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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주희였다.
“팀장님, 왜 그렇게 멍 때리고 계세요?”
“아, 주희 씨.”
주희가 해맑게 웃으며 선율의 앞에서 박수를 ‘짝’ 쳤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정신 차리세요, 퍼뜩!”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바로 부장님께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최종 PT 앞두고 전달 사항이 있다나 봐요.”
선율은 언제 멍했냐는 듯 얼른 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났다.
부장실에 올라가 보니 이미 양 팀장이 도착해 있었다. 방성범 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는 선율이 도착하자 형식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한 팀장 왔어? 이쪽으로 앉아.”
선율은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착석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어, 그게 내가 부른 건 아니고 조유신 이사의 요청이 있었어.”
“조유신 이사가요?”
“응. 전달 사항이 있다고 하던데. 아, 저기 오시네.”
열린 문 사이로 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자로 잰 듯한 슈트를 갖춰 입은 것과 달리 오늘은 넥타이를 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답답하지 않게 목 단추를 두 개쯤 풀고 그 위에 실키한 재킷을 입었다. 평소 흐트러짐 없이 쓸어 올리고 다니던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였다.
‘어디 클럽이라도 가는 모양이네.’
평소의 모습이 재벌 집 아들 같았다면 오늘은 아주 스타일리시하고 귀족적이었다. 오만한 인상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착장에 선율은 저도 모르게 한참 그의 모습을 훑었다. 시선을 의식한 유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먼저들 와 계셨네요. 급하게 연락드렸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이사님이 부르시면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 만들어야죠, 허허!”
양 팀장이 벌떡 일어나 그에게 아부를 떨었다. 성범이 상석을 내주자 유신이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자연스럽게 광고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현재 두 팀의 진행 상황이 어떤지, 1차 PT에서 뒤진 양 팀장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선율은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험한 데, 더러운 데 가리지 않고 있었죠. 미국에도 잠깐 있었고.]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나오라고 했었잖아. 8년 전 그날. 꽁무니 말고 도망친 건 선배 아니었나?]
그날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손은 노트 위에서 움직이는데 시선은 유신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의 장갑이 무척 눈에 거슬린다.
‘누굴 지키려다가 다쳤다고 그랬지?’
설마 황준기가 화상을 입을 때 같이 다친 건가? 황준기를 지키려다 다친 거라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때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유신의 눈빛은 뭐랄까. 그가 지키려던 그 ‘누군가’가 마치 선율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다들 바쁘실 테니 본론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유신의 한마디에 선율의 상념이 끝이 났다.
선율은 빙빙 돌리고 있던 펜슬을 바로잡고 등을 세웠다.
“아시다시피 이번 광고는 일반적인 TV 광고와 달리 전 세계의 럭셔리 브랜드가 모두 모인 모터쇼에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모터쇼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스크린에 반복적으로 송출할 예정이라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네, 그 점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베링거 모터스에서는 모터쇼의 광고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TV 광고로도 송출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
세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TV 광고라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성범은 너무 놀라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펄쩍 뛰는 그에게 유신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그렇게 되면 귀사는 한국 최초로 베링거 모터스의 광고를 TV에 송출하게 되겠죠.”
“이럴 수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사님!”
성범은 체면도 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모터쇼 광고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는데 무려 TV 광고라니! 그것도 한국 최초란다.
이 정도라면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을 때 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건 방성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이디오의 위상 자체가 몇 계단은 수직 상승할 만큼 획기적인 이벤트인 것이다.
“저희 바이디오에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거 꿈 아니겠죠? 허허,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세요!”
유신은 이번 광고에 윗선의 관심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경쟁 PT 이후에 최종 결정은 윗선에서 하게 될 거라고.
결론적으로 검토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약 30초 분량의 영상 초안을 만들어 주십사, 하는 얘기였다. 원래대로라면 기획팀에서 준비한 스토리보드로 최종 PT를 진행한 후 승리한 쪽에서 본격적으로 팀을 꾸려 영상 제작에 돌입하겠지만, 이번 경우엔 곧바로 제작팀이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아유, 그럼요! 당연히 준비해야죠! 두 분 팀장님, 가능하겠죠?”
“네, 물론입니다!”
선율과 양 팀장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30초 분량의 영상을 만들어 내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야 하겠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의지로 충만했다. 그럴 가치가 충분한 일이었다.
