

유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철의 멱살을 잡아챘다.

[쿨럭쿨럭! 왜, 왜 이래?]

[지랄하지 마. 이 허접한 영상이 진짜라고 누가 믿을 거 같아?]

[뭐? 이 새끼가 진짜 선배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야, 너 한선율 진짜 좋아하냐? 내가 한선율 따먹었다니까 그렇게 배알이 꼴려?]

[개소리하지 마! 어제 내가 온종일 선배랑 같이 있었는데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유신이 휴대폰을 빼앗아 숯불구이 장작에 처넣은 순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황준기가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기철이 휘두른 팔에 맞아 황준기가 숯 더미에 얼굴을 처박은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얼굴! 내 얼굴!]

황준기가 병원에 실려 가고 경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기철은 두려움에 떨며 방 안에 칩거했다. 온종일 방에 처박혀 덜덜 떨던 그는 계순에게 그간의 일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동영상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들은 계순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확인해 보니 그 가게에 CCTV도 없다고 하더라. 주인은 담배 태우러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대.]

즉, 목격자도 증거도 없다는 뜻이었다.

기철은 계순과 함께 완벽한 시나리오를 짰다. 죄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동영상을 풀어 버리겠다고 유신을 협박했다.

[태워 버린 휴대폰 안에 들어 있던 건 백업본이었어. 원본 줄게. 황준기 건은 네가 그랬다고 경찰에 얘기해 주라. 네가 덮어쓰면 동영상은 싹 다 지워 준다니까?]

행여 허튼수작을 부리는 날엔 곧바로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당시 스무 살. 세상 물정 모르는 유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황준기에게 돈을 쥐여 주고 입막음을 한 후 홀로 학교로 돌아온 기철은 치밀하게 공작을 펼쳤다. 생각해 보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누구든 붙잡고 “야, 조유신이 그러던데 한선율이랑 떡쳤다는데? 한선율이 먼저 꼬리 쳐서 넘어갔다더라.” 하면 소문의 근원지는 조유신이 되는 거다.

기철의 의도대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그 소문 속에서 선율은 신입생한테 꼬리 친 요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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