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같은 시각, 탕비실 뒤편의 비상계단.
“이거 좀 마셔, 선율아.”
기철이 선율에게 따뜻한 허브티를 건넸다. 선율은 캔을 받았으나 뜯지는 않았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난 후의 정적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기철이 선율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사과했다.
“아까 나서지 못한 건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회사에 우리 집안 얘기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아까 사람들이 엄마를 알아보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더라.”
“알아.”
“엄마가 네게 손찌검을 한 것도…… 후우, 다 내 잘못이다. 헤어졌다고 둘러대면 널 괴롭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선율은 바닥을 응시하며 픽 웃었다.
“네 어머니 진짜 대단하시다. 하다 하다 뒷조사까지 할 줄은 몰랐네.”
기철은 펄쩍 뛰었다.
“뒷조사라니!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 우연히 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봤거나 그랬겠지. 아, 그래! 엊그제도 회사 앞에서 대화한 적 있잖아.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엄마가 오해했나 봐.”
“오해?”
“아……. 그래, 우리 헤어진 거 아니니 오해는 아니지.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가 헤어진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엄마 입장에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
오해란다.
선율은 다른 무엇보다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탁 걸렸다. 헤어진 적도 없는데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어이가 없지만, 그걸 들킨 상황에서 쭈뼛거리며 숨어 버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한테 정떨어지는 거 한순간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유리문 뒤에 숨어 눈알만 굴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지금껏 뭘 믿고 이런 놈과 사귄 건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헤어지자.”
“뭐?”
“김기철, 그만 헤어지자고.”
담담하게 고한 이별의 말에 기철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선율아,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엄마가 잘못한 것도, 내가 잘못한 것도 다 미안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내가 잘 얘기할게.”
“…….”
“아니, 이참에 우리 결혼하는 거 어때? 엄마가 반대하니 혼인 신고부터 하자. 잘 사는 모습 보여 드리면 언젠간 엄마도 마음을 여실 거야.”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모르는구나, 너는.”
선율의 입가를 타고 나직한 조소가 흘렀다.
“지긋지긋해.”
“……뭐라고?”
기철이 제 귀를 의심하듯 눈을 치켜떴다.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보다 곁에 있을 때 편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그러더라. 그래, 어쩌면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네 곁에 머물렀는지도 몰라.”
드디어 올 게 왔다고, 기철은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선율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은 늘 무채색이었다. 제 쪽에서 손을 놓는 순간 끝나 버릴 사이. 그래서 더욱 절실히 매달렸고 애원했다.
“네 마음이 어떤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널 사랑하니까 기다릴 수 있다고!”
“기다리면 뭐가 달라지는데?”
“선율아!”
“편한 적도 있었고, 가끔은 기대고 싶은 적도 있었어. 네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 적도 분명 있었지. 그런데 기철아.”
서글픈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원하는 건 줄 수가 없어.”
이 세상 모두가 불타는 사랑만 하는 건 아니라고, 뜨뜻미지근한 감정이 어쩌면 더 안정적일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처음부터 기울어 있던 그들의 관계는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라는 걸.
“만나면 만날수록 내 감정은 점점 얄팍해지기만 해. 그냥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말라 버리는 기분이야. 이런 내게 넌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난 이대로는 못 헤어져. 네 곁에서 허비한 내 시간은 어쩔 건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곁에 있게만 해 달라고 한 건 너야. 결혼 생각 없다고 수차례 얘기했어. 헤어지자고도 다섯 번쯤 말했나? 그럴 때마다 붙잡은 건 너잖아!”
“그럼 이번에도 붙잡혀 주라. 나 정말 잘할게. 엄마가 더는 너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죽을힘을 다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러나 선율은 흔들리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간 안일하게 대처해 온 결과 모두가 불행해졌다. 이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헤어지자고 말했고, 그 이유 똑똑히 설명했어. 그러니까 지난번처럼 집 앞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지 마. 그땐 정말 경찰 부를 거야.”
선율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말했다.
이제는 진짜 이별.
씁쓸한 얼굴로 돌아선 그녀의 귓가로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든 건 그때였다.
“조유신 나타나자마자 이 지랄이네.”
뒤통수에서 믿지 못할 만큼 싸늘한 조소가 들려왔다.
“뭐?”
선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대학 시절부터 항상 젠틀한 모습만 보여 주던 그였다. 가끔 대리 기사나 택시 운전수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술에 많이 취해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기철의 입으로 욕설을 들은 것도, 날카로운 빈정거림이 가슴을 찌른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금 너 뭐라고 그랬어?”
“못 들었으면 다시 얘기해 줘?”