‘베링거 모터스 TV 광고라니, 맙소사!’
선율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번 광고는 지금껏 그녀가 맡아 본 광고 중 제일 규모가 큰 것이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베링거 모터스의 광고를 찍는 것 자체만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TV 광고로도 송출된다니!’
이번 광고만 따내면 한선율 광고 인생에 그야말로 꽃길이 쫙 깔리는 것이다.
‘무조건 내가 따고 만다.’
선율은 잡념을 잊고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경계하는 양 팀장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사소한 견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 * *
미팅이 끝난 후 선율이 회의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나왔다.
빈 종이컵을 모아 휴지통에 버리고 물티슈로 테이블을 한 번 닦고 나오니 양 팀장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양 팀장님, 같이 가요!”
선율이 뛰어갔으나 양 팀장은 못 본 체하며 문을 닫았다. 바로 코앞에서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선율이 욕을 했다.
“와, 진짜 치사하네. 별.”
그녀는 구시렁대며 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 문을 열고 반 층 정도 내려갔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유신이 계단 쪽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 선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건물 내에서는 흡연 금지입니다, 조유신 이사님.”
“불 안 붙였잖아요.”
유신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케이스에 넣었다.
“피우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고 있는 거예요?”
“습관이에요. 담배 끊은 지 좀 됐습니다.”
유신이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으며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게 꽉 붙들어 매려는 듯 선율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선율은 멈칫멈칫 그의 앞에 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긴장하는 걸까.
유신은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조유신 이사님.”
유신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선배 은근히 뻔뻔한 스타일이네요.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광고 따내려면 뭔 말을 못할까. 광고주 비위 맞추려고 대리운전까지 해 준 사람인 거 잊었어요?”
뻔뻔하려면 끝까지 뻔뻔하든가. 귓불은 왜 그렇게 달아오르는 건데.
유신은 웃음을 감추며 팔짱을 꼈다.
“할 얘기 있으면 해요.”
“내가 할 얘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눈빛이…….”
“내 눈빛이 뭐.”
“되게 원하는 눈빛이던데.”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찔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선율의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단어 선택에 신중해 주시죠.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이에요. 어제 어머니가 학교 사람 누굴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사람이 한둘이야? 난 줄 어떻게 알고.”
“보기 드물게 예쁜 아가씨라고 그러더라고.”
유신이 픽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율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감옥…… 갔었다는 거 정말이야?”
“1년 정도.”
어렵게 꺼낸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머니 말론 황준기를 다치게 한 게 네가 아니라 기철이라고 하던데.”
“어느 쪽이었으면 좋겠어요? 김기철과 나, 둘 중에.”
“선문답하자는 거야?”
“그저 선배의 진심이 궁금한 것뿐이에요.”
“내가 어느 쪽을 원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넌 감옥에 다녀왔는데!”
“그러니까.”
유신이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게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 질문을 해.”
그가 일어서자 선율의 정수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의 시선이 쓰다듬듯 선율의 입술 위를 맴돌았다.
“다음 질문. 또 없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선율은 답을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황준기를 다치게 한 건 유신이 아니었다.
선율은 웃음 띤 유신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8년 전 사건을 얘기할 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답을 들을 수 없다면 다른 질문을 해야 했다.
“8년 전에 나 불러냈을 때 무슨 말 하려고 그랬니?”
유신의 눈썹이 조금 꿈틀했다.
“사고가 난 후에 말이야. 네가 나 열여섯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했잖아.”
질문이 의외였던 걸까.
유신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몇 초의 정적 후 그가 상체를 조금 기울여 선율과 시선을 맞추었다.
“기다려 달라고 하려고 했어.”
“…….”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
“그리고 내가 선배 사랑한다고.”
선율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날 그녀가 유신과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은 것은 소문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유신을 만나러 나가려던 때 그녀에 관한 추문이 학교에 쫙 퍼졌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선율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었다. 유신이 그녀를 기다리던 열여섯 시간 동안.
유신은 떨리는 선율의 눈꺼풀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었다. 눈을 뜨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선율은 차마 눈꺼풀을 들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스쳤다.
“내 마음은 아직 유효한데 선배만 변했네.”
슬픈 그의 음성에 선율의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