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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흥, 경찰 부른다고 하면 누가 무서울 줄 알고? 경찰이 뭐, 네깟 하찮은 년 지켜 주려고 나를 쫓아내기라도 할 것 같아?”
“물론 믿는 구석이 있으시겠죠. 고고하고 지체 높으신 안계순 사모님.”
기철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서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른 계순을 뜯어말려야 하는데 남들 시선이 의식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계순?”
직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낯이 익네.”
“헉, 저분 한주그룹 회장 사모님 아니야?”
누군가의 입에서 ‘한주그룹’이란 얘기가 나오자마자 멈칫거리던 기철의 발이 아예 굳어 버렸다.
‘아…….’
이 회사에서 기철이 한주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외동아들.
겸손하려고, 뭐 그런 좋은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입사 당시 한주그룹은 비리로 시끌벅적한 때였다. 대충 덮고 끝날 일이 아니라 하마터면 회사가 그대로 무너질 뻔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김한주에게 기철은 눈 밖에 난 자식이었다. 경영학과에 진학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미대에 진학했을 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관계는 그가 졸업 후 바이디오에 입사하면서 극대화되었다.
뭐든 제 통제하에 있어야 안심하는 기철에게 강압적인 아버지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이제 육십밖에 안 된 아버지는 적어도 팔순이 될 때까지는 회사를 좌지우지할 힘이 있을 텐데 그 밑에서 이십 년이나 버틸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래서 기철은 그 좋은 배경을 물리치고 작은 광고 대행사를 선택했다.
물론 계순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내 아들과 헤어졌다고 눈속임을 하고 감히 뒤에서 만나고 다녀?”
자신을 알아본 듯한 사람들의 시선에 뜨끔한 계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선율이 ‘굳이’ 제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밝힌 까닭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행동을 자중하지 않으면 기철의 정체까지 까발리겠다는 경고겠지. 저 앙큼한 것의 수작에 말렸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헤어졌다고 눈속임한 것도, 뒤에서 만나자고 졸졸 쫓아다니던 것도 그쪽 아드님입니다. 제 직장까지 찾아와 난동 부릴 시간 있으면 아드님 단속이나 하시죠.”
“우리 집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쪽 재산을 노린 거면 지난번에 1억 든 봉투 주셨을 때 냅다 먹고 튀었겠죠. 아니면 저한테 홀랑 눈이 돈 아드님 살살 꼬여다가 혼인 신고서에 도장부터 찍었든가.”
“이…… 이 발칙한!”
“안계순 여사님.”
선율이 커피 묻은 손을 손수건에 닦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 귀한 아드님이 누군지 여기서 얘기할까요?”
“개미만도 못한 게 지금 누굴 협박해!”
궁지에 몰린 계순이 다시 손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아줌마.”
문 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도 않은 소리였음에도 사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야, 당신! 지금 나 부른 거야?”
계순은 어이가 없어 엄지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문 앞의 유신이 삐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계순은 격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 누구야? 거지 같은 게 감히 누구더러 아줌마래?”
“그 말. 예전에도 들어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유신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뚜벅뚜벅.
그가 천천히 회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선율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구김 하나 없는 슈트, 먼지도 미끄러질 것 같은 구두, 주머니에 가볍게 찔러 넣은 손.
입매는 웃고 있으나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뜻밖의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화살처럼 쏟아졌으나 그의 눈은 오로지 계순에게 꽂혀 있었다.
“아줌마.”
무심하게 걸어온 그가 계순의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은 벼린 칼날처럼 예리해 보였다.
“기억력이 부실하시네. 8년 전 ‘그날’도 나한테 똑같은 말 하지 않았나?”
“8년 전…… 그날?”
“애써 이것저것 떠올려 볼 것도 없습니다. 지금 아줌마 머리에 딱 떠오른 그날이 맞으니까.”
그가 낮게 웃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그의 주위로 번져 가는 듯했다.
‘누구지? 낯이 익은 것도 같은데…….’
떨리는 시선이 유심히 상대의 시선을 짚어 갔다. 이윽고 그녀의 입 밖으로 비명 같은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너, 너는……!”
계순이 눈을 부릅떴다.
“기억하나 보네.”
느릿하게 허리를 숙인 유신이 사색이 된 계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변화무쌍한 계순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대충 협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변의 술렁임이 커졌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모르겠어, 나도.”
난데없이 회사에 쳐들어와 난동을 피운 계순과 그녀를 아는 듯한 유신, 그리고 중간에 낀 선율.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듯 팽팽히 대립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너도나도 입을 댔다. 누군가는 선율과 유신이 사귀는 사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럼 저 사모님 아들이 조유신 이사라는 얘기냐며 말도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또 누군가는 혹시 저 사모님 아들과 조유신 이사, 그리고 선율이 삼각관계가 아닐까 그럴듯한 추론을 하기도 했다.
