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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종종 만났던 지하 주차장 기둥 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기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왔다.
“양아준 팀장한테 얘기 들었어. 조유신…… 내가 아는 그 자식 맞지?”
회사를 떠들썩하게 한 베링거 이사의 이름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원래였다면 진즉에 선율이 알려 줬을 테지만 며칠 전 결혼 문제로 다툰 터라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응, 맞아.”
선율을 간단히 대꾸했다.
“어떻게 그런 얘길 이제야 할 수 있어? 조유신이잖아. 대학 시절 널 그렇게 힘들게 했던 조유신이라고!”
“김기철, 목소리 낮춰.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네가 누구 때문에 죄인처럼 다녔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입생이랑 더럽게 얽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기억 안 나?”
“하나도 안 잊었어. 그러니까 우선 진정 좀 해.”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기철을 선율이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엔 잔잔하다가도 유신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발작처럼 소리를 지르는 그였다.
침착한 선율의 눈길을 받으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기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프로젝트 꼭 해야겠어?”
“아직 나로 결정된 거 아니야. 양 팀장이랑 피 터지게 붙어야 해.”
“조유신이 쟁쟁한 광고 회사를 제치고 굳이 바이디오로 온 게 무슨 뜻이겠어? 다 너 엮으려고 하는 거잖아! 그런 놈이 양 팀장한테 광고를 넘겨줄 거 같아?”
“내가 되면 할 거야.”
“선율아!”
선율은 입술을 다부지게 물었다.
“베링거 모터스 광고를 맡는다는 게 어떤 기회인지 알잖아. 이 부장님 커피 광고 하나 찍고 곧바로 승진한 거 못 봤어?”
“그렇지만 조유신이잖아!”
“조유신이 뭐.”
“…….”
“걔가 나한테 뭔데?”
선율의 반문에 기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그저 지나간 인연일 뿐이다. 대학 시절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사이.
그러나 기철은 어쩐지 끝난 것 같지가 않았다. 도발적으로 저를 바라보던 유신의 눈빛만 해도 그랬다.
요새 가뜩이나 흔들리고 있는 관계다. 여기에 유신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
‘……우라질.’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대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빼앗기고 말 거다.
“만약 당신이 그 프로젝트 맡게 되면 나도 그 팀에 들어갈 거야.”
속으로 욕설을 짓씹던 기철이 미간을 굳힌 채 고집스럽게 말했다.
“우선 CD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지금껏 사내 연애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라도 선을 그어 온 두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나온다는 건 이제 들켜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선율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야.”
무관심한 선율의 대답에 기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너…….”
반년이나 만나 왔지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기철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십 년 가까이 곁을 맴돌고, 빈틈을 엿보고, 애원하고. 그렇게 겨우 그녀의 마음 한 자락을 얻었다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조유신이란 존재 앞에선 한없이 같잖고 볼품없다.
기철의 불안감이 사납게 휘어져 나왔다.
“조유신 그 새끼, 네 눈앞에 안 보이게 그냥 치워 줄까?”
사나운 경고에도 선율은 덤덤했다.
“베링거 모터스 조유신 이사는 날 최고의 자리에 올려 줄 밧줄이자 디딤판이야. 이번 광고만 잘 따내면 광고판에서 한선율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될 거라고.”
“하지만…….”
“정작 조유신을 의식하는 건 너 아니야?”
기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동문회장에서 유신을 본 후로 잠자리에 든 순간조차 그를 떠올렸으니까.
형언할 수 없는 위기감, 그리고 선율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 과거에 제가 저지른 모든 일이 낱낱이 까발려질 것 같아 몹시 초조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기철은 고개를 떨군 채 입술만 움직였다.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줘. 일단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문제는 CD님과 상의해 볼게.”
선율은 이번에도 간단히 대꾸했다.
“그래.”
방성범 CD 휘하 팀들은 마케팅, 기획, 제작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케팅 부서에서는 광고주가 보내온 포트폴리오를 통해 제품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광고 방향을 잡는다.
기획팀에서는 마케팅 부서에서 넘어온 자료를 토대로 광고를 기획하고 콘셉트를 잡는다. 보통 카피라이터와 한 팀이 되어 움직인다.
제작팀에서는 기획팀에서 넘어온 스토리보드를 가지고 영상을 제작한다. 장소 협의, 영상화 등을 담당하며 카메라맨, 스타일리스트 등이 포함된다.
CD 휘하의 세 팀은 평소엔 각기 따로 움직이다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한 팀이 되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이번에 선율이 광고를 따내게 되면 그녀가 팀장이 되어 직접 팀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기철은 그 팀에 자신이 들어가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
기철이 속내를 감추며 애써 웃었다.
