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14)화 (14/85)

14

그의 입술이 느리게 목뒤에 닿았다. 맨살에 닿은 날숨의 느낌이 아찔했다.

“뭐, 뭐 하는……!”

틱.

목덜미 뒤쪽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의 입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까만색 태그를 보고 나서야 선율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아, 태그가…….”

“이렇게 티를 내 주시니.”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태그를 가볍게 흔들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마저 유순하지는 않았다. 당장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욕망이 일렁였다.

선율의 포커페이스가 흔들렸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입으로…….”

“지금 여기 있는 것 중 제일 효율적이라.”

그가 엄지로 제 입술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입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거든요.”

“…….”

“알 텐데, 아마.”

귓불이 벌게질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었다.

“스커트 태그도 떼 줄까요?”

그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엉덩이 쪽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달고 다니면 다른 놈들이 거기만 쳐다볼 거 같은데.”

선율은 황급히 태그를 손으로 말아 쥐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저도 손이란 게 있거든요.”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태그도 뜯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다니.

‘이게 웬 망신이야.’

그 순간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했다. 선율은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화장실에서 스커트에 달랑거리는 태그를 떼어 내고 화장을 정돈하니 미팅 시간까지 단 3분이 남았다.

선율은 황망한 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미팅 룸 문고리를 잡은 채 깊이 심호흡을 했다.

‘저 안에 앉아 있는 건 조유신이 아니라 까치까치 조까치다. 아자아자 파이팅!’

대학 시절 유신에게 고백했다가 짤 없이 차인 신입생 하나가 붙인 별명이 바로 ‘조까치’였다. 밤새 퍼마시며 조까치, 조까치 얼마나 부르짖던지.

유신에게 차인 여학생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그 별명은 더욱 유명해졌다. 나중에는 저들끼리 ‘까치 특공대’라는 희한한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밤마다 함께 실연의 슬픔을 달랬다지.

그 생각을 하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선율은 다소 차분해진 모습으로 미팅 룸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선율입니다. 먼저들 와 계셨네요.”

회의실엔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광고 총책임자인 방성범 CD, 1팀의 양아준 팀장과 도동묵 대리, 2팀 카피라이터 주희, 제작 팀장인 기철, 그리고 광고주 유신.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유신은 불과 1분 만에 침착해져서 나타난 선율을 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트북 다 연결해 놨고 PPT 띄워 놨어요. 자료는 이쪽이고요.”

주희가 소곤거리며 포인터를 건넸다.

“땡큐.”

선율은 수고해 준 그녀를 칭찬해 주고 스크린 앞에 섰다.

지난 일주일간 불태웠던 시간과 노력을 쏟아 낼 시간이었다.

* * *

다행히 선율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호응을 얻었다.

‘가장 조용한 질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1팀에 비해 더 신선하고 강렬한 느낌이라는 평이었다.

“신무기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은 것 같아. 강렬하잖아. 남자들이 환장할 만하지. 자네 생각은 어때?”

성범이 제일 먼저 선율의 손을 들어주었고 기철 역시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슈퍼 스터드의 타깃층은 남성, 그것도 전 세계 0.01퍼센트에 속하는 부유층이죠. 차고에 널린 당신네들 차들과 똑같은 차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됐다!

선율은 테이블 밑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양 팀장의 모습이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일단 저희 쪽 의견은 대충 합치가 된 거 같은데…… 조 이사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성범이 상석에 앉은 유신을 향해 물었다. 그는 어깨에 짙은 푸른색 코트를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입술 한 번을 움직이지 않았다.

“음.”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닫혔던 그의 입술이 매끄럽게 열리는 순간 선율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두 의견 모두 나쁘지는 않네요.”

선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가 그녀의 손을 들어준대도 광고주가 ‘No’를 외치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과연 그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돌아온 그를 욕하고, 원망하고, 정강이까지 걷어찼는데…… 설마 그딴 걸로 보복하지는 않겠지. 선율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제발!

“1팀 의견은 슈퍼 스터드의 특징을 잘 살려 내서 좋고 2팀은…….”

유신의 시선이 선율을 꿰뚫었다.

“섹시해서 좋네요.”

선율의 목덜미가 확 달아올랐다. 캐치프레이즈에 대한 평가라는 걸 알지만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하하, 이번에는 한 팀장이 선방했네. 양 팀장, 좀 더 분발해야겠어, 허허!”

성범이 호탕하게 웃으며 양 팀장을 독려했다. 어깨가 축 처진 양 팀장은 금세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최종 미팅 땐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건 기철이 유일했다.