성큼성큼 다가온 기철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선율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 새끼 때문에 흔들린 거잖아, 너.”
“우윽, 이거 놔!”
“아니면 아니라고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봐. 이렇게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 따로 있는 거 아니야?”
선율은 있는 힘을 다해 기철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곧장 그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짜아악―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비상계단에 거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기철은 뜨끈해진 뺨을 손으로 감싸 쥐며 고함을 질렀다.
“야, 한선율!”
“왜, 김기철.”
어느덧 선율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조유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일이 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팔 년이었어!”
기철은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았다.
“선율아……. 내가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모두가 찬란했던 시절, 혼자서 암흑 속을 헤매던 선율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건 기철이었다.
딱 한 번의 연애. 그리고 꼬리표.
그녀가 유신과 헤어진 직후 교내엔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
4학년씩이나 돼서 신입생한테 따먹혔다느니, 침대 위에서 나무토막같이 굴어 차였다느니, 등나무 벤치에서 둘이 물고 빨고 하는 걸 봤다느니.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소문은 연기처럼 퍼졌고, 유신은 아무런 해명도 없이 어디론가 증발했다.
철없는 동기들은 그녀를 연하남 킬러라 불렀다. 조별 과제 때문에 남자 후배와 도서관에 마주 앉아 있는 걸 보고도 손가락질했고 누군가 화실에 몰래 음료수와 쪽지를 남기고 가는 날이면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한선율 저년 아무한테나 꼬리 치고 다니는 버릇 아직 못 고쳤다고.
은따 같은 건 중고등학생 때나 있는 줄 알았는데.
머리가 굵은 아이들의 따돌림은 더욱 집요하고 치졸했다.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학생 식당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던 나날들. 이건 밥이 아니야. 그냥 숟가락을 움직이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자.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하루하루를 버틴 예전의 어느 날.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기철의 입에서 과거 얘기가 나오자 선율은 참을 수 없이 비참해졌다.
“서, 선율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너무 화가 나서……. 야, 아무리 그렇다고 뺨을 때리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철이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러나 선율의 눈동자는 한없이 싸늘했다.
“나한테 맞은 게 억울해? 그럼 너도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선율은 뒤돌아섰다.
반년을 만난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까 계순에게서 얻어맞은 뺨이 이제야 몹시 쓰라릴 뿐이었다.
* * *
선율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어둑한 담장 아래, 베링거 슈퍼 스터드 V880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안엔 조금 피로한 모습의 유신이 운전석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아까 계순에게 손찌검당하던 선율의 모습이 내내 떠올랐다.
‘많이 아팠을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픈 것보다 쪽팔려서 견디기 힘들 거다.
‘미팅 룸에서 그 아줌마 손목을 꺾어 버렸어야 했는데.’
평소 후회를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율을 만난 후로는 자꾸 후회가 는다.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알고,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후회스러웠다. 모든 게.
스피커에서는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프면서도 웅장한 피아노 선율이 어둑하게 침잠된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신은 차 안을 꽉 채우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걸어오는 선율이 보였다.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터덜터덜 집 앞에 다다른 그녀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열쇠야. 집주인은 카드키도 안 달아 주고 뭐 하나?’
그녀가 사는 이 층짜리 주택은 대로에서 십 분 이상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 리모델링해 낡은 느낌은 없었지만 대로변의 번쩍번쩍한 오피스텔이나 아파트에 비하면 비교적 소박한 곳이었다.
일 층은 집주인이 쓰고 이 층은 선율이 세 들어 사는데, 선율은 대학 다닐 때부터 쭉 이곳에서 자취를 했다. 본가가 지방이라 혼자 살 수밖에 없는 그녀를 걱정해 그녀의 부친이 직접 발품을 팔아 구한 곳이었다.
집주인 내외가 알고 보니 동향 사람이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며 선율의 부친은 없는 형편에 보증금을 마련해 주었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 내외는 그때부터 한 번도 월세를 올리지 않았다.
선율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창 밖으로 불이 탁 켜졌다. 안쪽에서 움직이는 선율의 그림자를 보며 유신이 중얼거렸다.
“방범창 새로 달고 커튼 바꿔야겠네. 보려고 마음먹으면 가슴 사이즈까지 알 수 있겠어.”
잠시 후 2층 문이 다시 열렸다.
삐걱하는 소리에 눈꺼풀을 열어 보니 문 앞 평상에 자리를 깔고 앉은 선율이 보였다. 스마일이 그려진 분홍색 홈 웨어를 입고 머리엔 쪼글쪼글한 헤어밴드를 한 그녀를 보자 유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귀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