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9)화 (9/85)

9

원래 기획팀의 아이디어 회의는 브레인스토밍으로 이뤄지곤 한다. 대수롭지 않게 마구 뱉은 아이디어 중 99퍼센트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1퍼센트가 살아남아 광고가 된다.

‘신차가 아니다. 신무기다.’

선율은 눈을 감은 채 그 문장을 되뇌었다. 어두운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슈퍼 스터드의 동체가 선명히 그려졌다. 투명한 앞 유리 전면에 떠오른 숫자들.

horse power 880

zero百 3.2second

quarter mile 8.25second

warp speed 400km/hr

게임 속 화면과 같이 펼쳐지는 숫자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쳤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선율이 이윽고 번쩍 눈을 떴다.

“그걸로 갑시다.”

“네?”

“이보다 더 좋은 건 백날 회의해도 안 나와요. 이 바닥에선 엉덩이 오래 붙이고 앉아 있는 게 미덕이 아니라니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매분 매초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즉, 필이 꽂혔을 때 즉각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걸로 오후 회의 들어갑니다. 준비해요.”

새로 뽑은 카피를 얼른 비주얼라이즈하고 싶은 욕심에 선율이 분주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최고야, 주희 씨.”

기뻐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주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일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벌써 열 시네. 이제 퇴근할까요?”

“와, 드디어 해방! 팀장님 입에서 그 말 나오길 두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파김치가 된 주희가 반색하며 일어났다. 진즉 싸 둔 가방을 냉큼 어깨에 멘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선율은 픽 웃으며 귀엽다는 듯 주희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면 요 앞에서 국수나 하나 말아 먹을래요?”

“완전 좋아요! 샌드위치로 두 끼나 때웠더니 배고파 죽겠어요.”

“그럼 일어납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건물을 나섰다.

빌딩에서 한 블록쯤 걸으니 포장마차가 나란히 선 도로가 나왔다. 둘은 자주 가는 포차에 자리를 잡고 열무국수 하나와 홍합탕, 닭 꼬치를 주문했다.

“사장님, 소주 한 병도 추가요!”

주희가 번뜩 손을 들고 낭랑하게 외쳤다.

못 말리겠다니까, 저 술꾼.

다이어트식으로 매일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다는 주희를 보며 선율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세팅되고 소주가 나왔다. 주희는 현란한 팔꿈치 기술로 소주병 기술을 선보이곤 곧장 잔을 채웠다.

“오늘 하루도 고생하신 우리 팀장님을 위하여!”

“그럼 난 대한민국 최고의 카피라이터 황주희를 위하여.”

짠!

잔이 부딪쳤다.

포차 아주머니가 닭 꼬치 접시를 내려놓느라 선율이 잠시 멈칫한 사이 주희가 먼저 술잔을 들이켰다.

고개를 젖혀 소주를 털어 넣던 주희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어? 저 사람 조유신 이사님 아니에요?”

선율의 시선이 자동으로 주희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

포장마차 건너편 커다란 빌딩 앞에 눈부신 유선형의 슈퍼 스터드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위풍당당한 자태였다.

“한국에 두 대밖에 없는 차니까 조유신 이사님일 가능성이 최소 오십 퍼센트네요?”

“아니, 백 퍼센트야.”

“네?”

한국에 두 대밖에 없는 차가 왼쪽 보닛이 동시에 찌그러질 일은 없을 테니, 지금 저 차는 유신의 차라고 해야 옳았다.

차는 대로변에 비상등을 켜 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주변으로 두어 명이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고 주희가 걱정스럽게 입을 오물거렸다.

“좀 이상하네.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요? 제가 잠시 다녀와 볼게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주희가 휑하니 나가 버렸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가 꺼낸 말은 선율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팀장님, 아무래도 팀장님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무슨 일 있어요?”

“방금 저 건물에서 회식 있었나 봐요. 조유신 이사님이 술에 많이 취하신 상태더라고요.”

“그런데.”

“대리 기사를 불렀는데 다들 저 차는 운전 못 한다고 그냥 돌아갔나 봐요. 슈퍼 스터드가 대한민국에 딱 두 대 있는 차다 보니까 몰아 본 적도 없고. 딱 봐도 비싸잖아요. 괜히 대리비 몇 푼 벌겠다고 운전했다가 어디 긁기라도 하면 삼대가 손가락 빨고 살아야 한다나 뭐라나. 벌써 네 명째래요.”

주희가 손가락 네 개를 쫙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러다 조유신 이사님 길바닥에서 밤새우겠어요. 저 비싼 차 놔두고 택시 타고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무슨 상관이야. 신경 끄고 홍합탕이나 먹읍시다. 국물 식겠다.”

“어머, 우리 팀장님 변하셨네. 이게 왜 상관이 없어요? 이참에 우리 광고주님께 점수 좀 따야죠! 경쟁 PT 앞둔 팀장님 입에서 그게 나올 소리예요?”

아차.

선율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유신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어느새 그 다짐을 잊고서 밀어내기에만 급급했던 제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건너편에 있는 저 남자가 유신이 아니라 다른 광고주였다면 대리운전이 대수겠는가. 사다리라도 가져와 때 빼고 광내고 오밤중에 손 세차까지 해 줄 수 있었다.

