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사이 차는 다시 한남 대교에 진입했다.
취한 사람과 말 섞어 봤자 득 될 거 하나 없다는 걸 깨달은 선율은 눈을 부릅뜨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입을 조개처럼 다문 선율 때문에 차 안엔 정적만 가득했다.
“…….”
“…….”
유신은 시트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선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정신은 아까부터 차린 상태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쯤, 어쩌면 선율이 그의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차 안을 꽉 채운 그녀의 향기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그녀의 보드라운 목덜미가 있었다. 안으면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어깨도,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찰랑거리며 흐트러지던 머리카락도.
이번엔 결코 길을 잘못 들지 않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두 눈과 예쁘게 뻗은 콧대가 백미러를 통해 보인다.
‘입술, 보고 싶은데.’
유신은 뒤척이는 척하며 조금 시선을 끌어 올렸다.
각진 백미러로 그녀의 입술이 보일락 말락 했다.
붉고 도톰한 그녀의 입술. 맞대면 과실을 빨듯 싱그러웠던, 깊게 베어 물면 입 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탐스러웠던.
오기로 버텨 온 지난 세월 동안 너무나 그리웠었다.
[유신아, 너 웃을 때 입꼬리 끝이 이렇게 움푹 들어가는 거 알아? 꼭 보조개 같아서 너무 귀여워.]
예쁜 말만 해 주던 그녀의 입술이.
[그래서 난 네 얼굴 중에서 입술이 제일 마음에 들어.]
키스를 하고 나면 항상 도장을 찍듯 입꼬리에 뽀뽀를 해 주던 그녀가.
백미러로 똑똑히 보이는 그녀의 입술이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아까 김기철과 입을 맞추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불길이 들끓었다. 이대로 차를 세우고 그녀의 입술을 빨고 싶다. 그 새끼 흔적 같은 건 깨끗이 지워 버리고 제 것만을 새기고 싶다.
할짝.
유신의 혀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심장이 버석거리는 것 같았다.
“다 왔어. 일어나.”
그사이 선율이 운전하는 차가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유신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설마 이대로 버려두고 가진 않겠지.
조금이라도 그녀와 가까이 있고 싶은 욕심에 유신은 잠든 척 한참을 있었다. 잠시 후 뒷좌석 문이 열렸다.
“진짜 잠든 거야?”
선율이 손을 뻗어 묵직한 그의 몸을 흔들었다. 짤짤짤 멱살도 흔들어 보고, 쾅쾅 어깨를 두드려도 깨지 않자 그녀가 형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안 일어나면 진짜 확 버려두고 간다.”
나 버리고 가지 마, 선배.
“셋 셀 동안 일어나. 하나, 둘, 셋!”
조금만 더…….
“너 진짜 자는 거야? 정신 안 차릴래?”
조금만 더 나랑 있자.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후우.”
선율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귀찮은 자식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득 꿋꿋이 눈을 감고 있는 유신의 얼굴 위로 옅은 바람이 불었다.
설마 따귀라도 때리려는 걸까. 감은 눈꺼풀에 얼핏 비친 손그림자에 유신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하늘이 내린 그의 운동 신경이면 이 정도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때리면 그냥 맞아야지.’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닿고 싶은 거라면 너무 변태 같은가.
자조하는 유신의 뺨에 손이 닿은 건 그때였다.
“…….”
닿았다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닿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도 따스했다. 쿵쿵.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이대로 붙잡고 싶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내 옆에 붙들어 놓고 싶어, 선배.
매만지듯 가만히 얼굴 위를 배회하던 손길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녀의 온기가 몸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유신이 손을 확 끌어당겼다.
“아……!”
그녀의 몸이 쓰러지듯 유신의 허벅지 위를 짓눌렀다. 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너 안 잤어?”
“선배가 이러는데 어떻게 자.”
유신은 그대로 선율의 팔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녀가 피할 틈도 없이 입술을 베어 물었다.
사정없이 그녀의 입술을 헤집는 순간 오랜 갈증 위로 비가 내렸다. 한쪽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던 둑이 터진 듯, 메마른 곳곳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예전처럼 달콤했다. 빨면 빠는 대로 과즙이 나오는 것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유신은 정신없이 그녀를 머금고 탐했다.
“으읍, 읍!”
선율은 거세게 그의 어깨를 밀쳤다.
“미쳤어? 이거 성추행이야.”
사정없이 그의 가슴을 때리고 고개를 비튼 그녀의 눈에 립스틱으로 범벅이 된 유신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그럼 신고해.”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예 짓누를 기세로 선율의 몸을 타고 올라온 그가 다시금 입술을 부딪쳐 왔다. 정신없이 그에게 헤집어지는 동안 8년 전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좋아하는 거 아니면 패 버려요. 뼈 하나 부러트려도 신고 안 할게.]
달빛이 참 예뻤던 그날의 너와 나.
한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웠던 그때의 키스가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선율은 눈을 부릅뜬 채 유신을 보았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이 순간조차 잔인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를 조금도 잊지 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율은 화가 났다.