유신의 입에서 섹시하다는 표현이 나오자 참을 수 없이 입맛이 썼다. 그의 눈빛이 향한 곳을 기철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자식이 진짜!’

그는 몹시 불쾌한 듯 종이를 와락 구겼다.

꼴도 보기 싫은 놈과 마주 앉아 있는 것도 힘든데 꾸역꾸역 비위까지 맞춰야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선율에게 닿은 그의 눅진한 시선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자괴감이 일었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다른 미팅이 잡혀 있어서요.”

기철이 미간을 구긴 채 일어났다.

툭툭대는 손길로 자료를 챙기는 그를 보며 유신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쉽네요, 김 팀장님. 오늘 회식 제안하려 했는데.”

“회식, 이요?”

“다들 수고했으니까.”

기철의 얼굴은 숫제 불타는 고구마가 된 것 같았다. 열받아 죽겠는데 표현은 못 하고 그야말로 속이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김 팀장님은 못 오시겠네요. 다. 른. 미. 팅. 이 잡혀 있으셔서.”

“…….”

저 반반한 낯짝 한 대 후려치면 깽값 얼마를 물어야 할까.

바드득 이가 갈렸다.

‘광고주만 아니었어도 진짜…….’

선율과 그가 한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는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제 와서 미팅 시간이 미뤄졌다고 하면 이상하겠지? 날짜를 착각했다고 할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유신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갑시다. 다들 준비하고 나와요.”

* * *

유신이 예약한 곳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한우 오마카세 집이었다.

방성범 CD와 유신이 한 차에 탔고 나머지 네 명은 선율의 차로 함께 이동했다.

10분쯤 가니 겉보기부터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여자가 직접 입구까지 내려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조유신 이사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안채 가장 깊숙한 곳으로 안내되었다.

“와아, 이사님 덕분에 이런 곳도 다 와 보네요. 이런 데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곳 아닌가요? 대기업 회장님들 식사하는 장소 같아요.”

도동묵 대리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광고주 접대하느라 호화스러운 음식점은 제법 많이 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널찍한 식탁 위에는 인원별로 테이블 세팅이 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긴 밑반찬은 정갈했고 함께 놓인 술병은 딱 봐도 값비싸 보였다.

“많이 드세요. 아이디어 짜내느라 몇 날 며칠 동안 고생하셨을 텐데.”

“역시 우리 이사님 많이 배우신 분! 모든 광고주가 딱 이사님만 같으면 좋겠어요, 헤헤.”

잠시 후 주방장이 등장했다. 높은 요리사 모자를 쓴 그가 나뭇가지처럼 생긴 목재 접시에 직접 고기를 세팅했다. 나뭇가지 끝마다 넓적한 접시가 붙어 있어 층층이 다양한 음식을 놓을 수 있었다.

“맨 위가 등심, 바로 아래층이 부챗살입니다. 그다음이 업진살, 눈꽃살이고요. 기름기가 적은 부위부터 구워 드리겠습니다.”

적당히 달궈진 숯불 위로 소고기가 놓였다. 고기가 익는 동안 주방장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소스는 생와사비와 소금, 그리고 저희 가게의 특제 소스를 준비했습니다. 삼합을 즐기실 수 있게 버섯과 관자도 함께 세팅했으니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동묵과 주희는 거의 접시에 코를 박고 먹었고 성범은 체통을 지키느라 한 점씩 맛을 보았다. 너무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주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유신이 선율을 바라보았다.

선율은 입맛이 없어 한 점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하필 유신과 맞은편 자리였다. 점심을 허겁지겁 먹어 가뜩이나 속이 안 좋은데 불편한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니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유신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선율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공교롭게도 양 팀장이 집기 위해 막 손을 뻗은 그 고기였다.

“좀 먹어요.”

당신 먹이려고 여기까지 온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네, 그럼.”

선율은 마지못해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고소하게 퍼지는 육즙이 일품이었으나 여전히 속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님은 볼 때마다 장갑을 끼고 있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접시에 코를 박고 우물우물 고기를 씹던 동묵이 물었다. 물어 놓고 아차 싶은 표정이었으나 유신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손을 다쳤습니다. 누굴 좀 지키려다가.”

그러면서 선율을 쳐다본다.

‘뭐야, 왜 날 봐?’

그녀가 알기로 자신 때문에 유신이 다칠 일은 없었다. 하다못해 그녀 때문에 누군가와 시비가 붙은 적도 없었다.

‘이 타이밍에 왜 날 쳐다보는 거야?’

이거 굉장히 찜찜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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