점차 커져 가는 의혹 속에서 계순은 사색이 된 채 유신을 노려보았다.
“너…….”
“여기서 쪽팔리기 싫으면 따라 나와요.”
유신이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얼핏 듣기엔 권유였으나 계순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 명령이라 봐도 무방했다.
“회의는 하루 미룹시다.”
붉으락푸르락한 계순을 뒤에 두고 유신이 먼저 돌아섰다.
“네, 알겠습니다.”
수군거리던 직원들이 얼른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구부렸다.
* * *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와이프이자 기철의 어머니, 계순은 근래 들어 이렇게 놀라 본 적이 없었다.
‘저놈이 8년 전 그 아이가 맞는 거야? 내 앞에서 고개 빳빳이 쳐들고 바락바락 대들던 그놈?’
죽은 사람이 살아온대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율과 헤어졌다는 아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녀는 바로 어제, 아들의 휴대폰을 뒤졌다.
기철이 아직 선율과 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하루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건 기록이 남아 있었고, 그 번호를 검색해 보니 아들이 보낸 문자가 수십, 수백 통이 나왔으니까.
더 화가 나는 건 천금같이 귀한 제 아들이 그 보잘것없는 계집애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 감히 이것들이 짜고 나를 속여?’
계순은 정말이지 선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도, 부모도, 성격도 뭐 하나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반반한 얼굴과 꿇리지 않는 학벌은 더 싫었다. 곱상한 얼굴로 제 아들을 꼬여 낸 것도 괘씸하고 좋은 학교 나왔다고 당당하게 구는 꼴은 치가 떨렸다.
없는 집구석에서 자랐으면 고분고분하기라도 하든가, 뭐 그리 잘났다고 고개 뻣뻣이 들고 잘난 척을 하는지 생각만 해도 배알이 뒤틀렸다.
기철이 선율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계순은 망설임 없이 회사로 쳐들어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율에게 개망신을 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기철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네가 계속 한선율을 만나겠다고 우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똑똑히 보라고.
어차피 그 회사에서 기철이 제 아들임을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머리채 잡히는 건 선율 하나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졌다.
눈앞에서 건들거리고 있는 이놈 때문에.
“표정 보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8년 전 그 사건.”
“글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나이 들더니 치매가 오셨나? 아무리 늙어도 그렇지, 아들이 저지른 그 끔찍한 범죄를 잊으면 쓰나.”
유신이 쯧쯧 혀를 찼다. 계순은 핏발 선 눈으로 유신을 노려보았다.
“8년 전 선후배 셋이 고깃집에서 술 마시다가 싸움이 붙었던 사건을 얘기하는 거라면 글쎄, 내 아들이 한 짓이 아니라 모르겠는데?”
“싸움만 붙은 게 아니지. 그중 한 명은 얼굴이 아예 숯 더미에 새카맣게 타 버렸으니까!”
“그래! 네가 그런 거잖아! 이 끔찍한 놈, 선배 얼굴을 불구덩이에 처박아 놓고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유신의 입가로 피식 조소가 스쳤다.
“발뺌하기엔 늦었어요, 아줌마.”
계순의 머리 꼭대기에 선 듯 오만한 얼굴로 유신이 귓구멍을 톡톡 두드렸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라면 아까 날 따라 나오지 말았어야지.”
계순은 조금 전 유신이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김기철이 한 짓, 당신 남편도 알고 있나?]
[!]
소름 끼치도록 악랄한 협박이었다.
그는 계순의 약점 두 개를 정확히 공략했다. 김기철, 그리고 김한주 회장.
기철이 제 아들이란 사실이 이 자리에서 밝혀지는 것도, 8년 전 제 손으로 묻어 버린 그 사건이 김한주 회장에게 알려지는 것도 계순은 원하지 않았다. 가장 약한 곳을 교묘하게 파고든 그의 한마디에 계순은 손쉽게 걸려들었다.
“난 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이좋게 술 마시고 있다가 느닷없이 선배 머리통을 불에 처박은 걸로도 모자라 내 아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고 한 건 너잖아! 내가 그 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배운 지 오래돼서 주어가 헷갈리나 본데.”
유신이 한 걸음 다가섰다.
“누명을 덮어쓴 건 나지. 그 일로 감방에서 일 년이나 썩은 게 누군데.”
계순은 순간적으로 시커먼 그림자에 질식당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두려움에 휩싸여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방성범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사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회의 시작할 시간 아닙니까?”
“이, 이사님?”
계순이 눈을 부릅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에 그녀는 절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제법 잘 커서 돌아왔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유신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지켜봐요. 내가 어떻게 당신 아들을 망가트릴지.”
성범에게 눈인사를 하며 유신이 고개를 숙였다.
“엿 됐다.”
“!”
“당신 아들 입에서 그 말 꼭 나오게 해 줄게.”
계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