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13)화 (13/85)

13

선율은 검은 봉지를 평상에 내려놓고 가지런히 슬리퍼를 벗었다. 가지고 나온 물티슈로 야무지게 평상을 닦고서 검은 봉지에 든 소주 두 병을 꺼냈다. 그녀가 안주도 없이 한 병을 야무지게 비우는 동안 유신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난 8년을 그토록 그리워했던 여자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갈 수가 없다.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버려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숨죽여 다짐했던 지난 세월은 이토록 부질없었다.

욕심이 버려지지 않았다, 하나도.

“저 버릇 여전하네.”

두 병째 소주를 따서 졸졸졸 종이컵에 부은 그녀가 숟가락을 꺼내는 것을 보며 유신이 픽 웃었다.

혹시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씩씩해서 다행이다.

이러면 좀 거창하게 준비한 게 좀 민망해지네.

그가 주머니에 넣어 둔 깨끗한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우거진 나뭇잎이 슬쩍슬쩍 그녀의 얼굴을 가릴 때마다 애가 탔다. 지금 당장 달려가 안고 싶다. 네 앞에 모든 걸 털어놓고 다시 받아 달라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김기철이 네 약점을 쥐고 있었어. 널 지키려고 네 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 말을 하면 선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뭐든 분명한 걸 좋아하는 선배는 아마도, 그 약점이란 게 뭔지 알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다.

김기철과 황준기, 그리고 나.

8년 전 셋이 술을 마신 날 벌어진 사고. 그 진실을 알게 되면 선율은 어쩌면 평생 두 발 뻗고 잘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몰라야만 하는 진실이란 게 있다. 그 대가로 내가 당신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래, 기꺼이.

유신은 피가 배어날 정도로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보고 싶다, 선배.”

곁에는 있고 싶은 욕심이 독이 되어 그를 죽인다. 가까워질수록 네게 상처가 될 나를 알기에 고통은 오롯이 제가 감당하기로 한다.

“너무 보고 싶어.”

유신은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앞을 가로막은 산이 너무 높다. 네게 가자면 그 산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는데.

내 욕심이 널 깔리게 할까 두려워.

아마 넌 질식하고 말 거야.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

“어떡할까, 선배.”

나 진짜 선배 지켜 주고 싶은데…… 너무 욕심이 나.

참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

유신은 마지막으로 선율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평상 위에서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졌다.

* * *

회의 한 시간 전.

어제 계순이 찾아와 깽판을 치는 바람에 하루 밀린 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휴, 해도 해도 끝이 없네.”

계순에게 뺨을 얻어맞을 때 재수 없게 커피가 노트북에 쏟아지면서 며칠을 바쳐 준비한 자료가 싹 날아갔다.

다행히 백업을 해 두었지만 수정을 거치기 전의 초안이라 손볼 곳이 많았다. 선율은 아침과 점심을 싹 다 거른 채 업무에 몰두했다. 주희의 사정도 다르지는 않아서 아까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똑똑.

살짝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에 선율이 고개를 들었다.

“한 팀장님, 점심은 먹어 가면서 해요. 주희 씨도요.”

“아, 김 팀장님.”

자리에 찾아온 건 기철이었다. 그에게 이별을 고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까닭에 그가 자리에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선율은 적잖이 놀랐다.

기철이 내민 건 평소 선율이 좋아하던 포장 도시락이었다. 선율이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할 때 옆자리에 있던 주희가 냉큼 손을 뻗었다.

“대박! 안 그래도 배고파 죽을 뻔했어요. 역시 우리 팀 챙겨 주는 건 김 팀장님밖에 없다니까요? 최고, 최고!”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자료 더미를 쓰윽 밀어 식사할 자리를 만드는 그녀를 보며 기철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우리 팀 점심 먹으러 나갈 때 보니까 두 분은 밥 챙겨 먹을 시간도 없어 보여서요. 우리 팀 식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포장했어요.”

“와, 장어덮밥! 저 이거 완전 좋아하는데! 근데 여기 좀 비싼 데 아니에요?”

“법인 카드 쓴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주희는 신이 나서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예전에 듣기론 과거 주희는 심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 격한 운동을 못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려면 먹는 걸 줄일 수밖에 없다고.

그녀가 일 년에 서른 번쯤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또 한 번 다이어트를 포기하며 그녀는 선언했다.

[이 좋은 세상, 먹고 싶은 음식도 못 먹고 살면 태어난 의미가 있겠어요? 앞으로 황주희 인생에 다이어트 따윈 없습니다! 진짜로요!]

룰루랄라 젓가락을 세팅하는 주희를 보며 선율은 멋쩍은 얼굴을 했다.

따지고 보면 자료가 날아간 건 제 탓인데 괜히 주희까지 고생시킨 것 같았다. 벌써 젓가락까지 뜯었는데 도로 가져가라고 할 수도 없어서, 선율은 난감한 표정으로 인사치레를 했다.

“김 팀장님, 도시락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기철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게 먹어.”

* * *

주희는 그야말로 폭풍 흡입을 시전했다.

며칠간 못 먹은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폭풍 먹방을 선보이는 그녀를 보며 선율은 미안함과 동시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몸에 어떻게 저 많은 음식이 다 들어가지?’

