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17)화 (17/85)

17

선율은 마른 숨을 들이켰다.

‘황준기가 그렇게 많이 다쳤다고?’

기철은 황준기가 그냥 조금 다쳤다고만 얘기했었다. 술자리에 있던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모두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황준기가 복학 없이 곧바로 자퇴를 했기 때문에 그의 근황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친구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 좋은 나이에 1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죠.”

“1년이나요?”

“친구가 선처해 주지 않았거든요.”

황준기가 선처해 주지 않았다고? 어째서?

황준기는 유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선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운동장에서 만나 농구를 했고 얼마나 붙어 다녔으면 주변에서 사귀는 거 아니냐고 놀릴 정도였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바로 다음 순간 흘러나왔다.

“그런데 사실 친구를 그렇게 만든 건 내 아들이 아니라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아들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히끅. 히끅.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놀란 눈을 한 선율을 유심히 바라보며 여인이 말을 이었다.

“김한주 회장은 내 아들을 협박해 거짓 진술을 끌어내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덮었어요.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은 내 아들이 아니라 김한주 회장의 아들, 김기철입니다!”

여자는 선율의 손을 붙잡고 당부했다.

“모든 걸 알게 된 후 난 2년이나 진실을 알리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죠! 기자 몇 명이 취재를 한다고 왔었지만 정작 기사가 나가지는 않았어요.”

“아주머니…….”

“도와줘요. 요새 젊은 사람들 SNS 잘 쓴다면서요.”

여태껏 강직했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는 간절했다.

“여기저기 알려 줘요. 모두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해! 내 가정을 망가트린 그놈들, 난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예요.”

선율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지치고 고단한 여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누군가가 내 몸을 찍은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가해자는 클릭 한 번에 희열을 느끼겠지만 피해자는 평생을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웹에 한 번 올라간 영상은 잡초처럼 순식간에 퍼진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 뿌리 뽑히지도 않는다.

영상 속에서 선율은 잠들어 있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 속 그녀의 나신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만약 이 영상이 웹상에 유포된다면 퍼져 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야, 불구덩이에 휴대폰 처넣는다고 끝나는 줄 알아? 이런 고급 영상을 백업도 안 해 놨게?]

영상을 본 순간 눈이 돌아 버린 유신은 곧장 휴대폰을 숯불에 처넣었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나가 주먹질을 해 대는 유신을 향해 기철이 낄낄댄 순간, 유신은 악몽이 지금부터라는 걸 깨달았다.

당시 술자리에 세 사람이 있었다. 유신과 기철이 몸싸움을 벌이던 걸 막으려던 황준기가 달궈진 숯불 위로 넘어진 건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사고였다. 엄밀히 따지면 마구 휘두르던 기철의 손에 맞은 것이었지만 기철은 모든 죄를 유신에게 떠넘겼다.

유신의 과실로 일을 마무리하는 대가로 유신이 얻은 것은 ‘원본 동영상’이었다. 동영상이 든 USB를 넘기며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기철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역겨웠다. 그러나 감방에 들어간 후 깨달은 사실은 원본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그 끔찍한 지옥이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신은 언제 어디서 떠돌지 모르는 백업 영상을 찾아내기 위해 사설 해커를 고용해 웹망을 감시했다. 무려 8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선율에게 말하지 못한 그의 지난 삶은 그토록 버거웠다.

똑. 똑. 똑.

“유신아, 드, 들어왔냐?”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허리에 커다란 타월을 감고 있던 유신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있는 거 알고 오셨잖아요. 그래도 막 벗고 있을 때 들어오고 그러지는 말죠?”

“너 자식 버, 벗은 몸은 ‘학교’에서 다 뗐어, 인마.”

안방까지 쳐들어온 사람은 장복수였다. 굵은 뿔테 안경에 궁극의 곱슬머리를 가진 그는 50세란 나이보다 5년은 젊은 인상이었다. 유신이 복역할 때 같은 방을 썼던 인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천재적인 연구원으로, 전기 자동차 분야에 있어선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어릴 때부터 말더듬이 증상이 있어 종종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아는 사람들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너 갖다 주려고 좀 마, 만들어 봤다.”

복수의 양손엔 반찬이 꽉꽉 들어찬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유신은 머리를 대충 털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형님도 참. 어린애도 아니고 어련히 잘 챙겨 먹을까 봐.”

“내, 내 눈엔 아직도 감방에서 질질 짜던 코찔찔이로 보여.”

“‘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소리예요.”

유신이 짧게 웃으며 냉장고에 차곡차곡 반찬을 정리했다. 그사이 복수는 유신이 묵고 있는 호텔을 둘러보았다.

유신이 한국에 들어온 지 넉 달. 그동안 유신은 내내 루미르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회사 가까운 데 집을 얻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앞으로 매일 볼 사람이 이 근처에 살아서 굳이 옮길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누군지 복수는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징글징글한 사랑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그에게 유신은 그저 웃기만 했다.

“오,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야겠다. 내가 마, 만들었지만 간장게장이 기똥차게 됐거든.”

“간장게장도 만들 줄 알아요?”

“요, 요샌 인터넷 치면 다 나와.”

