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또 시작이네, 조유신.”
그의 마음을 꿈에도 모른 채 선율은 조소했다.
그래, 항상 넌 이따위야.
넌 이번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발을 뺀다.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지난 네 8년의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해 주지 않은 채.
“내가 너에게 해명을 요구한 건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야.”
잠시나마 흔들렸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네가 더럽힌 내 과거를 납득하고 싶어서지.”
선율은 희뿌연 눈으로 유신을 노려보았다.
“김기철이 나랑 잤다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그날 나랑 있었던 사람이 너였다고 얘기했다고 쳐. 그러면 그 후엔 왜 자퇴한 건데? 앞뒤가 안 맞잖아.”
“선배가 어떤 기분일지 알아. 내가 해명하기 전까진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거란 것도.”
“이제 와서 해명한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 돌아갈 일은 없어.”
유신의 눈매가 얼핏 서글퍼졌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선율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속을 파내어 보고 싶었다.
“내기 하나 할까요?”
“무슨…….”
“결국엔 이 예쁜 두 발로 나한테 오게 될 거라는 거.”
그의 손아귀가 느릿하게 발등을 어루만졌다. 스타킹 위로 느껴지는 생경한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아직 그에게 발이 붙잡혀 있던 걸 몰랐던 선율은 화들짝 놀라 그를 뿌리치고 뒷걸음질 쳤다.
“성공하더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좋은데 조유신.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전 남친 나타났다고 홀랑 넘어가는 지조 없는 여자도 아니고.”
“지조.”
유신이 코웃음 쳤다.
“지킬 놈한테나 지켜야지.”
마침 회식을 끝낸 팀원들이 우르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스타킹은 버려요. 좀 찢어졌네.”
“상관 마.”
선율은 홱 돌아서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발등이 화상을 입은 듯 뜨끈뜨끈했다.
* * *
선율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유신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더러운 추문만 남기고 감쪽같이 증발했다가 8년 만에 나타난 놈. 그래 놓고 아주 뻔뻔하게 선배를 되찾으러 왔다고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말하던 그.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철저히 광고주로만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율이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엔 비밀이 가득했다. 선율은 그 비밀이 자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유신이 손에 입었다는 상처, 기철의 어머니와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 모습…….’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야.]
서글픈 눈빛으로 전하던 그의 진심.
선율을 되찾으려면 묻어 둔 과거를 꺼내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극도로 숨기려 하는 모습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어.”
선율은 벌떡 이불을 걷고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거래처 번호로 가득한 목록 속에서 민서의 이름을 찾아낸 그녀가 전화를 걸었다.
“민서야. 나야, 한선율.”
대학 동창들과는 거의 연락을 끊다시피 한 터라 유일하게 남아 있는 번호였다. 민서가 유학을 다녀온 터라 번호가 바뀌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민서가 맞았다.
―한선율? 우와, 오랜만이다!
“그러게. 동창회에서 만나고 처음이지?”
―그건 만난 걸로 치기도 좀 그렇지! 그땐 둘이 얘기도 거의 못했잖아. 네가 아직 내 번호 가지고 있는지 몰랐는데?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 말까 했는데 받길 잘했네. 밤늦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물어볼 게 있어서. 통화 괜찮니?”
―응응, 물어봐. 자기 싫어서 빈둥거리는 중이라 오래 해도 괜찮아!
다행히 민서는 반갑게 전화를 받아 주었다.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후 선율은 어렵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 혹시 8년 전 사건 기억나?”
―8년 전? 아아, 조유신 자퇴한 거 말하는 거야?
“응.”
그때 일이 동창들 사이에서 어지간히 큰 이슈이긴 했나 보다. 8년 전 얘기를 꺼내자마자 민서는 대뜸 그때 일을 짚어 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조유신이랑 황준기 자퇴하고 김기철도 경찰 조사다 뭐다 꽤나 시달렸잖아. 셋이 술 마시다가 싸움 붙었었다며? 그때 황준기가 좀 다쳤다고 들었는데 당사자 두 명이 증발하다시피 사라진 데다 김기철도 그날 일은 입도 벙긋하지 않아서 그냥 묻혔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은 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아아, 지난번 동창회 때 조유신 나타나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나 보네.
민서가 말한 내용은 선율이 지금껏 알고 있던 사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선율이 말을 이었다.
“혹시 민서야, 내 소문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
―네 소문 뭐? 아아……. 그거.
민서의 음성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연하남 킬러. 잘 주는 계집애.
한선율 체위가 어땠다더라, 몸매는 괜찮은데 나무토막 같아서 재미가 없었다더라, 온갖 소문이 난무했던 그때의 기억은 민서에게도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남자애들이 술자리에서 떠든 말이라고 듣기만 했어.
용기 내 전화를 걸었는데 소득은 별로 없었다.