“일이 많아서 야근해야 할 거 같아. 도시락 시켜 먹으려고.”
선율은 기철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기철은 한층 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한테 화난 거 있으면 풀어. 당신한테 어머니 이해해 달란 말, 다시는 하지 않을게.”
“화난 거 아니야. 다만…….”
“다만?”
“……모르겠어. 네가 결혼 얘기 자꾸 꺼내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너를 좋아하고 고마운 것도 많지만 결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야. 이렇게 계속 만나는 게 맞는 건가 싶어. 우리 그냥…….”
기철은 황급히 말허리를 잘랐다.
“알았어, 알았다고.”
“기철아.”
“보채지 않을 테니까 기분 풀릴 때까지 생각할 시간 가져. 내 연락 안 받아도 돼.”
문득 지하 주차장 저편에서 묵직한 엔진음이 들려왔다. 선율의 등 너머로 시선을 던진 기철의 눈매가 사납게 휜 건 그 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직 연인인 거 맞지?”
기철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며 선율의 어깨를 잡았다.
선율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사랑해, 선율아. 진심이야.”
혹시나 사내 연애인 걸 들킬세라 회사에선 한 번도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았던 기철이 입을 맞추는 순간 선율은 묘한 이질감에 휩싸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차 들어오잖아. 이거 놔.”
선율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단단한 기철의 손아귀가 얼굴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냥 있어.”
기철은 더욱 거세게 선율의 얼굴을 붙잡았다.
“!”
선율은 그의 동공에 비친 새하얀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지하 주차장에 진입한 차량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 차!”
선율은 다급히 기철의 가슴을 밀어내고 머리를 감쌌다.
콰앙!
동시에 그들이 몸을 가리고 있던 주차장 기둥이 우르르 진동했다.
심장이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앉았다가 쑥 끌려 올라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리는 선율의 눈에 천천히 열리는 왼쪽 차 문이 보였다.
탁.
꼴사납게 쭈그려 앉은 기철의 눈앞에 새카만 구둣발이 내려앉았다. 주차장 기둥을 박아 왼쪽 보닛이 찌그러진 슈퍼 스터드 안에서 내리는 유신을 보는 순간 선율은 왜 기철이 평소엔 하지도 않는 짓을 해 가며 굳이 입을 맞추었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요. 운전이 미숙해서.”
유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너 이 새끼, 이거 살인 미수야! 차로 우리 둘 다 골로 보낼 뻔했다고! 알아?”
“글쎄.”
유신이 서늘한 시선으로 기철을 훑었다.
“다친 데 없으니 깽값 물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러곤 선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주차장 기둥 뒤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안 그래요, 선배?”
순간 선율은 뺨이 화끈할 정도로 수치심을 느꼈다.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낸 그녀가 유신의 가슴을 밀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비켜.”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 하얬다. 씩씩거리는 기철과 턱없이 여유로운 유신을 두고 그녀가 등을 돌렸다.
넌더리가 났다.
저를 손바닥에 올려 두려고 치고받는 두 남자에게, 그리고.
플라스틱 액자에 박제된 곤충처럼 과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 * *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선율은 양 팀장과의 경쟁 PT를 앞두고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건 외려 선율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소란으로 터질 것 같은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강렬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슈퍼 스터드880의 파워풀함을 강조하자는 거죠?”
“네. 아무래도 기존에 전기 차라고 하면 속도가 덜 난다, 모터가 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반면 베링거에서 출시한 기존 모델들은 귀족적이면서도 파워풀한 느낌이 강하죠. 슈퍼 카 오너들의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사실상 차량 자체의 성능보다는 브랜드 파워를 중요시한다는 보고가 있었어요.”
선율은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볼펜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능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기존에 베링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쓰는 게 낫다는 뜻이군요.”
“네, 정확합니다.”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건 입사 1년 차 카피라이터 황주희였다.
그녀는 대학교 졸업 후 바로 광고 회사로 뛰어든 신입이었다. 스물여섯 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 데다 관련 학과를 졸업한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센스가 남달랐다. 입사 1년 만에 선율의 오른팔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성장한 그녀를 보며 선율이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많이 컸네, 주희 씨. 이제 당당히 카피라이터라고 명함 내밀 수 있겠어.’
그녀의 사수로서 물심양면 도왔던 지난날들이 참으로 뿌듯해지는 순간이다.
“나도 주희 씨 의견에 동의해요. 요새 광고 트렌드가 제품의 성능을 일일이 보여 주는 쪽은 아니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팀장님. 파워풀 이상으로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어떨까요?”
“파괴적인 모습이라.”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주희가 흠흠 헛기침을 하곤 근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건 신차가 아니다. 신무기다.”
순간 선율의 동공에 이채가 돌았다.