이럴 거면서 왜 그때 나를 버린 건데.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던 널 나는 왜…… 왜 기다린 건데.
퍽!
선율의 주먹이 유신의 가슴을 후려쳤다. 갈비뼈를 제대로 맞은 유신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린 순간 선율은 재빠르게 시트를 벗어났다.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마. 무척 불쾌하니까!”
선율이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닦았다. 조수석에 올려 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닫자 유신이 뒷문을 열고 내렸다.
“불쾌한 건 내 쪽이 더한데.”
그가 열린 문을 한 손으로 잡고선 말했다.
“김기철이랑 키스하지 마.”
그건 경고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그 자식과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새카맣게 타 버리는 것 같다고, 그녀에게 애원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선율은 차갑게 조소했다.
“취해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모양인데 지금 내 남자 친구는 기철이거든? 넌 아무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훈계질이야?”
“……광고주 자격으론 안 되나.”
“광고주가 무슨 신이라도 돼? 사적인 일에 광고 들먹거리는 거 갑질에 직권 남용이야.”
“어차피 갑질하는 거 한 번만 더 합시다.”
유신이 얻어맞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나 좀 방까지 데려다줘요.”
이 자식이 무슨 되지도 않는 개수작이야.
선율은 기가 차서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유신이 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건 진짜였는데.”
뻐근한 가슴에서 이제야 거센 통증이 느껴졌다.
오전에 주차장 기둥을 들이받으며 에어백에 부딪친 자리였다. 하필이면 선율이 주먹으로 후려친 곳이 그 자리였다.
“진짜로 아프다고, 선배.”
진짜는 하나도 못 알아먹고 보이는 것만 믿는 그녀가 이젠 조금 미워지려고 한다.
그래도 조금만 더 눈에 담고 싶다.
유신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선율의 뒷모습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 * *
다음 날.
선율은 점심도 거른 채 업무에 집중했다.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해 눈 밑은 퀭하고 얼굴이 푸석했다.
어제 진득이 맞물렸던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뜨겁고 거칠게 그녀를 밀어붙이던 그의 숨결이 떠올라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차라리 싫었으면 나았을까.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운 그의 키스에 가슴이 뛰어 버렸다는 게 미치도록 한심스러웠다.
‘한선율 인생 참, 지긋지긋하게 가볍다.’
그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그가 쥐면 쥐는 대로.
어쩜 예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하지 않았는지 모두가 변했는데 저만 그 자리인 듯하다.
“어? 팀장님, 입술이 왜 그래요?”
회의 자료를 프린트해 오던 주희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입술? 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선율은 그제야 제 손이 립스틱 범벅인 걸 알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립 다시 바르셔야겠다. 제 거 빌려 드려요?”
“아냐, 내 거도 있어.”
선율은 티슈를 뽑아 손을 쓱쓱 닦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오후에 광고주에게 미팅 결과를 공유하는 회의가 잡혀 있었다.
회의실 가장 상석에 앉아 발표를 지켜볼 유신의 느긋한 얼굴을 떠올리니 도저히 게으름 피울 수가 없었다.
어제 일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뒤척거리지도 않았고, 네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어.
그에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율은 더욱 공들여 퍼프를 두드렸다. 퀭하게 내려온 다크 서클을 감추고 입술 라인을 말끔하게 메운 후에 그녀가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지금 한선율 어디 있어?”
일찍 회의실에 도착해 미팅을 준비하던 선율의 등이 선득해졌다. 깜짝 놀란 그녀가 돌아봤을 땐 이미 계순이 눈앞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쥐새끼 같은 년이 여기 숨어 있었네! 내가 진즉에 경고했었지. 내 아들 옆에서 떨어지라고!”
짜악!
매서운 손아귀가 뺨을 후려쳤다. 비틀거리며 탁자에 손을 짚는 바람에 테이크아웃 잔에 담겨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쏟아졌다.
오늘은 뺨부터 때리고 시작하는 건가.
선율은 놀라기보다는 화가 났다. 그 와중에도 커피로 흠뻑 젖어 버린 노트북부터 반사적으로 구한 후 몸을 곧추세웠다.
“남의 회사까지 찾아와 뭐 하는 짓입니까?”
그녀의 눈은 침착했으나 목소리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짓?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계순이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짧은 찰나 선율의 눈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빔프로젝터를 준비하고 있던 주희와 유리창 밖을 기웃대는 직원들, 그리고 기철.
‘고귀하신 사모님이 회사까지 찾아와 이러는 이유를 알겠네.’
계순은 기철에게 보여 주려는 거다.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선율이 어떤 수난을 겪게 될지. 눈 가리고 아웅 해 봤자 내겐 안 통한다고 단단히 경고하려는 거다.
탁.
허공으로 치켜 올라간 계순의 팔목을 선율이 움켜쥐었다.
“품위 지키시죠. 한 번만 더 손찌검하시면 바로 경찰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