“응, 얘기해 줘서 고맙다, 민서야.”
애써 실망감을 감춘 선율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아, 선율아.
민서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내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많이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 곧 결혼하잖아. 좋은 일 앞두고 남 일에 끼어드는 게 좀 그래서……. 아무튼 꺼낸 김에 그냥 말할게. 아무래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
“뭔데?”
―성환이가 다니는 회사가 삼성동 쪽인데. 그게 한주그룹 근처거든.
왜인지 모르겠다.
민서의 입에서 ‘한주그룹’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선율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느낌이었다.
“응, 계속 얘기해.”
―몇 년 전부터 한주그룹 앞에서 피켓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아줌마가 하나 있대.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뭐 그런 말이 쓰여 있다고 하는데.
“…….”
―그게 조유신 엄마인 것 같다고 하더라.
쿵, 정수리로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차마 답하지 못한 선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 *
이른 새벽, 선율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한주그룹 앞으로 향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회사 앞은 한산한 편이었다.
기철의 부친이 운영하는 한주그룹은 자동차 사업을 메인으로 점차 규모를 늘려 가고 있는 탄탄한 중견 기업이었다.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자동차 회사의 파트너 회사로 시작했다가 최근 전기 차 시장이 호황기를 맞으며 해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 우뚝 선 빌딩을 올려다보며 선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구나.”
기철이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아들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위용이 대단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터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경비원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저 아줌마 또 왔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참 부지런도 하지.”
선율의 시선 끝에 커다란 피켓을 끌고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챙이 넓은 햇볕 가림용 모자를 쓰고 까만 등산 가방을 메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선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민서가 말한 그분이구나.’
경비원은 쓰레기를 치우던 걸 멈추고 여인에게 다가섰다. 무거워 바닥에 질질 끌리는 피켓을 들어 주며 쯧 혀를 찼다.
“아줌마, 날마다 이게 무슨 짓이요? 이제 그만 오라니까! 사정은 딱하지만 이래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우리같이 없이 사는 사람들 말은 아무도 안 들어준다니까?”
“개뿔. 없이 살기는 누가 없이 산다고 그래요?”
의외로 여자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머쓱해진 경비원은 괜히 그녀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잔소리를 했다.
“아줌마 거기서 허구한 날 1인 시위 해 봤자 헛고생이야. 누구 하나 취재 오는 사람도 없잖아. 한주그룹에서 막고 있는데 평범한 소시민이 뭘 어떻게 하겠어요. 매일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속에서 천불이 나서 그래. 이제 그만 좀 와요, 응?”
여자는 대꾸 없이 묵묵히 피켓을 바로 세웠다. 마른 체구와 달리 곧게 편 어깨는 당당했고 눈빛은 다부졌다. 한참이나 곁을 서성거리던 경비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간 후로도 여자는 꿈쩍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선율은 여인의 몸통보다 큰 커다란 피켓 위의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곤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 아들의 억울한 옥살이! 한주그룹 김기철 회장의 해명을 요구한다!>
옥살이라니, 이게 무슨 뜻이야?
새카만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피켓에 쓰인 글자는 아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설마 조유신이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뜻이야?”
꿈에도 몰랐다.
하루아침에 학교에서 증발한 유신이 교도소에 들어갔을 줄은.
술자리에서 싸움이 붙었고 황준기가 다쳤다는 건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술자리에서 벌어진 실수였다고, 기철이 그랬었다. 한데 그런 일로 감옥까지 간단 말이야?
선율은 황망한 얼굴로 피켓을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낡은 피켓 안에 진실이 있었다.
‘억울한 옥살이라니.’
그래서 누구도 찾을 수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고, 그래서 그토록 숨기려 했던 거다.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의 조각은 칼끝보다 날카롭게 선율의 가슴을 후벼 팠다.
출근하는 사람이 속속들이 피켓 앞을 스쳐 지나갔다. 침묵으로 시위하는 여인에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그녀는 투명 인간이었다. 군중 속에 고립된 외딴 섬.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결코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율은 떨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시죠?”
“지나가는 길에 피켓을 봐서요. 얘기를 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기자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요.”
“실은…….”
선율은 그녀에게 자신이 유신의 대학교 동문이라고 소개했다. 학년이 달라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다고.
“당시 술자리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옥살이라니……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여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선율을 응시했다. 탐색하듯 선율을 훑어본 그녀가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 끝에 입을 열었다.
“관심 가져 주어 고맙네요. 온종일 이러고 서 있어도 말 한마디 거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닙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요.”
그녀의 말에 선율의 손아귀에 땀이 배어났다. 대체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걸까.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윽고 여자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작은 다툼이 아니었어요.”
“네?”
“한 사람 얼굴이 새카맣게 불타 버렸는데, 어떻게 그걸 작은 다툼이라고 하겠어요.”
쫘악.
선율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