용기 뚜껑을 열며 자랑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는 복수를 보니 그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복수와는 인천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산업 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4년 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었다. 즉, 산업 스파이였던 셈.

몸담고 있던 회사로부터 고발당한 그는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이 개발한 전기 차 모터 시스템 관련 첨단 기술을 빼앗기 위해 오히려 회사에서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감방에서 칼을 갈았다.

그때 발견한 보물이 바로 유신이었다. 감방 구석에서 뭘 그리 끼적거리나 해서 흘끔 곁눈질해 보았더니 손바닥만 한 수첩 안에 온갖 설계도와 디자인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스케치는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기계를 잘 아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효율적인 도면과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

복수는 한눈에 유신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출소 후 베링거 모터스에 입사한 그는 회사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그의 디자인을 발견했다. 그게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진짜 맛있네요. 간도 적당하고.”

“그, 그치?”

짜식. 먹을 줄 안다니까.

꽃게 다리를 집어 야무지게 빨아 먹는 모습에 복수는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서, 선율 씨랑은 잘돼 가?”

복수가 가져온 반찬으로 상을 차리는 유신을 구경하며 복수가 물었다. 푸른색 앞치마를 깔끔하게 허리에 두른 유신이 착착 파를 썰며 대꾸했다.

“쉽지 않네요. 완전 철옹성이에요.”

“그녀 입장에선 다, 당연할 거야. 어린놈이 머, 먹튀했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때려죽이고 싶었나 봐요. 첫 만남부터 정강이를 걷어차더라고요.”

“마, 맞았어?”

“피했죠.”

“그럴 땐 요, 요령껏 맞아 줬어야지, 자식아!”

복수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뺀질뺀질한 얼굴 덕에 여자 한번 안 꼬셔 본 티가 이렇게 난다. 공을 들여 봤어야 알지, 공을!

“김기철이 한 짓은 어, 언제 밝힐 거야?”

“영상이 있다고는 말 안 해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에효, 갈 길이 멀다. 배, 백업본이 진짜 있는 건 맞아?”

“복역할 때 같은 방 썼던 문형주 있죠.”

“어어. 몰카로 들어온 그놈. 더, 더럽게 화장실 몰카 찍다가 걸렸다며.”

“그놈이 그러더라고요. 이런 일 하는 사람치고 백업 안 만들어 놓는 놈 없다고. 못 해도 제 손가락, 발가락 합친 만큼은 만들어 놨을 거라고 하던데.”

유신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백업본’을 찾느라 제 인생을 갈아 바친 유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복수는 목이 콱 메는 것 같았다.

“그, 그래도 너 자신을 너무 혹사하진 마라. 아, 아직 웹상에 올라온 적은 없잖아.”

“그래서 더 불안해요.”

“응?”

“내가 아는 김기철이라면…….”

뚝딱 된장찌개를 끓여 낸 유신이 송송 썰어 둔 파를 냄비 안에 던져 넣었다.

“아마도 헤어질 때를 노릴 테니까.”

며칠 전 우연히 기철과 선율이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선율에게 기철이 매달리는 모습을 본 후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엄습했다.

‘김기철은 필요 이상으로 선배에게 집착하고 있어. 영상을 빌미로 협박을 해서라도 잡아 두려 할 거다.’

백업본이 정말로 있다면 말이지.

유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어쩌면 이건 기회인지도 몰랐다.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불분명한 실체를 확인할 기회. 숯불고기 집에서 그 영상을 본 후로 지금껏 단 하루도 두 발 뻗고 잘 수 없었던 유신은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었다.

“유신아. 마, 만에 하나 백업본이 있다고 하면 어쩔 거냐? 생각해 둔 대, 대책은 있는 거야?”

“판은 깔아 놨어요. 타이밍이 중요할 뿐.”

유신이 ‘싹비워’라고 쓰인 설사약을 툭 두드리며 눈을 빛냈다.

김기철의 손에 선율과 관련된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부숴 버릴 거다.

‘이번엔 절대 못 빠져나가. 또라이 새끼야.’

* * *

이튿날.

선율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3B 펜슬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어제 들은 진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기철이 나랑 잤다고 거짓말을 했다. 분개한 유신이 그날 선율과 함께 있었던 건 자신이라며 김기철을 추궁했다. 몸싸움이 일어났고 옆에 있던 황준기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그 일로 유신은 징역을 살아야 했다. 유신의 모친은 황준기를 다치게 한 건 기철이라고 말하며, 유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가 선율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속속들이 밝혀지는 과거의 진실은 숨이 막히게 버거웠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숨겨진 진실이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 연결됐는데 하나가 부족해.’

그날 유신은 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경찰 조사에서 황준기를 다치게 한 게 자신이 아니라 기철이라고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다면 징역을 살지 않았을 텐데.

협박당한 걸까? 대체 어떤 협박이면 제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을 수가 있을까.

‘설마…… 나 때문일까?’

두려움이 어깨를 짓눌렀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아직 진실은 모르는 거니까. 애써 마음을 다독여 봐도 뇌리에 스며드는 가정은 버겁도록 잔인하기만 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선율의 파티션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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