“팀장님은 차 구조에 대해 잘 아시잖아요. 이번에 광고 준비하면서 공부 많이 했으니까요.”

“……그건 주희 씨도 마찬가지잖아.”

“전 술 마셨는데요?”

까딱까딱.

주희가 빈 잔을 털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이건 기회예요, 팀장님! 이참에 우리 광고주님께 얼굴도장 콱 찍으시고요. 생색은 제 몫까지 두 배, 아니 세 배로 내세요. 아셨죠? 퍼뜩 가세요, 퍼뜩!”

주희가 등을 떠밀었다.

선율은 마지못해 닭 꼬치 하나를 입에 물고 일어났다.

‘하다 하다 내가 네 대리 기사 노릇까지 하게 되다니.’

광고주만 아니었으면 콱.

선율은 닭 꼬치가 유신이라도 되는 듯 질겅질겅 씹으며 길을 건넜다.

뒷좌석을 들여다보니 유신은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목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비틀어 반쯤 잡아 뺀 채 와이셔츠 단추도 느슨하게 풀고 있다. 얼마나 마셨는지 차 안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매일 꼬리처럼 달고 다니던 비서는 어디에다 두고 혼자 있는 건지.

“어유, 이 진상. 야, 눈 좀 떠 봐. 조유신!”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유신이 반쯤 눈을 떴다.

“정신 좀 들어? 야,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기에…….”

“루미르 호텔.”

“뭐?”

“루미르 호텔로 가.”

이게 진짜 누굴 대리 기사로 아나.

빠직. 선율의 미간에 빗금이 그려졌다. 확 버려두고 가 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선율이 운전석에 올랐다.

이 빚은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다. 이번 광고 나 안 주면 진짜 가만 안 둬.

부르릉.

낮은 엔진음을 내며 차가 가볍게 진동했다. 시동이 걸린 순간 내비게이션 위로 초록색 글자가 좌악 떠올랐다. 보통의 차량에 매립된 내비게이션과 달리 슈퍼 스터드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은 TV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컸다.

“이거 어떻게 찍는 거야?”

아무리 찾아봐도 목적지 버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 다들 못 몰겠다고 하지.’

대리 기사들이 한사코 손을 내저은 사정이 이해가 됐다. 한참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보며 헤매고 있을 때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온 낭랑한 여성의 음성에 선율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악! 깜짝이야.”

―다시 한번 천천히 목적지를 말씀해 주세요.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인공 지능인가.

실제로 보니 조금 놀라웠다. 선율은 흠흠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루미르 호텔.”

―4.7킬로미터 전방에 루미르 호텔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맞습니까?

“응.”

이윽고 내비게이션이 지도 화면으로 바뀌었다.

“앗싸.”

선율은 인공 지능과의 교감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며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퍼 스터드는 기존의 차량과 아주 달랐다. 큰 차치고 핸들링이 아주 부드러웠고 배기량이 있어 소음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속도를 높여도 부드러운 저음의 엔진음이 들렸다. 투덜거리며 운전을 하던 선율은 어느새 슈퍼 스터드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번 몰아 보니 확실히 감이 다르네. 진즉에 타 볼걸 그랬지?”

낮에 구상해 두었던 광고 카피가 머릿속에 주르륵 떠올랐다. 고무된 그녀는 어느새 목적지를 잊고 한남 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목적지와 반대 방향입니다. 길을 다시 찾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알려 준 때에야 아차 한 선율이 백미러를 힐끗거렸다. 그러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유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헉.’

선율이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말없이 빤히 응시하는 새카만 동공에 괜히 제 발이 저린 선율이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뱉어 냈다.

“납치하려던 거 아니야. 길을 잘못 든 거야.”

유신은 그 상태로 한참을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샅샅이 훑는 시선에 뭐라고 다시 변명하려는 찰나 그의 눈이 스르륵 다시 감겼다.

“……취하니까 헛것이 보이네.”

그가 시트 헤드에 머리를 기대며 낮게 읊조렸다.

“징글징글하다, 한선율.”

선율은 가만히 있다가 따귀를 맞은 것처럼 어이가 없었다. 대리 기사로 착각한 것도 모자라 당사자를 앞에 두고 징글징글하다니.

“뭐가 그렇게 징글징글한데?”

술 취한 놈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누군데!

나 아니었으면 대리 기사 찾다가 길바닥에서 꼬박 밤샐 뻔한 놈이 누구더러 징글징글하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사람 아주 돌게 만드니까.”

“…….”

“옆에 두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선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거울 속 유신은 한 팔을 이마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세상 모든 무게를 짊어진 것처럼 지친 모습이다.

대체 뭐가 널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8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 밝은 것만 보고 자란 것 같던 너는, 무슨 이유로 그토록 괴로워하는 건데.

선율은 그의 지난 세월을 몰랐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 까맣게 음영 진 그의 얼굴에서 그간의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힘없이 눈을 감은 그의 어깨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거지, 한선율.

“너 어차피 내일 되면 기억 못할 거 같으니 얘기하는데. 사람 돌게 만드는 거 너도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피차 편해지고 싶으면 안 보고 사는 게 상책이야.”

“그런가.”

메마른 입가에 피식 웃음이 스쳤다.

“그럴 수도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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