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 죄송합니다. 다치신 줄도 모르고 제가 괜한 걸 여쭤봤네요.”
“괜찮습니다.”
유신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동묵을 안심시켰다. 괜한 호기심으로 광고주의 치부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아찔해진 동묵이 연신 사과하니 분위기는 더욱 이상해졌다.
“조 이사님, 아직 결혼 전이죠?”
분위기를 읽은 성범이 주제를 환기시켰다.
“애인은 있나? 내 조카 중에 스튜어디스 하고 있는 애가 있는데 아주 참하고 괜찮아요. 이사님만 괜찮으면 소개해 주고 싶은데 어때요?”
유신의 대답은 정중하고 간결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지병이 있어서.”
“지, 지병이요? 나이도 젊은 분이 웬 지병이요?”
“가슴 통증이 심합니다.”
그러곤 또 선율을 바라본다.
“그것도 꽤 자주.”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선율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한결같이 저를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이쿠야, 심장 안 좋으면 위험한데! 얼른 병원부터 가 보세요. 젊다고 자기 몸 과신했다가 진짜 골로 가요!”
성범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선율은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저를 향한 유신의 시선을 누가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수그린 정수리 위로 유신의 눈빛이 매끄럽게 흘렀다.
“한 팀장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선율은 눈매를 지그시 모았다가 풀었다.
괜한 구설수에 오를까 봐 몸을 사리는 심정은 고려도 하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구는 그가 괘씸했다.
‘지는 갑이라 이거지. 너만 사람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줄 알아?’
선율은 잔을 내려놓고 다부지게 유신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어요?”
유신의 입가가 재미있다는 듯 호선을 그렸다.
“어떤 의미로?”
“대학 중퇴에, 나이도 어리고, 들어 보니 타고난 성골도 아니라던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베링거 모터스 이사가 되신 건지 궁금해서요.”
대담한 질문에 주위 사람들이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정작 유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건조하게 대꾸했다.
“올라간 게 아니라 내리꽂혔습니다, 낙하산으로.”
그러곤 이를 드러내며 나른하게 웃었다.
“뒷조사까지 한 걸 보면 나한테 관심 많았나 봐요.”
“뒷조사라고 할 게 뭐 있나요? 검색창에 이름만 쳐 보면 알 수 있는 걸.”
“안 나올 텐데.”
긴 손가락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순간적으로 그의 눈빛에 스쳐 간 열기를 선율은 놓치지 않았다.
분노일까? 회한?
아니, 그건 절절함이었다.
모든 걸 잃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던 사람이었거든요. 베링거에서 아주 꼭꼭 숨겨 놓은 비밀 병기라.”
무슨 뜻일까.
내가 모르는 네 시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걸까?
선율은 궁금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유신은 입을 다문 그녀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침묵이 더해지자 분위기는 더없이 가라앉았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회식이 침울하게 흐르자 성범이 다시 중재에 나섰다.
“자자, 이사님 성공 스토리는 다음에 또 듣기로 하고! 오늘은 중요한 미팅 잘 끝냈으니 열심히 먹고 마시고 놉시다. 오케이?”
“좋아요! 먹고 죽자!”
“CD님이 시원하게 건배사 한번 하시죠!”
눈치를 살핀 팀원들이 잔을 치켜들며 호응했다.
“그럴까?”
호응에 힘입은 성범이 잔을 들고 외쳤다.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다! 청바지!”
“청바지!”
각자의 잔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선율은 다시 시끌벅적해진 회식 자리에 대충 장단 맞추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비운 술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신의 눈동자가 좇았다.
‘후우, 괜히 도발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네.’
정원으로 나온 선율은 벌게진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조유신한테 말리는 기분이다.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답을 모르겠다. 화를 내도 그는 웃었고, 무시하면 더 진하게 웃었다. 집요한 그의 눈빛은 아무 일 없었던 사이인 척 무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율을 매번 무너트렸다.
“……짜증 나, 정말.”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릴 수가 있다니.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술이나 깨고 들어가자.’
너무 급하게 마신 탓인지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선율은 가방에 항상 구비하고 다니는 숙취 해소제 한 병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고풍스럽게 꾸며진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선배.”
머리 위로 기다란 음영이 드리워졌을 때 선율은 그가 나왔다는 걸 알았다. 그림자처럼 곁에 선 그를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말없이 곁을 걷던 유신이 묵직한 입술을 열었다.
“아까 나한테 묻고 싶은 거 뭐였어요?”
그의 음성에 웃음기는 없었다.
“진짜 궁금한 거 그거 아니었잖아.”
투명 인간 취급하며 걷던 선율이 걸음을 멈췄다.
지금껏 그는 그녀의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8년 전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건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날 정말 좋아한 건 맞는지.
너한테 궁금한 거 따윈 없다고 쳐내려던 선율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랑 잤다고 말하고 다닌 거 진짜 너야?”
선율은 한참이나 높은 곳에 있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줘.”
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유신은 대답하는 대신 한참이나 선율을 쳐다보았다.
선율은 지금 그가 어떤 대답을 해 주길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제발 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해 줘. 그래야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니…… 아니다. 그냥 네가 그랬다고 해. 모든 게 오해였다면 8년 동안이나 널 미워하느라 곪아 버린 내가 너무 가엾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네가 그랬다고 해.