맨날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렇지 주희는 그리 뚱뚱한 체격은 아니었다. 본인 말로는 안 보이는 데 살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는데 선율이 보기엔 그냥 통통한 정도였다.

“팀장님, 이거 다 드신 거죠?”

본인 몫을 순식간에 해치운 것도 모자라 그녀가 이번엔 선율의 도시락을 노렸다.

“네. 그렇긴 한데. 먹던 건데 괜찮겠어요?”

입맛이 없어 반쯤 먹고 내버려 둔 도시락을 주희가 잽싸게 채 갔다.

“뭐 어때요! 회사 식구끼리.”

“그래도……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덜어 놓을 걸 그랬어요.”

“상관없어요. 제가 심장이 약해 그렇지 이래 봬도 강철 위장이라 어지간한 건 먹고도 탈 안 난답니다.”

주희가 밥 위에 켜켜이 겹쳐진 장어를 덥석 집었다. 그 순간 책상 한편에 밀쳐놨던 서류 뭉치가 기우뚱 쓰러졌다.

“오메!”

주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동시에 그녀의 젓가락을 떠난 장어가 맹렬히 선율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헉!”

“…….”

하필이면 양념 장어.

“어, 어떡해요, 팀장님.”

선율의 아이보리색 블라우스가 순식간에 양념으로 범벅이 되었다. 당황한 주희는 물티슈를 꺼내 재빨리 선율의 옷을 닦았다. 그 바람에 양념이 번져 블라우스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주희는 금세 울상을 지었다.

“아……. 어떡해……. 저 때문에…….”

“울지 마요, 뚝.”

선율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희의 얼굴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아직 회의 시간까지 30분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 시간 있으니까.”

“제가 손빨래할까요? 옷 벗어 주시면 바로 화장실에서 빨아 올게요.”

“마저 먹고 뒷정리 부탁해요, 주희 씨. 발표 자료는 거의 마무리했으니 최종 확인하고 이따 회의실 올라올 때 들고 와요.”

빠르게 판단을 내린 선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블라우스 사러.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요.”

선율은 지갑만 들고 곧장 건물 밖으로 향했다.

다행히 회사가 강남 한복판이라 옷을 파는 곳은 많았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옷집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블라우스 하나 사려고요. 깔끔하고 단정한 걸로.”

그녀를 훑어본 점원은 대충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짐작했다.

“지금 입고 계신 것과 비슷한 스타일이면 될까요? 스커트도 같이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제 보니 스커트에도 양념이 조금 묻어 있었다. 다크베이지 색상이라 괜찮을 줄 같았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여지없이 티가 났다.

“네, 스커트도 같이 주세요.”

선율은 직원이 눈썰미로 골라 준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고 나왔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회의까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회사까지 5분, 엘리베이터에서 회의실까지 5분. 손님보다는 먼저 가 있어야 하니 뛰어야겠네.’

빠른 속도로 계산을 마친 선율이 달리기 시작했다.

스커트가 조금 타이트한 느낌이 들었지만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7센티미터 하이힐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아스팔트를 달렸다.

평소라면 5분이 걸리는 거리를 3분 만에 주파한 선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하아……. 몸이 썩었네, 썩었어. 고작 3분 달렸다고 이렇게 숨이 차다니.”

요새 계속된 야근으로 통 운동을 못했더니 이 모양이다. 선율은 허리를 숙여 경직된 종아리를 주물렀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선율이 스커트를 한 번 끌어 내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쪽에 누가 타 있는 건 알았지만 선율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느라 경황이 없어 대충 묵례만 건네고 돌아섰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대표실이 있는 13층이 이미 눌려 있네?

“…….”

그제야 뒷덜미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괜스레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보네요?”

살짝 웃음기 섞인 저음의 목소리.

“더 반갑게.”

선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유신을 마주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 했기에 느닷없이 가슴이 쿵쿵 두방망이질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별로 마주하고 싶은 얼굴도 아닌데 심지어 단둘만 있는 상황이다. 선율은 마지못해 돌아섰다. 그러곤 유신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조유신 이사님. 회의 시간에 딱 맞춰 오셨네요.”

선배, 후배, 구여친, 구남친 계급장 떼고 철저히 일로만 대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깍듯한 태도였다. 그 뜻을 알아챈 유신이 느슨하게 기대었던 등을 떼었다.

“어디 다녀와요?”

“볼일이 있어서 잠깐 바깥에.”

“무슨 볼일?”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런 거 같네.”

엘리베이터 안에 옅은 향수 냄새가 잔잔히 퍼져 있었다. 그와 딱 어울리는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향.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 강렬한 향기였다.

그의 시선에 무감해지려 노력하며 선율은 바뀌는 숫자만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무진장 느리게 느껴졌다.

‘13층이 무슨 130층 같네.’

설상가상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누구라도 같이 타면 숨통이 좀 트이려나 싶었는데 정작 열린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성질 더럽게 급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이용한 모양이었다.

선율은 신경질적으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때였다.

“예쁘네요, 새 옷.”

등 뒤에 서 있던 유신이 나직이 말했다.

“나 만난다고 사 입었을 리는 없을 테고.”

약간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왠지 소름이 쫙 번졌다.

“새 옷인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대답하는 대신 한 걸음 다가섰다.

경직된 눈으로 바라보는 선율을 향해 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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