“어. 내가 했어.”
그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선율은 간절히 되뇌었던 제 바람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나 보다. 모든 게 오해였다고…… 그가 말해 주길 원했었나 보다.
“어째서?”
선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담백하게 인정하는 그의 음성을 들으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을 지경이었다.
“가을 MT 다음 날 기억해요?”
“기억해.”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선율이 유신과 함께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으니까.
“김기철이 그날 선배랑 잤다고 떠들어 대더군요.”
“뭐?”
정확히는 따먹었다고 했었지.
“말도 안 돼! 난 그때 기철이와 친하지도 않았어. 단둘이 밥 한 번 먹은 적도 없었다고!”
“알아.”
“걔가 거짓말한 거야. 난…….”
“그래.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유신은 덜덜 떨리는 선율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아쥐었다.
“그날 우리 온종일 같이 있었잖아요. 김기철이 말한 일 따위 없었다는 거 알아.”
내 거였다. 내 옆에 있었고 나만 바라봤고 나만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널 두고 김기철이 거짓말을 했어.
너랑 잤다고. 네 몸을 몰래 찍은 동영상을 들이대면서.
“그러니 내가 안 돌겠어요?”
속에 가득 찬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뱉을 수 없어 유신 역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선율이 받은 충격은 그보다 더했다.
선율은 숨이 막혀 가슴을 틀어쥐었다.
“어떻게…….”
기철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를 의심한 적 없었다. 유신 얘기가 나오면 발작하듯 싫어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선율을 괴롭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가 선율과 잤다고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대학 시절 그녀를 그토록 괴롭힌 소문의 발단이 기철이었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잠수는 왜 탄 건데? 나한테 말했으면 됐잖아!”
“잠수 탄 게 아니야. 내가 선배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는…….”
비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선율이 비틀거렸다. 유신이 재빨리 팔을 잡았으나 네모난 돌 틈 사이로 뾰족한 하이힐 굽이 끼어 버렸다.
“아흑, 진짜!”
선율은 신경질적으로 굽을 빼냈다. 그러다가 힘을 과하게 주었는지 하이힐이 몇 걸음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툭―
선율은 흙바닥에 떨어진 하이힐 한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최악이다.
왜 이런 순간엔 하이힐도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다.
코앞에 있는 걸 주우러 갈 힘도 없어서 선율은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유신이 해 준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누가 제 몸에 손아귀를 집어넣어 영혼을 쑥 꺼내 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유신만 원망하며 살았는데.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저급한 가십에 시시덕거리는 것처럼 너도 고작 그런 인간이었구나, 그런 너에게 마음을 죄다 줘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나를 미워하며 살았는데.
그런 그녀의 곁을 말없이 지켜 준 기철에게 항상 고마웠었다. 모두가 그녀를 가십 삼아 떠들어 댈 때 묵묵히 손을 잡아 주던 그를, 믿었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토록 포악스럽게 구는데도 그를 버리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믿었던 기철에 대한 배신감이 와르르 쏟아져 그녀를 덮쳤다.
유신은 저벅저벅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하이힐을 주웠다. 스타킹 신은 발에 흙이 묻은 줄도 모르고 얼이 빠져 서 있는 선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손이 흙 묻은 발을 감쌌다.
“미안해.”
따뜻한 손길이 닿자 선율의 가슴이 무너졌다.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유신은 말없이 하이힐을 신겨 주었다. 그러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보고 싶었어, 선배.”
낮은 목소리가 떨렸다.
어떤 상황에도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던 게 거짓인 것처럼.
“숱하게 달려오고 넘치게 넘어졌어.”
“…….”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야.”
그의 목소리 끝이 옅게 갈라졌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유신이 고개를 들어 선율을 보았다. 눈물을 참아 내느라 빨갛게 핏발이 선 채였다.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선율은 갈등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져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아니. 난 이해 못하겠어.”
선율은 하이힐 신은 발을 한 걸음 뒤로 물렸다.
“네 말대로 그날 일이 기철이 농간이었다고 쳐. 그럼 왜 지금껏 해명하지 않았어?”
“…….”
“소문이 돈 직후 넌 사라졌어. 왜 그랬니? 해명했어야지! 날 지켜 줬어야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오직 세 사람뿐이던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어떻게 퍼지게 된 건지, 기철이 왜 자신을 두고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게다가.
모든 게 기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더더욱 유신은 숨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지금이라도 말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고 너는 왜 해명도 없이 사라진 건지 다 얘기하란 말이야!”
“못 한다면.”
유신이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선율을 올려다보았다.
“나 안 만나 줄 거예요?”
달빛을 등에 지고 올려다보는 눈빛이 착잡했다.
그 역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저를 원망한다는 것은 형극이었다. 가슴이 아우성쳤다. 그냥 다 말해 버리라고. 그럼 적어도 미움은 받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유신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얘기해, 그 새끼가 네 몸을 찍었다는 것을.
그 더러운 손이 잠든 네 몸을 더듬고, 내게만 열어 주었던 네 은밀한 곳을 구석구석 찍었다고.
그 개새끼 손에 아직 그게 남아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